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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 멤버 안충석(루카) 신부와의 ‘만남’ II

최종 수정일: 2024년 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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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구현사제단은 지렁이가 꿈틀대듯 시작되었다

     

: 그렇죠. 그것이 사제단 태동의 정신적, 영적 배경이 되겠지요. 바티칸공의회가 문헌으로 남겨 놓은 것을 한국주교단이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면, 사제단은 그 문서를 꺼내 실천에 옮겼습니다. 당시 우리는 한신대 출신 학자들의 민중신학와 민중교회, 남미의 해방신학, 그리고 파올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등과 같은 서적을 통해 개인적으로 의식을 깨우치기도 했지요. 그러한 학습을 통해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하느님 창조하신 인간의 원형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았어요. 그래서 유신체제에서 파괴되는 인간성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었어요.

: 신부님께서는 소위 의식화 작업을 많이 하셨네요(웃음). 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니 사제단 탄생의 역사적, 시대적 그리고 사목적, 신학적 바탕이 충분해 보입니다. 그러면 이제 사제단 탄생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들어볼까요.

: 또렷이 기억합니다. 1974년 7월 6일이었어요. 동대문성당 성모자헌회 회원들과 남이섬 야유회를 다녀왔던 날입니다. 성당에 사무장이 없어서 김종인 신학생(1976년 원주교구 사제로 서품받음, 현재 원로사목자)에게 내가 없는 성당을 지키고 있으라고 했어요. 성당에 도착해보니 그 신학생이 지학순 주교님이 공항에서 납치되었다고 전해주었어요. 어떤 경로로 그 신학생이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명천지에 어떻게 주교가 공항에서 납치될 수 있는가, 너무나 놀랐어요. 동대문성당에서 삼일고가를 타고 달리면 명동성당 주교관까지 10분도 채 안 걸려요. 혼자 택시를 타고 급히 명동으로 향했어요. 주교단 계단에서 오태순 신부를 만났어요. 나 혼자 추기경님을 만나는 것보다, 함께 만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오 신부와 함께 집무실로 들어갔어요. “제가 방금 본당에 있는 신학생한테 들은 얘긴데, 대낮에 김포공항에서 지 주교님이 어디론가 증발했다던데, 도대체 대명천지에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라고 했더니, 김 추기경님이 자초지종을 다 말씀해 주셨어요. 내용은 이런 거였죠. 원주에서 김지하가 가톨릭대학생 활동을 하는데, 지 주교님께서 당시 돈으로 70만 원가량을 활동비로 지원해주셨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민청학련 자금을 대준 것으로 되어 조사받기 위해 어디론가 끌려가셨는데, 중앙정보부로 납치되신 것 같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추기경님 말씀을 다 듣고 나는 “주교님을 꼼무니스트로 모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 우리가 공산주의 국가도 아니고, 지구상에 이런 나라는 없다” 그러면서,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말이 있는데, 이제 저희 젊은 신부들이 좀 꿈틀거려 볼까요?”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그때 내 나이 37살이었고 저희 동기들 모두 의기충천하던 시절이었어요. 김 추기경님은 잠시 침묵하시더니, “그러면 그렇게 한 번 해보라”라고 하셨어요. 그 말씀을 듣고 즉시 오태순 신부와 함께 응암동성당 주임신부로 있던 함세웅 신부를 찾아갔어요. 함 신부는 유학을 다녀와 박사학위도 있고, 소신학교 출신이라 동창들과 연계도 잘하니까, 앞의 내용을 다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함 신부는 자기는 귀국한 지 얼마 안 돼서 사정을 잘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한국에 쭉 있었고, 국내 사정을 잘 아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라고 했지요. 함 신부는 “그러면 그럴까” 하면서 그 자리에서 전국에 있는 동창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어요. 우리 동창들은 가톨릭대학에서 8년을 같이 기숙 생활을 해서 그 어느 형제보다 끈끈했고, 전화 한 통으로 다 연결되었어요. 그 당시 우리 반은 교구에서도 주요 직책을 맡고 있었고, 서울과는 달리 지방교구 동창들은 이미 중견사제 위치가 되었지요. 지 주교님 납치에 관한 내막을 들은 동창 신부들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명동성당에 모여 지 주교님 석방과 이 나라, 이 사회를 위해 기도를 바치자’라며 모이게 되었어요. 이것이 사제단의 기원, 출범의 첫 모임이라 생각합니다. 그 첫 모임에 우리 동창 30명에 다른 선후배 합해서 약 70명 정도가 모여서 기도회를 열었어요. 그야말로 사제단의 첫 번째 기도 모임입니다. 동대문성당에서 종이로 촛불모양을 만들고 거기에 ‘인간화, 복음화를 위한 시국기도회’라고 써서 왼쪽 가슴에 붙였더니, 김대중 씨 등이 나중에 그렇게 따라서 붙이고 미사에 참여하는 거예요. 사실 전 신자가 그렇게 했지요. 이게 ‘촛불집회’의 원형이라 생각해요. 그렇게 첫 기도회를 했고, 두 번째 기도회에는 전국에서 약 700~800명의 신부가 모였어요. 당시 전국 사제의 2/3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 창립 50주년을 맞이하는 사제단을 추동하신 분을 만나고 있네요. 긴급전화를 돌렸는데도 많은 사제가 모였습니다. 지 주교님의 납치로 시작한 사제단의 출발은 전국의 많은 성직자와 신자들의 호응 속에 시작했습니다. 사제단의 기도회는 집회결사의 자유가 억눌렸던 당시 한국사회가 가장 목말라 하는, 다시 말해 민중을 억압하는 박정희 유신독재에 대한 저항의 횃불이 필요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 횃불을 사제단이 들었던 것이고요. 신부님께서 동대문성당에서 들으셨던 소식을 예사롭지 않게 판단하지 않으시고 즉각 실행에 옮기셨던 결과가 결국 사제단 50년의 출발점이 되는군요.

: 사실 사제단 창립에 관한 여러 말이 있는데, 내가 말하는 내용이 팩트입니다. 나와 함세웅 신부가 시작했지요. 아무튼, 지 주교님이 연행되고 두 번째 기도회가 있던 날로 기억하는데, 명동성당에서 전국에서 모인 사제, 수도자 등 천주교인들의 기도회가 계속되자 부담을 느낀 박정희는 미사가 끝나고 밤 9시경에 지 주교님을 석방했어요. 우리는 성모동굴 앞에서 철야기도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지 주교님은 수염을 깍지 못한 채 김수환 추기경님과 함께 나타나셨는데, 꼭 부활한 예수님 같은 모습이었어요. 전국에서 모인 사제들 모두 손뼉 치면서 환호했지요. 그날의 사건은 사제단의 원초적 유대이고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어요. 우리는 지 주교님 석방으로 그칠 일이 아니다. 지 주교님뿐만 아니라 모든 양심수 석방을 위해 기도하자며 이제 각 교구를 다니며 기도회를 열자고 했어요.

: 올해 ‘친일매국 검찰독재 윤석열퇴진 주권회복’을 기치로 내건 사제단의 월요시국기도회가 그렇게 시작된 셈이군요.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보면 한국천주교회 전체가 민주화운동에 가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어요. 오늘날도 주교님 정도가 납치되고 구속되어야 천주교가 움직일까요. 최근 시국미사 참석 사제들도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안타깝고요. 아까 신부님 말씀처럼 요즘에는 왜 지렁이가 꿈틀거리지 않을까요.

: 무슨 소리인지. 지금은 지렁이가 꿈틀거리지 않는 게 아니라, 아예 지렁이가 없어요. 무엇 때문인지 사제의 열정, 정의와 연대감이 상실된 듯해요. 주교님들 눈치를 보는 건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한국주교단은 당시 자신들의 동료 주교가 구속되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움직인 것이 아닌가 해요. 주교단은 지 주교님이 석방되고 나서 박상래, 최창무, 함세웅 신부 등 몇 명을 불러다 위로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교단은 주교님 석방되고 난 뒤 주교님과 관련 있었던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 등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그 유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주셨으면 좋았으련만, 노코멘트였어요. 주교단은 사회문제에 크게 관심이 없었고, 단지 김수환 추기경님, 김재덕 주교님 같은 분들이 개인적으로 사회문제 가까이 서 계셨어요.

: 주교단과 사제단의 관계는 어떻게 규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가 가진 위계질서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아무튼 유신독재 시절 위로의 메시지가 되었던 김수환 추기경님과 주교님들의 목소리를 기억합니다. 그런데 사제단이 그렇게 한 여름밤의 기도회만으로 그쳤던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조직화하였기에 오늘의 사제단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 풀려나서 성모병원에 계시던 지 주교님은 외신기자들 앞에서 성명서를 배포하고(7월 15일), ‘양심선언문’을 발표합니다. 주교님은 선언문을 발표하자마자 추기경님과 신부들이 보는 앞에서 정보부원들에게 끌려가지요. 그 광경을 보고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어요. 다시 전국적인 기도회가 열리게 됩니다. 주교단도 성명서를 내면서 가세하게 되었죠. 지 주교님과 함께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전국 순회미사가 계속 열렸고요. 주교좌성당이 있는 전주, 광주, 대전 등에서 열리고 명동에서 열리고, 엄청난 움직임이었어요. 그때 정보요원들은 우리고 ‘베트콩보다 기민하고 조직이 대단하다’라고 했어요. 아무튼, 그때마다 성명서를 내면서 ‘기도하는 전국사제단’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누가 ‘너희만 기도하는 사제냐. 우리도 기도한다’라고 딴지를 걸어서, 우리 명칭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원주교구에서 온 골롬반의 어느 외국 신부님이 하느님의 속성은 정의라고 귀띔을 주기도 했고, 저를 비롯해 많은 사제가 동의해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라는 명칭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전두환이 전국 파출소마다 정의구현이라는 말을 붙여 놓아 아이러니였지요. 전국기도회를 하면서 힘을 얻은 우리는 단체 결성에 동의하는 사제들의 서명을 받아 9월 23일 원주교구 원동성당에서 전국의 사제들이 모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이름으로 첫 기도회를 열었어요. 그리고 9월 26일 명동성당에서 사제단의 공식발족을 알리는 ‘순교자 찬미기도회’를 열고 ‘제1시국선언문’을 발표했어요. 사제단이 공식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날이지요.

: 정의구현이라는 말은 전두환 같은 독재자의 언어는 아니지요. 사제단 출범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사제단에 딴지를 거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고요. 사제단이 교회 대내외적으로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던 것은 사실입니다.

: 사실 초창기 대표가 누구였나 가물가물할 정도로 사제단은 허술한 조직이었어요. 정관도 없고 회원명부도 없고, 정말 유신정권 쪽에서 ‘베트콩’ 같은 사람들이라 여겼을 겁니다. 하지만 사제단은 유신정권에 대항했던 강력한 세력이었고, 박정희도 사제들의 움직임에 민감했던 것이 아닌가 싶고요. 한국천주교회는 삼일운동이나 해방공간에 자리가 없었어요. 부끄러운 현실도피 역사지요. 그런데 유신독재에 가톨릭교회가 민주화를 위해 어떤 역할을 했다는 것, 특히 사제단이 그 선두에 섰다는 것에 엄청난 자부심과 긍지가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안인은 정치인?

     

: 신부님이 사제단 활동에 하신 것에 대한 자긍심이 크십니다. 아마도 앞에서 말씀하신 사제의 초심과 연결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강생, 육화의 영성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의 실천 현장이 신부님의 사제단 활동의 자리였던 것 같습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강력히 저항할 수 있던 사제단의 동력도 그런 것들이 아닐까요.

: 칼 폴라니라는 경제학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자본주의를 두고 ‘악마의 맷돌’이라는 말을 합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철저히 개인으로 고립시킨다는 의미에서지요.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라는 시스템은 인간이 지닌 사회적 동물로서 공동체적 측면을 여지없이 파괴하고 마치 악마의 맷돌처럼 갈아서 쪼아버리고 파괴한다는 말이지요. 그 악마의 맷돌을 유신체제에 많이 느꼈어요. 어떤 공동체든 박살 내는 것이 유신독재였어요. 요즘 같은 시민단체는 언감생심이고 유일하게 젊은 대학생들 공동체만이 있었는데, 그마저도 유신에 조금만 반대해도 가두고 재판해서 다 망가뜨리고 파괴해버립니다. 그러한 공동체 파괴는 인간성 파괴라 느꼈고, 그런 것을 보고 가만히 있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 그런데 지금 말씀하신 ‘악마의 맷돌’은 결국 한 권력자가 공동체를 파괴하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운다는 말씀인데, 그 상황이 지금의 윤석열 정권이 보여주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제단 활동하는 신부님들에 대해 ‘정치적’이라는 딱지를 붙여 운신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부가 돼서 미사나 할 것이지, 왜 정치를 하냐, 정교분리 어쩌고 하면서 말이지요. 이에 대한 신부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 그렇지요. 크게 다르지 않지요. 사제단 탄생과 관련해서 생각한다면,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인혁당 사건을 만들어 8명의 사형수가 재판을 받자마자 다음날 바로 사형이 집행되었어요(1975년 4월 8일). 나중에 다 조작사건으로 드러났고,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으로 꼽히기도 했지요. 자기의 권력을 위해 사람을 악마의 맷돌로 갈아서 참혹하게 죽이는 것을 보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때 장의차에 매달렸던 문정현 신부는 경찰과 실랑이 끝에 떨어져 다리를 다쳐서 지금도 절뚝거리잖아요. 그런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다면, 그것은 사제도 인간도 아닙니다. 옆에서 벌어지는 이런 모습을 보고 어떻게 사제가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요. 인권이 무너지고, 인간성이 파괴되는 이 상황을 사제로서 그대로 볼 수 없었어요. 이러한 상황을 성서의 정신과 신앙으로 풀어야 했어요. 예수님의 사랑은 너무나도 커서 우리 사회 모든 곳에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이웃의 생명의 지켜주라고 당신의 몸과 피를 성체성사의 음식으로 내어주셨잖아요. 이것은 그 사회에서 가장 고통받는 이들에게 생명이 되어주라는 요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정치, 경제, 문화 그 어디 안 미치는 곳이 없어요. 애덕을 닦는 일, 그것은 그래서 정치적일 수밖에 없고 공동체에 대한 사랑은 다 정치적이에요. 그러한 사랑의 실천이 없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사제단의 활동은 철저히 예수님 복음에 따른 행동이었어요. 우리는 히틀러 암살단에 가입해 처형된 본회퍼 목사의 미친 운전사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내리막길을 달리며 사람을 죽이는 그 미친 운전사를 당장 끌어내리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그 운전사를 끌어내려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사제단은 그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려고 노력합니다.

: 바로 말씀하신 그 내용이 사제단이 왜 정치에 참여하는가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꿋꿋이 활동하신 동력이 되신 것 같습니다.

: 물론이죠. 성서를 보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있잖아요. 강도 맞아 반죽음이 다 된 사람을 보고 사제가 ‘나는 제사를 지내러 간다’라면서 외면해 버리잖아요. 자신은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이니 현실참여를 하지 않겠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강도보다 더한 박정희와 전두환에게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준 이들이 사제단이라는 거죠. 말이 나온 김에 정치와 신앙에 대해 한 번 정리해보죠. 인간의 구원은 전인적 구원이라 생각해요. 영혼과 육신을 분리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에 해당하는 정치적 현실참여와 우리의 영혼에 해당하는 신앙생활은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와 종교는 직무상(ex officio) 분리된 것이고, 사제는 인간의 영혼과 육신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의 일, 곧 인간의 삶에 현실적 참여를 하는 것입니다. 자꾸 정교분리, 정교분리하면서 사제단이 정치에 참여한다고 하는데, 그건 우리 그리스도교를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 모든 것을 구원하시기 위해 강생육화 하신 것입니다.

     

신부를 가두고 매질한 정권에 맞서서

     

: 신부님, 그런 영성적 배경으로 사제단 활동을 하셨어도, 현실적으로는 고초도 많이 겪으셨으리라 짐작합니다.

: 사제단은 박정희에게 눈엣가시였어요. 1975년 들어서 탄압도 노골적이었죠. 집회를 원천봉쇄하고 성직자를 순화시키라는 긴급지시도 내렸다고 해요. 정보과 형사가 동대문성당 앞에 집을 하나 얻어 놓고 매일 같이 나를 감시했어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나를 하도 따라다니길래 “너도 택시비 들고 나도 택시비 드니까 같이 타고 다니자” 하면서, “이다음에 천국에 가면 하느님이 너는 어떻게 해서 천국에 왔느냐 하면 정보과 형사가 나를 지켜줘서 내가 나쁜 짓 못 하게 해서 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라고 했어요. 정의구현과 인권회복은 인간의 기본권을 찾기 위한 행동은 사제단이 생각한 교회 본연의 일이자 실천적 신앙행위였어요. 사제단이 계속 성명서를 내고 김수환 추기경님이 성탄미사 강론 등을 통해 정부의 탄압을 비난했어요. 결국 1975년 2월 17일에 지 주교님과 양심수들이 석방되었죠. 그런데 그해 4월 9일 인혁당 8명의 비극적 죽음이 발생했습니다.

: 지 주교님이 석방되자, 교회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나 보네요. ‘사법살인’이라 불리는 인혁당 사형수들을 돌보지 못했군요. 그분들의 죽음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혁당 사건 유족을 돕다 추방까지 되셨던 시노트 신부님은 평생 그 여덟 분의 죽음을 생각하셨고, 말년에 그리시던 꽃들은 꼭 여덟 송이였어요. 불의한 죽음, 억울한 죽음을 맞은 이들의 유가족을 우리 교회가 따뜻이 맞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월호도 그렇고 최근 이태원 참사도 그렇고 말이지요.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원 자체가 억울한 죽임을 당한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 아닌가요. 사제단이 출범하면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거의 매년 일어납니다. 75년 인혁당사건, 76년 3·1민주구국선언사건 등 말이지요. 신부님도 3·1사건에 연루되셨죠.

: 나는 영문도 모르고 함 신부가 ‘너 삼일절에 미사 주관해라’라고 해서 저녁 6시 명동성당 미사를 하게 되었죠. 중앙정보부는 이 사건을 내란음모사건으로 몰았어요. 목사님과 신부님 그리고 재야인사들을 구속했어요. 함세웅, 문정현, 신현봉 신부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기소되고, 나는 미사를 주동했다는 죄로 기소되었어요. 동대문성당으로 들어가는 청계천 7가 근처에서 남자 둘이서 “안충석 신부죠?”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끌고 간 곳이 남산 중앙정보부 6국이었어요. 남산 중앙정보부 6국은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 관련자 고문으로 악명이 높았죠. 고문과 구타는 없었지만, 언어폭력은 견디기 힘들었고, 6일 동안 잠을 안 재우는데 7일째는 정신을 잃었어요. 잠을 안 재우면서 계속 심문하고 내가 살아온 자서전을 쓰라고 했어요. 수사관들은 내가 사상이 불온해서 사제단 활동하는 것이라면서, 큰아버지가 부역했던 것을 들면서 나보고 빨갱이라고까지 했어요. 하도 추궁을 하고 조사를 해봐야 미사를 한 죄밖에 없으니까, “미사 때 왜 설움이 북받쳐서”라는 노래를 부르냐는 거예요. 성가 가사라고 하니까, “우리가 핍박해서 설움이 북받치더냐” 그런 소리를 하기도 했어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의 난센스입니다.

: 그 사건으로 신부님 말고도 많은 분들이 끌려가셨지요.

: 함세웅, 문정현, 신현봉, 나, 김택암, 장덕필, 김승훈 신부 등이 끌려가고 구속되고 그랬지요. 그런데 그 삼일사건 이후 매년 3월 1일이 되면 명동성당에서 계속 구국선언을 이어갔어요. 명동성당은 그야말로 민주화의 성지였지요. 지금 명동성당을 보면 만감이 교차합니다.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영화필름처럼 스쳐 갑니다. 명동성당은 한국 민주화에 있어 상징적인 공간인데, 어느 순간부터 너무나 낯선 곳이 되어버렸어요. 지난날의 명동성당을 기억하는 신부님 중에 명동 근처에는 가지도 않겠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고통받고 사회적 약자들이 찾아왔던 명동성당이 아까 말한 맷돌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이제는 사라진 명동성당의 들머리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걸 우리가 덮어 버렸네요.

: 명동성당은 세상의 약자들을 돌보면서 거룩한 공간이 되었는데, 이제는 저 역시도 세상과는 동떨어진 섬처럼 느껴집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신부님은 전두환의 5·18광주학살 당시에도 고초를 겪으신 것으로 압니다.

: 며칠 전 <서울의 봄> 영화를 봤어요. 전두환의 12·12쿠테타를 그렸잖아요. 무력으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은 광주에서 어마어마한 학살을 자행했고, 언론통제를 통해 시민들의 의식마저도 통제했어요. 그런데 광주의 김성용 신부가 광주를 탈출해 명동성당에 와서 광주항쟁의 진실을 털어놨어요. 그 자리에서 같이 이야기를 듣던 사람은 사무국장이던 장익 신부, 나, 함세웅 신부 등 7명의 신부가 있었어요. 너무나 참혹해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어요. 언론이 통제된 상황이라 이야기를 들은 우리는 각자 본당에 가서 공지사항으로 사실을 알리고, 강론으로도 얘기하자고 했어요. 독일에 유학했던 광주의 장용주 신부가 독일에서 방영된 광주학살의 참상을 담은 비디오 가져왔어요. 그 비디오를 복사해서 각자 본당에서 틀어주었어요. 나는 이문동성당에서, 양홍 신부는 장위동성당에서, 그리고 함세웅 신부 등이 주일미사 때 계속 광주항쟁 비디오를 틀어주니까 난리가 났어요. 그래서 12·12로 집권한 신군부가 광주비디오와 관련한 신부들을 서빙고로 끌고 갔어요. 외출 나갔다가 들어가려는데, 신자들이 서빙고 보안사 요원이 이문동성당을 에워싸고 ‘신부님을 잡아가려 한다’라고 일러주었어요. 그 소리를 듣고 중곡동에 있는 메리놀 본부로 피난 갔어요. 거기서 3일간 숨어 있었는데, 외출 나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으니 사람들은 내가 잡혀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제 숨어 있기만 한 것도 그렇고, 계속 안 잡혀 들어가는 것도 이상해서, 명동성당 주교관으로 몰래 들어가서 나를 잡으러 다니던 정보과 형사, 보안사 수사관들에게 전화해서 ‘나 여기 있다. 나 잡아가라’라고 연락했어요. 그래서 그 악명높은 서빙고 보안사 분실로 끌려갔어요. 서빙고는 남산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요. 중정 6국에서는 물리적 고문이나 신체적 고문은 하지 않았는데, 서빙고 분실은 들어가자마자 군복으로 갈아입히고는 훈련병으로 취급하면서 군홧발로 때리고 막 짓밟았어요. 그렇게 맞아서 고막이 터져 나중에 수술을 받은 신부도 있어요. 수사관들은 ‘왜 신문, 라디오 방송에서 발표하는 정부 말을 믿지 않고 그런 짓을 벌이느냐’라고 하길래, ‘신부가 (김성용) 신부 말을 믿지 않으면 누구 말을 믿냐’라고 했더니, ‘이 새끼가’ 하면서 때리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신부님, 우리가 다 정권 잡게 되었는데 신부 몇 놈들이 이거 아니라고 광주항쟁 이런 거라고 진상을 알리면 우리가 정권을 못 잡잖아요. 여기가 어떤 곳인 줄 아세요. 이세호 장군, 김종필 그 양반, 또 김재규 이런 사람들이 다 들렀던 방입니다. 여기 들어오면 신부님은 살아서 못 나갈 수도 있어요”라고 협박하면서 심문하기도 했지요. 또 나이 많은 심문관은 자기가 노기남 대주교 관련한 사건을 다뤄봤다면서, “신부님, 천주교가 뭐 이런 데 나설만한 정의가 있느냐? 내가 노기남 미수사건도 조사했다. 천주교도 엉망이면서 뭘 그러느냐”라고 회유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그놈이 나랑 중동고등학교 동문이었어요. “신부님 보니까 아무것도 한 것 없네. 내가 때리는 척하면 아픈 척 소리만 지르라”라면서 봐주는 거예요. 그래서 잡혀간 신부 중에 내가 제일 안 맞은편이었죠. 다른 신부들은 엄청나게 맞았어요. 그때가 7월경이었는데, 창 너머로 삼종소리가 들려왔어요. 삼종소리를 들으면서 ‘나 이거, 여기서 죽으면 순교가 아니고 뭔가’ 하면서 열심히 기도했어요. 사는 것은 고사하고 개죽음만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그때만큼 열심히 기도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한 열흘쯤 지나서 풀려났는데, 고문받고 난 뒤 이가 다 빠져서 이가 몇 개 남지 않았어요. 틀니를 했어요.

: 저도 <서울의 봄> 영화를 봤는데, 신부님 말씀과 그 영화가 자꾸 매치됩니다. 고문 폭력은 정말 인간의 영혼마저도 죽이는 것 같습니다. 고문은 그 어떤 형태로도 자행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 아래서는 너무나 쉽게 이뤄졌어요.

: 그래요. 고문을 당하면 정신적 고통이 너무나 큽니다. 고문을 받다 보면, 내가 비록 정의롭고 올바른 일이라 생각해서,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린다고 하지만 교회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간 게 아닌가? 떨어진 시체 아닌가, 그리고 내가 정말 사제로서 이렇게 희생당하는 게 뭔가? 이런 정신적 고통이 심하게 다가옵니다. 서빙고에 같이 갔던 동창 양홍 신부는, 자기가 있던 방은 벽이 전부 핏빛이라 두려웠고, ‘엘리베이터 탄다’라는 게 있는데, 그건 엘리베이터에 태워 떨어뜨리면 불구가 되는 것이랍니다. 우리 신부들은 그런 고문은 당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고문도 무섭고 감방 자체가 지하라 더 두려웠습니다. 옆방에서 들리는 때리는 소리, 우는 소리, 비명은 그 정신적 고통을 배가하죠. 광주비디오 녹화 때문에 끌려 온 정 마리안나(AFI)의 고문당하는 소리, 고통에 젖은 울음소리는 마음을 찢었어요.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이었습니다. 이 광주항쟁 비디오 사건은 전두환 정권 탄생을 앞두고 사제단 주역을 검거해서 겁주려고 더 강하게 나갔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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