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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종의 그때가 가을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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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의 에세이집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에 나오는 ‘그때가 가을이었으면’이란 글을 공감하며 나의 가을 선종을 꿈꾼다.

     

그렇다고 내가 내 생활의 톱니바퀴와 각박하게 엇물려 놓은 게 어찌 계절뿐일까. 사람과의 관계 또한 그렇다. 연전에 남편이 개복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대기실에서 가슴을 죄며 수술이 무사하게 끝나기를 빌었지만 암만해도 방정맞은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만약 잘못된다면? 이런 가정하에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남편을 잃은 아내로서의 순수한 고독이나 비탄이 아니라 나 혼자서 여러 애들하고 뭘 먹고, 뭘로 공부시키고 어떻게 사나 하는 생각이었다. 사람의 생각이 투명하게 밖으로 내비치지 않는다는 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큰 축복일까.

‘계절의 변화에 신선한 감동으로 반응하고, 남자를 이해관계 없이 무분별하게 사랑하고 할 수 있는 앳된 시절을 어른들은 흔히 철이 없다고 걱정하려고 든다. 아아, 철없는 시절을 죽기 전에 다시 한번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

소설이나 영화 같은 데는 자주 불치의 병에 걸린 주인공이 나온다. 의사와 가족만 알고 주인공은 자기의 시한부 인생을 전연 눈치채지 못한다. 가족들은 주인공을 감쪽같이 속이면서 남은 몇 달은 어떡하든 더 행복하게 해주려고 갖은 애를 쓴다. 이 대목이 바로 눈물을 노리른 대목이다. 그러나 나는 이 대목이 싫다.

나도 너무 늙기 전에 그런 병에 걸려 죽고 싶지만 이왕이면 내 생명이 몇 달이 남았다는 선고를 나 혼자서 내가 직접 듣고 싶다.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겠다. 가족이 먼저 알고 나를 속이게 하고 싶지도 않다. 마지막으로 그 소중한 몇 달을 가족들의 기만과 동정이라는 최악의 대우 속에서 보내고 싶지 않다.

나는 내 마지막 몇 달을 철없고 앳된 시절의 감동과 사랑으로 장식하고 싶다. 아름다운 것을 찾아 여기저기 허둥대며 돌아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한꺼번에 많은 아름다운 것을 봐 두려고 생각하면 그건 이미 탐욕이다. 탐욕은 추하다.

내 둘레에서 소리 없이 일어나는 계절의 변화, 내 창(窓)이 허락해 주는 한 조각의 하늘, 한 폭의 저녁놀, 먼 산빛, 이런 것들을 순수한 기쁨으로 바라보며 영혼 깊숙이 새겨 두고 싶다. 그리고 남편을 사랑하고 싶다. 가족들의 생활비를 벌어오는 사람으로서도 아니고, 아이들의 아버지로서도 아니고, 그냥 남자로서 사랑하고 싶다. 태초의 남녀 같은 사랑을 나누고 싶다.

이런 찬란한 시간이 과연 내 생애에서 허락될까. 된다면 그때는 언제쯤일까. 10년 후쯤이 될까. 20년 후쯤이 될까. 몇 년 후라도 좋으니 그때가 가을이었으면 싶다.

가을과 함께 곱게 쇠진하고 싶다.(1974)

     

“생명이 소멸돼 갈 때일수록 막 움튼 생명과 아름답게 어울린다는 건 무슨 조화일까? 생명은 덧없이 소멸되는 게 아니라 영원히 이어진다고 믿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 <소멸과 생성의 수수께끼>

     

가을, 떨어지는 낙엽 위에 유서를 남기고 싶은 것은, 내 죽음이 새 생명의 거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더욱이 나는 각양각색의 단풍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촛불이 마지막 불꽃을 태울 때 더 빛나는 것을 연상한다. 나무는 자신을 다 토해버리는 듯, 단풍의 색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설악산 단풍 구경을 나선 어떤 할망구 한 분이 ’아이고 곱기도 하여라, 하느님이 나뭇잎에 색칠을 해 놓으셨네. 인간은 저렇게 아름다운 색을 칠할 수 있을까?‘라고 감탄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다. 나 자신도 내 삶의 색깔도 저 단풍잎처럼 마지막 아름다운 색으로 칠하고 싶다. 그렇게 낙엽따라 가버리고 싶다.

     

치유와 깨달음의 시

삶을 하나의 무늬로 바라보라

류시화

     

삶을 하나의 무늬로 바라보라.

행복과 고통은

다른 세세한 사건들과 섞여들어

정교한 무늬를 이루고

시련도 그 무늬를 더해 주는 색깔이 된다.

     

그리하여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그 무늬의 완성을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 영화 <아메리칸 퀼트> 중에서

     

자신의 사명과 임무를 다한 낙엽들은 땅에 떨어져 썩고 죽어서 새 생명을 준비한다. 나는 그래서 단풍색이 좋고 그렇게 떨어진 낙엽이 좋다. 나의 노년기 삶도 단풍색들로 찬란하게 물들어 ‘곱기도 하여라, 어떻게 저렇게 아름답고 곱게 나이를 먹었을까’라는 찬사를 듣고 싶은 노욕이 남아 있는가 보다. 성서에서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는 그 나무가 어떤 열매를 맺는지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둬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둘 수 있겠는가.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당연한 진리이다. 나의 선종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그런 때인 가을이고 싶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6-20; 루카 6,43-44).

     

학창 시절 국어시간에 ‘낙엽을 태우면서’라는 수필을 보면서 위의 성서 말씀을 묵상했던 적이 있다. 나의 삶이 결코 재만 남기지 말고, 좋은 열매를 맺어 또 다른 생명의 씨앗과 결실을 거두는 그때가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가을에 선종하고 싶다.

나무 십자가에서 인류 구원을 위한 사랑의 열매를 맺는 예수님의 수난시기, 사순절에 선종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 생각했던 오래된 교우들이 전하는 말이 있다. 선종의 은총을 말하는 것이겠다. 하느님 아버지 뜻대로, 하느님의 섭리대로 따르는 것이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것이 아닌가. 도량이 깊고 덕망이 높은 스님들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대자연 속으로 있는 힘을 다해 들어가 나무 아래 낙엽 위에 누워서 자신의 임종을 맞이한다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썩어서 새 생명의 씨앗을 맺는다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인 것이다.

나는 한국 가을 하늘색은 마치 하느님 나라 색같이 높고 푸르며 금방 우리 마음을 물들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 마음의 색깔 같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하늘나라 색깔같이 땅에 사는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살러 오라고 손짓이라도 하는 듯한 색깔처럼 보인다. 사랑의 색깔이 있다면 가을 하늘색일 것이리라. 하늘의 모후로 하늘나라로 승천하신 성모 마리아 어머님의 허리에 매신 옥띠를 보면서, 성모님의 모성애 마음은 푸르디푸른 하늘과 바다의 색을 띠고 있는 것 같다. 요셉 성인은 성모 마리아 품 안에서 가을 하늘의 태양 빛을 바라보며 선종하지 않으셨을까. 나도 그렇게 성모 마리아의 품 안에서 선종하면서, 낙엽 위에 나의 유언장을 남겨 땅속 생명의 밑거름이 되고 싶다. 단풍이 세상을 곱게 물들이고 낙엽이 되어 다음 생명을 이어가듯, 나도 내 인생의 색을 그렇게 물들이며 낙엽이 되고 싶다. 나의 노년이 추하게 한해 한 해 때 묻은 노욕의 상처, 흔적으로 남기고 싶지는 않다. 내 숙소 혜화동 낙산의 정원에 떨어진 낙엽을 밟으면서, 내 노년기가 딱 낙엽 신세다. 나이 먹으면 않던 일을 한다느니, 죽을 때가 가까이 왔다느니 하는 말을 들어서야, 어떻게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긴긴 동면의 겨울이 싫다. 양로원 노인들이 밥때가 되면 대화도 없이 식탁에 앉아 생각도 없고 기억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 자신만 천국이고 타인에게는 지옥인 그런 긴 동면과 같은 노년기가 싫다.

나무 열매가 농익어 새 생명을 완성하는 때가 바로 노년기이다. 인격의 완덕에 이른 성인성녀처럼, 그런 인생의 수확기, 황금기가 노년이다. 그때는 계절로 말하면 수확의 계절인 가을이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계절, 그때가 내 선종의 계절이고 싶다. 내 인생에서 선종 준비로 거두어들일 것은 거두어들이고, 버릴 것은 다 버려 하느님 나라로 영원히 살기 위한 여행을 준비하는 때가 우리 인간의 노년기이다. 바람따라 낙엽이 흩날리듯, 우리 인생의 목적지를 향해 떠나는 것이다. 나는 인간의 죽음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아주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라 생각한다.

     

외로운 추수꾼

-윌리엄 워즈워스

     

보아라 혼자 넓은 들에서 일하는

저 하일랜드 처녀를,

혼자 낫질하고 혼자 묶고

처량한 노래 혼자 부르는 저 처녀를

[…]

아라비아 사막

어느 그늘에서 쉬고 있는 나그네

나이팅게일 소리 저리도 반가우리,

멀리 헤브리디즈 바다

적막을 깨뜨리는

봄철 뻐꾸기 소리

이리도 마음 설레리

-<외로운 추수꾼> 중에서

     

     

낙엽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가을이 정답던 나무에 왔다

그리고 보릿단 속의 쥐에게도 빛이 변하였다

머리 위에 늘어진 마가목나무 잎들 누레지고

축축한 산딸기 잎도 노란빛이 되었다

 

사랑이 기울 때가 닥쳐왔다

이제 우리의 슬픈 마음은 몹시 지쳤다

헤어지자 지금, 정열이 우리를 저버리기 전에

너의 수그린 이마에 키스와 눈물을 남기고

 

흔히 정신과 마음은 28 청춘인데 몸은 말을 듣지 않고 짐스러워지기만 한 할망구 신세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노년기에도 사랑받고 사랑하는 마음만은 바로 28 청춘이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아름답고 농익은 노년이리라.

     

익어가는 것

어느 시화전에서

     

감이 익어가는 건 햇볕 덕분이며

세월이 익어가는 건 감 덕분이다

그대가 익어가는 건 세월 덕분이며

내가 익어가는 건 그대 덕분이다

사랑을 받으며 사랑한다는 긴 세월

사랑이 익어가는 인생 수확의 가을같은

나이 먹는 나의 노년기는 사랑하는

마음만 마냥 28 청춘이라네

     

     

화살 시편 32 – 세파(世波)

-김형영

     

바람 불어 흔들리는 나무에게

그만 흔들어라 목에 핏대를 세운다고

나무가 꼿꼿이 서 있겠느냐

목청이 나무가 되겠느냐

     

세파에 시달리며 한번 살아보리라

사는 게 어디 뜻대로 되는 줄 아느냐?

     

이 세상 세파에 시달리던 고목나무일지라도 생명만 유지한다면 꽃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어느 늙고 병든 노시인이 대학로를 걷다가 가을 마로니에 나무 앞으로 떨어지는 소리와 그 무게가 마치 자신의 관 뚜껑 덮은 소리와 무게로 느끼며 ‘낙엽’이라는 시를 내게 보내왔다.

     

낙엽

     

바람이 불어

바람이 불어

떨어져도 편히 쉴 수가 없네.

     

그 안에 온 누리 가득한

무덤 하나

     

     

가을은

   

지금은 가을

우리 잠시 이별을 하자.

부모와 잠시

아내와 잠시

형제와 잠시

사랑하는 사람과도 잠시

     

지금 앓고 있는 사람은

자신과 잠시

     

가을은

고독한 사람의 머리 위에

손을 얹는 계절이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단풍잎을 보며 내가 돌아갈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그때가 가을이었으면 하는 소망의 기도를 바친다. 모든 동물은 자기 홀로 죽을 자리를 찾아가서 눕는다. 생명에 이르는 길은 좁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만이 그 길을 걸어간다. 대부분 사람은 넓은 길을 따라 걷기 때문에 생명의 좁은 길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참된 길은 한 사람만이 지나갈 만큼 좁고 여럿이 걸어갈 수 없다. 예수님께서도 구원에 이르는 길은 좁다고 하셨다. 붓다, 공자, 소크라테스와 같은 성현들도 자신만이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하여 좁은 길을 홀로 걸어갔다. 하느님 앞에 나서는 길은 나 홀로 가는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내 인생의 선종을 앞두고 낙엽과 같은 승리의 월계관을 쓰고 나홀로 하느님 앞에서 심판받을 수 있기를 간구한다.

     

그러나 무슨 재주로 사람이 집어먹은 세월을 다시 토해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결코 세월을 토해낼 수는 없으리란 걸, 다만 잊을 수 있을 뿐이란 걸 안다. 내 눈가에 나이테를 하나 남기고 올해는 갈 테고, 올해의 괴로움은 잊혀질 것이다. 나는 내 망년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한 만추국을 갖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박완서, ‘고추와 만추국’ 중).

     

새해 첫날마다 먹게 되는 떡국을 한 살 더 먹는다는 생각에 먹지 않으려 하거나, 아예 한 살 그 자체를 먹어 없애버렸으면 먹어 없애버렸으면 하는 망상이 떠오르기도 한다. 다른 이들은 다 나를 노인이라 하는데, 자신만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은 자유라지만 그건 아니다. 왜 인간 노년의 삶에 사람이 향기롭지 못하고 아름답고 곱게 늙어 인생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가. 결실의 기쁨과 즐거움의 여생은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러 갈 기대와 설렘의 노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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