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사랑은 언젠가는 상대방의 마음에 가서 닿는다는 사실
- didimausi
- 2024년 7월 15일
- 5분 분량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주겠습니다”하신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1서 13장만큼 사랑의 핵심을 잘 정의한 내용도 없다고 본다. 그중에도 7절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라는 구절을 권대웅 시인은 <살아가는 동안 깨달은 한마디>와 연결해서 묵상해본다. 시인은 “사랑은 견디어 내어 극복입니다. 진짜 사랑은 언젠가는 상대방의 마음에 가서 닿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랑이 조용한 것일수록 닿았을 때 마음의 울림은 더 크다는 것도 말입니다”라고 풀어낸다. 바오로 사도도 ‘모든 것을 이겨내고, 덮어주고, 믿으며, 바라는 사랑은 참고 기다린다’라고 했다(7절; 4절). 그런 기다림의 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온전한 깨우침, 만남의 시간을 맞이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2-13절).
사랑의 동행만이 우리를 인생의 목적지까지 닿게 할 것이다. 이수동 시인의 ‘동행’이란 시가 있어 읽어본다.
꽃 같은 그대
나무 같은 나를 믿고 길을 나서자
그대는 꽃이라서
10년 이내 10번은 변하겠지만
나는 나무 같아서 그 10년,
내 속에 둥근 나이테로만 남기고 말겠다.
타는 가슴이야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길가는 동안 내가 지치지 않게
그대의 꽃향기 잃지 않으면 고맙겠다.
다시 바오로 사도의 ‘사랑의 찬가’로 돌아온다.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3절). 사랑의 향기인 정으로 함께 사는 동행으로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11절). 그렇다. 사랑은 성숙과 완성을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참고 기다린다.
어버이날에 이어 스승의 날을 맞아, 사랑이 성숙하고 익어서 완성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어느 분이 나에게 보내온 문자 메시지, 도종환 시인의 ‘스승의 기도’이다. 주님께 비는 우리의 기도같다.
날려 보내기 위해 새들을 키웁니다.
아이들이 저희를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당신께서 저희를 사랑하듯
저희가 아이들을 사랑하듯.
아이들이 저희를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당신께 그러하듯
아이들이 저희를 뜨거운
가슴으로 믿고 따르며
당신께서 저희에게 그러하듯
아이들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며
거짓없이 가르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아이들이 있음으로 해서
저희가 있을 수 있듯
저희가 있음으로 해서
아이들이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게 해 주십시오.
힘차게 나는 날개짓을 가르치고
세상을 올곧게 보는 눈을 갖게 하고
이윽고 그들이 하늘 너머 날아가고 난 뒤
오래도록 비어 있는 풍경을 바라보다
그 풍경을 지우고 다시 채우는 일로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저희를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더더욱 아이들을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성가정의 마리아 어머니같이 이 모든 일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궁구하시며 사랑이 완성되기를 기도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7절). 사도 바오로는 또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절)라고 했다. 우리 인간에게 사랑이 없으면 한낱 동물의 본능뿐이며 목석(木石)과 같을 뿐이다. 우리 인간을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 그 밖의 것은 치워도 될 것이라고 성인(聖人)들은 말한다. 사도 바오로도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머물기 위해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긴다고 하셨다(필리 3,8-9).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지고한 가치이고, 그분의 사랑을 안다는 말이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8-10절).
사랑이라는 것도 부분적인 것은 없어진다. 온전한, 전체적인 사랑 외에 나머지는 쓰레기로 여기고, 모든 것을 잃어도 예수님을 아는 지고의 가치, 온전한 전체의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결국 나의 실존의 정체성과 본성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려고 말을 타고 가던 다마스커스 길에서 떨어질 때,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섰다. 하느님 사랑의 성령을 받아, 눈을 뜨게 된 바오로 사도는 지속적으로 주님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바오로께서는 그 당시 온 세상이라 할 지중해 일대에서 선교를 할 수 있었던 동력의 원천은 바로 자신이 받은 하느님 사랑의 성령이 역사하신 결과이다. 전능하신 하느님 사랑의 성령이 우리 인간 안에 오셨다. 그렇게 우리는 성령을 받았고 그 사랑의 전능만이 이 세상과 우리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갈라 5,22-25).
원수를 사랑하라는 요구는 다른 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예수의 독특한 점이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의도적 요청이야말로 예수 자신에게 속하는 것으로 어떤 한계도 인정하지 않는 예수의 이웃 사랑을 특징 지운다.” 예수는 원수 사랑에 대한 동기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완전하신 하느님을 닮자는 데에서 찾고 있다. 마태 5,45에 따르면 하느님은 선인이나 악인에게나 해를 비추고 비를 내리며 적과 친구를 구분하지 않고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도 사랑을 베푸는 아버지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원수에 대한 사랑이 인간에게 요구된 원수 사랑의 근거를 이룬다.”
이렇게 예수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에 근거해서 내세운 인간 사랑은 모든 경계를 넘어서 개방되어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랑의 철저성(Radikalität)은 용서, 봉사, 포기를 포함하는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첫째,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즉 끝없이 용서하고(마태 18,22; 참조; 루카 17,4), 심판하지 말라(마태 7,1)는 예수의 요구는 “한계 없는 용서의 자세”를 나타낸다. 둘째, 예수는 거듭해서 (제자들의 다툼에서, 최후만찬에서, 발을 씻길 때에도) “서열없는 봉사”를 요구한다. 셋째, 예수는 “대가 없는 포기”를 주장하였는데, 구체적으로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이 권리를 포기하고(마태 5,4), 자신을 희생하며 권력을 포기하며(마태 5,40), 맞대응의 폭력을 포기하는 것(마태 5,39)으로 나타난다.
예수는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그 준비로 회개를 요구하는데, 회개는 내용적으로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을 목표로 하는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경건한 이들에게 신성시되어 왔던 율법과 성전이라도 척도를 상대화하는 것이고, 무시당하고 소외된 이들까지도 포함한 모든 인간을 위한 헌신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은 한마디로 온갖 경계, 즉 가깝고 먼 사람의 경계, 같은 민족과 타민족의 경계, 도덕적인 사람과 비도덕적인 사람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랑이다. 예수는 이런 무한한 사랑을 선포하고 요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실천에 옮긴다. 이는 예수가 당시 사회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소외되었던 이들, 특히 죄인들에게 향하는 것에서 분명해진다(손희송, 그리스도 신학의 근본규범인 예수 그리스도-한스 큉 신학에 나타난 그리스도 중심주의, 74-75쪽).
하느님의 사랑인 성령은 햇빛처럼 악인들이나 선한 이들 누구에게나 똑같이 빛을 비추고, 그들 마음을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무한히 용서하는 사랑이다. 예수님께서는 최후만찬 식탁에서 우리 인간 생명을 지탱시켜 나갈 수 있는 빵으로서 당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다. 성체성사의 사랑이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이보다 더 진실인 것은 없다.
성체성사는 이제 함께 밥을 나누는 식구(食口), 즉 같은 입으로 밥, 생명을 나누는 가족애, 형제애의 공동체를 넘어, 온 인류를 향한 사랑을 지향한다. 이것은 앞서 말한 참된 인간화, 참된 신화의 삶과 맥을 같이한다. 바리용 신부는 “그리스도의 몸을 먹을 때, 우리는 전 인류를 우리 몸에 받아들인다”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받아 모신 “축성된 빵 조각이, 그리스도에 의해 신화(神化)된 전 인류라는 거대한 빵의 일부임을 알고 나면”, 성체성사는 놀라운 사건, 풍요로운 축제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바리용 신부의 말처럼, “축성된 빵조각은 인간이 하느님에게 드리는 선물(즉 봉헌)이며, 동시에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즉 성사)이다.” 그래서 성체성사를 성사 중의 성사라 말할 수 있다.
바리용 신부가 풀어준 참된 인간화, 참된 신화의 결정체로서 성체 이해를 옮겨본다. “성체는, 인간으로서는 온전히 하느님 쪽으로 당겨지신, 희생된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이 두 도약의 압축, 감히 말하자면, 이 두 도약의 결정체이시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예수님께서 그토록 타올랐으면 하고, 간절히 애타게 원하셨던 그 불은 예수 성심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씨로 남겨두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주신 성체성사이고, 이 성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영원한 사랑의 징표인 사랑의 묘약이다.
어느 목사가 우스갯소리로 불로장생의 묘약으로 ‘신약과 구약’이 있다며 설교를 했다고 한다. 약을 판 셈이다. 비록 우스갯소리지만 의미는 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과 신약의 역사를 관통하는 하느님 사랑의 계약을 완성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자신을 영원한 사랑, 영원한 생명의 표징으로 성체성사를 세우셨다. 성체성사는 그야말로 구약과 신약을 아우르는 사랑의 묘약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기란, 이렇게 성체성사적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이 구약과 신약을 포함한 하느님 구세사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길이고,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실현하는 길이다. 우리 교우들이 성체 중심의 신심 생활에서 깊이 유념해야 할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즉 성체 신심의 방향이 감실 안에 성체로서 계신 주님을 흠숭하고 조배하여 주님과 일치하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주님이 주신 사랑의 묘약은 나만을 위한 마취약일 뿐이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님의 몸으로 내어주신 위대한 사랑의 묘약은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살과 피의 성체성사, 거룩한 사랑의 성사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서로 사랑해야 한다. 성체성사적 삶은 자기희생, 봉헌의 삶 그리고 연대와 환대의 삶이다. 그것은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셨던 그리스도의 삶이다. 성체성사의 신심은 바로 그러한 사랑의 실천에 기초한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빌려 말하면 이렇다. “성체성사의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성체성사의 사랑으로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울리는 징과 같은 소리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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