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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주 안에 거듭 태어나십시오! -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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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드 라 투르(1593-1652)가 그린 <회개하는 막달레나, 촛불과 막달레나>, 1640년경, 파리 루브르미술관 소장. 라 투르는 촛불에 비친 정경을 통한 종교화로 유명하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 가운데서 니코데모와 나눈 대화이다(요한 3,1-7 참조).

     

예수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코데모: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위로부터 내려오시는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항생 회개생활로 주님 안에서 항상 거듭나는 삶을 말한다. 류시화는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라는 책에서 27번 허물을 벗는 바닷가재 이야기를 해준다(231-235쪽).

     

젊은 날의 한 달을 다 바쳐 읽은 신화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의 명저 『황금가지The Golden Bough』에는 남태평양 바누아투 군도에 사는 멜라네시아인들의 신화가 채록되어 있다. 태초에 신은 인간을 죽지 않는 존재로 창조했다. 불사의 비결은 이것이었다. 나이가 들고 노쇠해지면 인간은 정기적으로 낡은 몸을 허물처럼 벗고 젊은이로 거듭났다.

노파가 된 한 여인이 늙은 몸을 벗으러 과거에도 여러 번 그랬듯이 숲의 강의로 갔다. 일설에 의하면 그녀는 모계사회 부족장 울타마라마였다. 그 이름은 ‘세상의 허물을 벗기는 자’라는 뜻이다. 그녀는 강으로 걸어 들어가 몸의 허물을 벗었다. 그리고 그 허물이 물에 떠내려가다가 하류에 떠 있는 나뭇가지에 걸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젊음을 되찾은 모습으로 돌아오자, 집에 있던 딸이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딸은 아름다운 젊은 여성을 낯선 이방인 보듯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누구예요?”

자신이 엄마라고 말하자 딸은 놀라 달아나겨 소리쳤다.

“아니야, 당신은 나의 엄마가 아니야, 나의 엄마는 그런 모습이 아니야.”

아무리 이해시키려 해도 소용없었다. 자신보다 젊어 보이는 엄마의 얼굴과 피부에 처녀인 딸은 울면서 화를 내고 괴로워했다. 결국 딸을 안심시키기 위해 울타마라마는 강으로 돌아가서 나뭇가지에 걸린 자신의 쭈글쭈글한 허물을 건져 다시 뒤집어썼다. 그녀가 늙은 모습을 되찾아 돌아오자 딸은 크게 안도하며 “엄마, 우리 엄마!” 하면서 그녀를 받아들였다. 그 후 인간을 허물을 벗기를 중단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불사의 능력을 잃고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신화는 말한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신은 세상을 창조하는 일을 마친 후 이렇게 선언한다.

“허물을 벗어던지는 자는 누구든 죽지 않으리라.”

우리가 탈피해야 하는 ‘허물’은 무엇인가? 굳어진 생활 습관, 고정관념, 익숙한 방식, 믿음 등이다. 이 허물들은 주기적으로 벗지 않으면 단단한 껍질로 굳어져 성장을 가로막는다.

허물 벗기에는 고통이 따른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변화를 가장 두려워하는 이는 가까운 이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허물을 벗어던지고 나타나면 우리의 새로운 자아를 알아차리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오라고 충고한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의 아내이고 엄마라면, 당신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을 때 남편과 아이는 그것이 당신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고 소리치며 주장할 것이다. 아이는 자신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와 달라고 울며 애원한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의 자식이라면, 부모는 허물 벗기 같은 허황된 소리는 집어치우고 당신이 안정된 자리를 지키기를 원할 것이다. 당신을 심리상담소로 데려갈지도 모른다.

그들을 기쁜게 하고 갈등을 피하기 위해 당신은 허물을 벗었던 허물을 다시 뒤집어쓰고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들은 박수치며 환영할 것이다.

우리가 랍스터라고 부르는 바닷가재는 딱딱한 껍질 안에서 사는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생명체이다. 그 딱딱한 껍질은 절대로 커지지 않는다. 바닷가재가 성장함에 따라 그 껍질이 몸을 점점 조여 오고, 당연히 바닷가재는 매우 불편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바닷가재는 포식자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한 바위 밑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자신의 껍질을 벗고 새로운 껍질을 만든다.

하지만 바닷가재는 계속 성장하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껍질마저 불편해진다. 그러면 또다시 바위 밑에서 껍질을 벗고 새로운 껍질을 만든다. 이 과정을 스물일곱 번 반복한다. 자신도 모르게 계속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바닷가재는 전에는 생각하지 못하던 압박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되고, 이 불편함이 탈피와 성장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그러한 느낌을 부정하고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성장을 멈추는 것이 된다.

랍비이며 정신과 의사인 아브라함 J. 트워스키는 이 바닷가재 이야기를 하면서, 만약 바닷가재에게 의사가 있다면 불편함을 느끼자마자 의사에게 가서 신경 안정제를 처방받아 먹고 기분이 괜찮아질 것이라고 정곡을 찌른다. 그래서 통증이 있음에도 결코 자신의 껍질을 벗지 않을 것이며 절대로 성장하지 못할 것이라고.

통증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통증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고, 그 통증을 거치면서 성장하는 일이다. 트워스키 박사는 말한다.

“불편함과 갑갑함을 느끼는 시간들은 당신이 성장할 시기가 되었음을 알려 주는 신호이다. 이 역경을 제대로 활용하면 그것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

     

이 이야기를 인용한 이유는, 죄사함의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우리 인간의 회개생활이 그 통증만큼이나 어려운 일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우리 인간이 자신의 길로 여긴 죄의 허물을 벗지 않고 사는 것은, 그만큼 익숙해진 일상의 삶, 습관을 벗어던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인한 회개생활은 몸에 익숙하지 않은 새 옷, 낯선 타인과 같은 길, 보지 못하던 세상일 수도 있다. “자기 앞에 놓인 길을 볼 수 있다면 자신의 길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자신의 길로 여긴 타인의 길일 것이다.” 타인의 길로 선뜩 들어서기가 주저되는 이유다. 주 안에서 거듭나는 회개생활을 이상적으로 실천한 사람은 사도 바오로이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러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말에서 떨어져 눈이 열린 바오로 사도는 평생을 지속해서 회개생활을 실천하였다. 코린토 2서 12장을 보면 알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제대로 끝까지 읽는다면,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12장에 기록된 바오로 사도와 주님의 두 번째 만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바오로 사도에게 갈릴래아 호숫가의 체험만큼이나 중요한 만남이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이미 14년 전에 품었던 비전에 대하여 언급한다. 고독하고 외롭던 이 시기에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을 다른 방식으로 알게 된다. 다른 사도들은 이미 주님과 함께하고 있을 때였고, 바오로 사도 역시 주님과 함께 있어야만 했을 때였지만 바로 이때가 주님이 바오로 사도를 제자로 삼은 시기였다.

바오로 사도는 이 시기를 거쳐 정화되며,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필리 1,21)라고 고백한다. 바오로 사도는 새로운 생활방식과 오직 주님이 넘겨주신 일 이외에는 그 무엇도 소중히 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자신도 점차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만이 그가 가진 전부가 된다. 바오로 사도가 자기 자신이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에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첫 번째 회개의 완성이자 두 번째 회개인 것이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과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을 살펴보아야 한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 3,7-9).

     

항상 주 안에 거듭 태어나는 삶이 아니라면, 다른 것들은 쓰레기로 여긴 것이다.

우리 육신은 수없이 죽어가는 세포들과 새로 태어나는 세포들로 허물을 벗어 던진다. 마찬가지로 언젠가 낡은 옷과 같은 육신을 벗어던지고 우리 영혼은 하느님 아버지를 맞이할 것이다.

인간은 천사로 변할 수도 있고, 또 루치펠과 같은 대악마로 변할 수 있다. 우리 속담에 머리에 털난 짐승을 거두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사랑을 받고 은혜를 입었어도 배반할 수 있는데, 이는 동물의 본능만도 못한 존재라는 것이다.

     

삶을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이 기대한 것이 아니라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인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인생’이다. 그 다른 인생의 기쁨은 부스러기로 즐기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면 세상이 말을 걸어온다. 인도의 두 신에게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남인도 타밀나두 주에 가면 비슈누 신의 다른 형상인 랑가나트 신을 모신 사원이 있다. 랑가나트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코브라 위에 누워 있는데, 인간이 앞에 오면 눈을 감는다. 그리고 동인도 오리사 주에 가면 비슈주 신의 또 다른 형상인 자간나트 신을 모신 사원이 있다. 자간나트는 눈을 뜨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둥글고 거대하게 뜨고 있다!

랑가나트 신이 인간이 앞에 오면 눈을 감는 것은 ‘나는 이 사람에게서 나쁜 면을 보고 싶지 않다’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자가나트 신이 인간 앞에 오면 눈을 크게 뜨는 것은 ‘나는 이 사람의 아주 사소한 좋은 면이라도 보고 싶다’라는 의미이다. 랑가나트 신은 나쁜 면을 보지 않기고 의식적으로 감은 눈을 상징한다. 자가나트 신은 인간의 좋은 면에 의식적으로 초점을 마춘 열린 눈을 상징한다.

만약 내가 이 세상 떠나며 영혼들의 교차로에서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나려고 엇갈리는 한 영혼을 만난다면, 나는 그 영혼에게 말하리라.

“당신이 상상하는 지구 행성이 아닐거야. 당신이 생각하는 인생이 아닐거야. 그래서 하루하루가 난해하면서도 설레고 감동적일 거야. 자신의 관념과 기준 속에 갇여 있지만 않는다면, 당신이 상상한 것보다 더 좋은 것들을 발견하기 위해 눈을 크게 뜬다면”(<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중에서).

     

우리 그렇게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하면서 훌훌 털어버리고, 다른 내 인생을 찾아 살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인 다른 인생을 받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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