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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한 목자상 - 원로사목자 안충석 신부와의 ‘만남’ III

최종 수정일: 2024년 7월 10일



바람직한 본당신부상을 찾아서 –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 목자상!


: 이제 조금씩 신부님께서 생각하시는 바람직한 목자상에 근접하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성체성사 사랑의 나눔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 의 완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그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그렇게 강생육화 영성을 지니고 본당사목에 임해야한다는 말씀 같습니다.

: 그렇지요. 본당사목의 핵심은 강생육화의 영성, 성체성사 사랑의 실천을 통해 시대의 징표에 응답하는 성가정생활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데 있습 니다. 한마디로 본당은 하느님과 이웃 사랑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요. 그런데 요즘 왜 교우들이 신앙생활에서 멀어지고 있을까요. 본당에서 하느님 나라 살아가는 맛을 못 느끼는 거죠. 이 세상 살아나가는데, 신앙생활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성당을 멀리하고 거리를 두는 거죠. 한 마디로 성당에서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이제 보세요. 가장 이상적인 본당공동체가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나갔던 성가정 생활공동체라면, 가장 이상적인 목자상은 아버지 성 요셉 목자상이고 마리아 사제직이 아닐까요.

: 요셉 목자상, 마리아 사제직! 뜻밖의 바람직한 목자상, 사제상입니다. 흥미롭습니다.

: 우선 성가정을 든든히 지켰던 아버지 성 요셉, 그 요셉 목자가 본당공동 체를 지키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신자들도 뿌듯하지 않겠어요.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우리 본당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성가정의 사목자인 성 요셉처럼, 본당신부로서 그 사제직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본당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오셔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남을 제 몸같이 사랑하신 예수님을 본받는 공동체입니다. 그렇게 지역 사회 에서 뿌리내린 본당공동체는 하느님 백성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되어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되죠. 그런데, 오늘날 본당공동체는 날로 쉬는 교우, 냉담 교우가 늘어나고 있어요. 왜 그 럴까요? 신앙생활에 흥미를 잃은 것은 아닐까요? 본당 신앙생활에서 성체 성사 사랑 같은 인간의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 사랑도 인간사랑도 이 세상살이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랑도 식고 마음도 식어 냉담 교우가 되는 것이지요.


작은 이들을 위협하는 엘리트 신앙의식


: 요즘 한국천주교회는 신자 수가 주는 것은 물론, 10명에 1명만 주일미 사에 참석한다고 합니다. 주일날 성당에 나가는 사람이 참 많이 줄었습니 다. 가톨릭교회의 총체적인 성찰이 필요한 때가 되었습니다. 아니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다시 던지게 됩니다.

: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으로 들어오시면 우리는 일상 삶을 훌륭하게 만드는 그 어떤 것도 잃지 않습니다”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 지 않은 듯 살아갑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는 것 을 짐스럽게 느끼며 받아들이기를 망설이기도 합니다. 나름 경건하며 율법 을 지키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열 심한 것처럼 보였으나, 기실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없었어요. 그런데, 바리사이의 비극은 역설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려는 데에서 시작했어요. 그들은 하느님에게 의존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열심히’가 아니라, 어떤 부담을 갖고 억지고생을 하면서 공을 쌓으려는 방식으로 하느님 뜻을 이행 하려 했어요.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인생길을 끌고 가면 결국 끝이 막혀 버리고 도저히 출구가 나타나지 않아요. 그러다 막다른 길에 도달하면 출구는 두 개밖에 없어요. 첫 번째는 그 많은 율법 전체를 지키지도 않으면서 마치 다 지키는 것 같은 위선적인 신앙생활에 빠지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그 많은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으니 몇몇 율법으로 축소해서 극히 적은 부분만 지키고 마치 전체를 다 지킨 것 같은 자족적인 신앙생활에 빠지는 것인데, 이 역시도 위선적이라 할 수 있어요. 결국, 강한 힘과 의지를 가진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아주 소심한 종교관에 빠져 버리고 말지요. 모든 규칙을 철저히 다 지켜나가려 하다 보니 항상 근심과 걱정을 하게 됨으로써, 매사에 소극적이고 보수적인 종교관을 지니게 됩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완전히 위선자 의 탈을 쓰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기 싫으므로. 외면적인 여러 의례 행위로 자기방어막을 치면서 위선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자신의 노력으로만 인간구원의 기초를 세우면, 이러한 식으로밖에 되지 않아요. 그 어느 쪽에도 구원은 없어요. 그러한 종교에는 어떤 희망도 없고, 기쁨도 없어요.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지요.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결국 하느님도 잃어버리고 이웃도 잃어버립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행위는 자신만을 위한 행동이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를 위한, 하느님 나라로 가는 사 람들의 행위는 남을, 즉 이웃을 위한 행동이다. 여기에 큰 차이가 있어요. 예수님께서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책망한 이유는 그들이 구원받지 못해 서가 아닙니다. 그들로 인해서 가장 작은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마저도 하 늘나라의 문 앞에서 제외될 수 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는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바리사이파 같은 사람들이 적 지 않아요. 소위 엘리트 신앙의식으로 무장한 그들은 신앙의 경건함이나 우 월함을 뽐내며 하느님 신앙이 흔들리는 작은 사람들을 질타합니다. 그들의 위선 또는 강력한 신앙에 지레 겁을 먹은 작은 신앙인들은 결국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접고 마음의 문을 닫아걸며, 점점 현실 세계에만 집착합니다.

: 점점 더 신부님의 사제상이 명확해집니다. 하느님 사랑, 타인에 대한 배 려가 결코 이론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랜 사제생활의 연륜이 묻어나는 사목적 또는 신학적 성찰의 결과인가 봅니다. 다시금 성가정의 요셉 목자 상, 마리아 사제상을 그려봅니다.

: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들고 무거운 십자가는 아마도 한 가정의 가 장, 아버지라는 소임일 것입니다. 그만큼 가족을 부양하며 사랑으로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하기 때문일 겁이다. 앞서 보았듯이 본당공동체의 가장인 주 임신부는 성 요셉의 부성애를 모델로 삼아, 인간 사랑과 아버지 소임을 다 하는 사제직으로 이해합니다. 성 요셉 아버지의 거룩한 고독, 성모 마리아 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사제독신제(cælibatus)도 묵상해보곤 한다. 성가정을 꾸리는 마리아와 소년 예수님, 그리고 가장으로서 성 요셉. 이 성가정공동체의 관계가 인간 사랑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하지요. 고 최민순 신부님 시집에 ‘침묵의 성자’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복되다 성 요셉은

진주를 간직한 깊은 해심

값진 향유를 고이 담은 옥합이어라.


멋지지 않아요. 성 요셉 아버지 목자상은 그리스도의 피를 담은 성작으로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을 담아 우리에게 전해 주십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 사제상, 목자상도 있어요.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시다’는 천사의 수태고지에 두 손 모으시던 성모님의 합장에서 겸손한 목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60년 가까지 사제로 살면서, 요셉과 마리아를 우리가 지향해야 할 참된 목자 상으로 묵상합니다. 이 두 분을 통해 성가정이 이루어졌고, 그 가정 안에서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완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제직도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부들이 착하신 목자 성 요셉과 겸손한 목자 성모 마리 아의 사제직을 본당신부의 표본으로 삼으면 좋겠어요. 선한 목자는 선한 가 정에서 나옵니다. 때에 따라 가족에게 (물적/영적) 양식을 마련해주시는 성 요 셉과 성모 마리아를 본당신부가 염두에 두어야 할 바람직한 목자상으로 묵 상합니다. 에크하르트의 말입니다. 성모님의 꽃인 가시장미, 매괴꽃이 바로 사제성소의 꽃입니다. 이제 막 꽃봉오리를 터뜨리고 달콤한 향기를 온 세상 에 퍼트립니다. 우리는 사제직 완성의 꽃을 만개하면서 멜키세덱에 따라 영 원한 사제직 완성으로 나아가는 사제일 뿐입니다.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 노 사제의 마지막 ‘사랑의 외침’


: 성 요셉과 마리아의 사제상, 사목자상. 평소 신부님께서 성가정생활공 동체를 강조하시던 이유가 바로 이러한 목자상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이제 오늘 만남을 마무리하는 말씀을 주시지요.

: 프랑스 작가 베르나노스의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에 나오는 본당신 부는 임종 시에서 환속한 동창 신부에게 마지막 병자성사를 받으면서 ‘모든 것이 다 은총이었다’라는 마지막 고백을 남기고 운명합니다. 사제로서 그야 말로 선종(善終)이지요. 나도 어떻게 하면 ‘모든 것이 은총’이라는 말을 남기 며 선종할 수 있을까 묵상합니다. 나는 어떤 은총의 삶을 살았고, 자유로운 성령의 협력자로서 어떻게 살아왔을까, 묵상합니다. 이것만은 말할 수 있 을 거 같아요. 나는 최소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라고. 이 세상에서 하느 님 나라를 살아가기 위해, 교우들을 만나고 그들 안에서 그들과 함께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려고 부지런히 노력했다고 자부해요. 교우들에게 신앙생활 의 정체성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무엇이든 했어요. 그 결과물이 앞에서 말한 본당신부로서의 나의 삶이고 역사입니다. 부족하겠지만, 나에게도 역시 은총의 시간이었어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성령의 역사로 이루신 나의 본당사목을 현실 결과로 받아들여 주시리라 믿으며, 차고 넘치 는 그분의 은총을 느낍니다. 이렇게 마무리하지만, 나의 끝나지 않은 본당 사목활동, 사랑의 이야기가 다른 후배 사제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나의 사랑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죽는 날까지 계속 이어질 것입니 다. 아르스의 성인 요한 비안네 신부님같이 항상 성령을 갈구하며 기도하는 사목자가 되어 기도를 올리고,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간구같이 ‘영원한 사목자이신 주님! 당신을 알기 위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기 위하여 당신을 알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너무도 소 중한 본당신부 삶을 경험하게 해준 교우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50년의 사목 활동을 마감하는 은퇴 감사미사 후 고 김형영 시인이 ‘사랑의 외침’이란 헌시로 나의 사목생활 마감을 알렸어요. 이 시로 오늘의 만남을 마무리합니다. 고맙습니다.

: 신부님, 오랜 시간, 들려주신 이야기 정말 잘들었습니다. 앞으로 건강하고 평안하시길 빕니다. 고맙습니다.


사랑의 외침

-안충석 신부님 은퇴하는 날


오로지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진리를 따라 사시다가

불의한 세력의 반대받는 표징(루카 2,34)이 되어

감옥에 갇히고 온몸이 부서질 때에도

십자가는 사랑을 더하는 것이라고

오히려 용서하시던 루카 신부님.

애벌레로 머무는 저희를

부활한 나비 되라고 채찍질하던

그 열정적인 강론,

어떤 이는 당황하고

어떤 이는 두려워하고

어떤 이는 외면했어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처럼

사랑을 증거한 고난의 오십여 년.


저희가 당신 말씀에 마음의 눈을 뜨고

귀와 입이 열린 것은

거침없는 당신의 외침이

하늘에서 나온 사랑의 외침이었기에

오늘 저희는 못내 아쉬워합니다.

저희들 신앙의 길잡이이신

안충석 루카 신부님!

이제 당신 사랑의 외침은

사람들 마음속에 퍼져

천 배 만 배로 열매 맺으리니

기쁨 속에 그 사랑의 열매를 보시며

산처럼 건강하소서.


사족

(안 신부는 인터뷰 뒤에 아쉬운 듯 이런 당부를 남겼다. 선배 사제로서의 간절한 청원처럼 들렸다.) 교구 참사위원들과 교구장님께서는 인사행정을 소중하게 여기시어, 일선 본당 주임신부들이 효과적으로 배치를 받아 사목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 와주셨으면 합니다. 교구 인사행정이 잘 마무리되어야 본당사목도 효과적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교구장의 인사행정은 사목적으로,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최우선의 선택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제직의 완성은 사랑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후배 신부님들 성체성사 사랑 실천을 통해 하느님이 이루시려는 것은 위해 열심히 달려가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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