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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 멤버 안충석(루카) 신부와의 ‘만남’ I

최종 수정일: 2024년 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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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제직은 어머니의 것 – 그 어머니에 그 아들!

 

오민환(오): 신부님께서 연구원 이사로도 계셔서, 자주 뵙기도 했는데 이렇게 ‘만남’이라는 주제를 놓고 대화를 나누니 색다른 느낌입니다. 더 반갑고 좋은 만남의 시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우선 내년 2024년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이 창립된 지 50주년이 됩니다. 신부님께서는 사제단 창립과정과 이후 활동에도 깊이 관여하셨습니다. 그 역사적 사실의 내용을 오늘 차근차근 듣고 싶습니다. 오늘 만남을 위한 사전 질문지를 드렸는데, 우선 신부님 소개를 간단히 들으면서 시작해 볼까요.

안충석(안): 그래요. 내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나는 1939년 11월 28일 경기도 이천군 장호원읍에서 태어났어요. 일제강점기에 세상에 나와 초등학교 1학년 때 조국의 해방을 맞았습니다. 해방 후에는 바로 민족분단 6·25전쟁이 벌어졌지요. 그때 나이 11살이었어요. 분단된 조국의 전쟁을 보았고, 1·4후퇴때 피난살이도 해보았습니다. 그 분단의 역사 현실에서 의견이 조금만 달라도 상대를 공산당으로 몰아가며 즉시 적대시하는 분단의 고질병을 소년의 눈으로 본 셈이지요.

오: 신부님께서는 분단의 고질병, 곧 레드콤플렉스에 감염된 한국 사회를 몸으로 체험한 세대이십니다. 그런데 언젠가 신부님께서 장호원으로 들어온 인민군 중에 소년병을 만난 얘기를 하신 적 있습니다. 상당히 낭만적인 얘기로 기억하는데, 다시 한번 해 주시죠.

안: 그래요.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이 장호원초등학교를 점령했어요. 그런데 거기에 있던 인민군 소년병들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한번은 초등학교 6학년 정도 되는 소년병과 교실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만화책을 같이 보며 깔깔거리는 동심의 세계로 푹 빠졌어요. 기다란 장총이 너무도 커 보였던 소년병, 그 아이에게는 무슨 이념도 사상도 없었어요. 같이 누워 깔깔거리는데, 거기에 무슨 적대감이 있었겠어요. 함께 웃으며 마음을 나누던 소년들처럼, 우리 남과 북의 민족도 그런 마음을 가졌으면 합니다. 땅에 그어진 휴전선보다 더 무서운 것은 마음의 분단입니다.

오: 신부님의 소년시절은 일제강점기, 해방, 전쟁 등의 굵직굵직한 한국현대사의 흐름 안에 있었네요. 몇 년 전 박고안 신부님 평전 <끊어졌다 이어진 은총>을 정리하다 보니, 신부님께서는 박 신부님과도 인연이 깊으셨습니다. 감곡 매괴학교에서도 그렇고 안성에서도 그렇고 말이지요. 신부님의 신앙과 성소에 관해 듣고 싶습니다.

안: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우리 집은 개신교 감리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큰 어머님이 들어오셔서 저희 집안을 가톨릭으로 권고하셔서 다 같이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장호원 초등학교에서 감곡성당 학교인 매괴초등학교로 전학을 하게 되었고, 거기서 가톨릭 신앙의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 매괴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박고안 신부님이셨습니다. 박 신부님의 모습과 인품을 보면서 저분과 같은 사제가 되겠다는 막연히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나중에 신학교에 입학해보니, 박 신부님은 신학교에서 학생들 영성지도 신부님으로 계셨지요. 내 성소의 뿌리는 나의 고향입니다. 아버님의 내 나이 두 살 그러니까 만 한 살 때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뿐인 내 여동생은 유복녀인 셈이죠. 홀어머니 손에서 우리 남매는 성장하였습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어머니 친정이자 고향인 안성으로 이사를 하였고, 거기서 중학교를 마쳤고 서울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신부가 되기 위해 성신대학(현재 혜화동 가톨릭대학 성신캠퍼스)에 입학했습니다.

오: 신부님 성소의 뿌리가 ‘나의 고향’이라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신부님이 태어나고 자란 땅이 성소의 바탕이 되었다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그 태생적 뿌리 위에 신부님이 사제 성소를 채워나간 다른 어떤 계기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안: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삶으로 답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왜 사는가에 대해 답하기 위해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사랑받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을 배우고 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의 아베 피에르 신부님(1912-2007년)의 삶에 깊이 공감합니다. 피에르 신부님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셨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빈민, 노숙자 등 힘없고 가난한 사회적 약자를 구제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셨지요. 피에르 신부님은 프랑스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대한 프랑스인’이라 불리기도 한답니다. 늘 자신이 받은 사랑은 늘 남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에 있겠냐”고 <고백록>에서 말씀하십니다. 아마 그것은 그분 전 생애를 응집한 고백일 것입니다. 사랑의 성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당신을 알기 해 주시고, 당신을 알기 위해서 당신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간청하십니다. 성경의 예수님이 일관되게 전해주는 내용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그 사랑에 응답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알아듣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첫째가는 계명이자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상계명이라 생각합니다.

오: 그것이 신부님이 종종 말씀하시는 ‘내리사랑’의 원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에게 내려온 사랑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그 사랑말입니다.

안: 그렇지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생의 진로를 정해야 할 때, 내 어머님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마치 성모님의 사랑을 받은 것처럼, 어머니의 내리사랑을 받은 나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 사랑을 전할 사제의 길로 선뜻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내가 만 한 살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에, 어머니께서 무척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보며 인간은 왜 사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랑에 응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인간도 응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첫째 계명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 아닙니까.

오: 신부님께서 사제의 길로 들어서실 때, 독실한 개신교인이었던 이모부님의 권고도 있었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있는데요.

안: 네. 이모부가 개신교 신자이신데도 불구하고, ‘너는 신부가 돼라’라는 말씀을 하셔서, 매괴학교 박고안 신부님을 보며 어릴 적에 품었던 사제직에 대한 기억이 번뜩 떠올려졌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어머니의 내리사랑을 깊이 묵상하면서 사제성소의 길로 들어섰어요. 다시 말해 성모 마리아처럼 살아오신 내 어머니의 일생을 그대로 살고 싶어서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제서품을 받고 60년 가까이 사제로 살면서 내 어머니의 내리사랑을 따라 사랑을 나누기 위해 달렸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라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그렇게 사제직을 향해 달려 이제 나도 그 길의 끝에 섰다고 할까 봐요. 사제직의 한길이 내 삶의 전부였고, 그러한 내 삶의 중심에는 어머니에게서 본 하느님의 내리사랑이 있었습니다.

오: 그러니까 어머니의 삶은 신부님 사제직의 출발이자 사제의 삶 전체라 하실 수 있겠습니다. 얘기를 듣다 보면 신부님께서는 특히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각별하신 것 같습니다.

안: 그렇지요. 어머니의 삶을 보면서 하느님의 내리사랑을 체험했으니 말이지요.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생활이 3년밖에 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평생 자식을 위해 독신으로 사셨지요. 제가 보기에 마치 성모 마리아의 삶과 같았습니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내 사제직의 원형이고 전체라 말할 수 있고, 그래서 사제로 살면서 전혀 한눈을 팔 수가 없었습니다.

오: 아, 어머니의 삶이 신부님 사제직의 원형이라. 내리사랑을 통해 애주애인(愛主愛人),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분리될 수 없음을 어머니로부터 배우시고 평생을 그렇게 사제직을 향해 달려오셨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홀로 키운 외아들을 신학교로 보내셨던 어머니의 마음을 짐작해 봅니다. 신부님의 어머니께서 아무리 성모 마리아와 같은 삶을 사셨다 해도 그 이별과 안타까움은 뭐라 형언할 수 없으셨을 것 같은데요.

안: 우선 생각나는 것은 본당신부님 신학교 입학추천서를 받으려 어머니를 모시고 서대문성당으로 가던 길이었어요. 성당 근처 로터리 근처에서 어머니께서 걸음을 멈추시더니 갑자기 “너 꼭 신학교에 가야만 하느냐? 가지 않으면 안 되겠니?”라고 물어오셨어요. 순간 나는 대답을 못 했지요. 어머니는 내 답을 기다리기보다는 그냥 당신 가슴에 쌓인 얘기를 한 번 조용히 내뱉으셨던 거죠. 어머니께서는 아들이 당신과 같은 독신의 삶, 고단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 삶을 견디어 낼 수 있는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짐을 물어오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답을 했습니다. 우리 모자는 저녁노을이 지고 있는 서쪽 하늘만 말없이 한참 쳐다보았습니다. 아들이 신부가 되면, 이제 모자 관계가 끊어지는 것일 텐데…. 묘한 감정을 드러내셨던 어머니. 어머니의 표정에서 몹시 쓸쓸하고 고독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남편 복이 없으면 자식 복도 없다더니, 너는 네 어머니를 한강 물에 빠뜨리고 나서 신부가 되어라”라며 내가 사제가 되는 것을 극구 말리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성모님과 예수님을 묵상했어요. 서대문 로터리에서의 그날도 십자가의 길 4처 모자상봉과 이별, 십자가를 진 아들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의 형상이 떠올려졌습니다. 어머니는 일생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반대하신 적이 없어요. 그런데 내가 신부가 된다고 하자, 교사가 되길 바랐던 어머니는 무척 섭섭하셨지만, 그래도 나의 길을 허락하셨지요. 성당 사제관으로 들어가 보니. 이석충 신부님이 우리를 맞으셨어요. 신부님께서는 내 어머니 얼굴을 보시더니 두말없이 추천서를 써 주셨어요. 어머니께서 살아오셨던 신앙의 삶을 익히 아셨던 신부님은 어머니를 보면 그 자식은 말할 것도 없이 사제가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이었지요.

오: 어머니께서는 신앙심이 깊으신 것은 물론, 본당 생활에도 무척 적극적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안: 아니, 뭐 외적인 것보다 얼결에 청상과부가 되신 어머니한테서 성모 마리아처럼 풍기는 어떤 아우라가 있었어요. 어머니에게는 자식과 천주교 신앙이 전부였습니다. 내 어머니 김 마리아는 성가정을 이룬 성모님을 본받아 하느님께 삶의 전부를 두는 삶을 사셨어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복음 말씀에 따라 소박하고 단순한 삶, 겸손한 삶을 사시면서 평생 기도생활에 열심이었고, 가난 속에서도 과부의 동전 한 닢처럼 정성스럽게 헌금하시던 착한 어머니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늘 ‘사람은 하늘이고, 사람만이 꿈이고, 희망’이라며 누구에게나 친절하셨어요. 그래서 우리 집은 가난했지만,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성가정의 모습이었습니다. 평생을 레지오 단원으로 활동하시며 전교에 앞장서셨고, 사제인 나를 위해 수유리 갈멜 수도원에 가셔서 기도와 미사를 하시기도 했습니다. 내 전체 사제생활은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 되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실천에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첫 본당을 맡은 동대문성당에서 아침미사를 봉헌하고 나오는데, 주방 할머니로부터 어머니께서 병자성사를 청하신다고 전해줬습니다. 급히 준비해서 집으로 달려갔더니, 사람들이 병원 시신 안치실로 안내했습니다. 시신을 덮은 흰 보자기를 벗기니 편안한 미소를 띤 채 누워계신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순간 말문도 울음도 막혀버렸습니다. 새벽미사를 가시던 중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셨던 것입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내게는 어머니가 곧 성모님이었습니다. 성가정의 모범을 보여주신 어머니에게서 영원한 구원의 씨앗을 보았습니다.

오: 참으로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로서 바르고 거룩한 삶을 사셔야 할 막중한 책무가 신부님께 있었군요. 이제 동대문성당 이야기를 해 주시기 전에 혹시 신학교 생활에서 기억에 남는 일화를 전해주실 수 있나요. 신부님 반은 동창도 많으셨던 거로 아는데요.

안: 우리 동창이 많은 것은 사실이고, 그것이 나중에 사제단 활동하는 데 힘이 되었지요. 신학생 시절 강렬하게 느꼈던 것은 4·19가 일어났던 때였어요. 우리 신학생들은 4·19발생지가 신학교 앞 혜화동 로터리였음에도 그 혁명의 대열에 들어갈 수 없었어요. 거리에서 들려오는 학생들의 함성만 들었어요. 당시 학장이시던 한공렬 신부님이 신학생 전체를 강당에 모이게 했어요. 희랍신화에 나오는 피닉스, 불사조 얘기를 해 주셨어요. 한 신부님은 저 데모에서 학생들은 죽어가지만 불사조처럼 부활한다면서, 하느님 찬미가 ‘테 데움’을 부르게 했어요. 우리는 학생들의 외침이 들리는데, 나가서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아주 안타까웠고요. 그 기억이 강렬합니다.

오: 그것은 아주 특별하고 역사적인 사건의 경험이시고요. 신학생 시절에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없으신가요. 아니면 신부님 동기들 이야기를 해 주시던지요.

안: 당시 신학교는 엄격했어요. 다른 신학생들처럼 평범하게 살았어요. 그저 신부 되는 것만 관심을 가졌어요. 우리 동기들 숫자는 다른 반보다 많았고, 좀 더 극성맞고 친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당시 사제 서품 숫자도 가장 많았던 반이죠.

 

사제의 영성 – 육화와 강생, 이게 정치적인가

 

오: 그럼, 이제 신부님의 사제 서품 이야기를 해볼까요. 앞서 어머니의 삶과 신앙이 신부님 사제생활의 처음과 끝이라 하셨지만, 사제로서 살아가시는 영성의 바탕이 있을 것 같은데요.

안: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의 왕직, 예언직, 사제직을 받는다고 교리로 배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이해하고 해답을 찾으려 합니다. 또 우리는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요한복음의 소식을 듣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말씀이 되어 지금 당장 여기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놀라운 강생의 사실 앞에 있습니다. 바로 이 육화의 영성, 그리고 시대의 징표에 따라 세상 곳곳을 다니시고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제로 살아가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오: 그럼, 신부님의 서품과 사제단의 탄생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이제 그러한 강생과 육화의 영성에 따른 신부님의 사제생활 말씀을 본격적으로 들을 수 있겠지요. 첫 본당신부로 가셨던 동대문성당에서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게 되지요.

안: 1967년 12월 12일에 서품을 받았어요. 용산, 종로 성당에서 보좌신부 생활을 하고, 1972년에 동대문성당 주임신부로 발령받았어요. 동대문성당은 당시 숭인동에 있던 개신교 소유 건물과 대지를 사서 시작했어요. 내가 첫 주임신부였고, 그다음 2대 주임신부로 김승훈 신부님이 오셨지요(1977년). 동대문성당 주보성인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입니다. 아무튼 내가 2월에 부임하고, 그해 10월에 박정희가 비상계엄을 선포해 헌정을 중단하고 유신헌법을 통과시켰어요.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선거를 통해 다시 대통령이 되지요. 장기독재의 발판이 마련된 셈이지요.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제단의 출범이 그렇게 우연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거죠. 사제단 출범의 역사적 맥락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박정희가 1961년 5·16군사쿠테타로 집권한 후 한국사회는 경제개발에 올인했어요. 1960년에는 매년 약 60만 명에 달하는 농촌 인구가 서울로 올라왔어요. 거대한 산업예비군이 형성된 거죠. 이들을 대상으로 장시간 저임금 노동이 가능했고요. 그러면서 1970년에 청계천 봉제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자살, 광주대단지 항쟁, KAL빌딩 방화 등 여러 대형 사건이 연속적으로 발생했어요. 부실기업을 살리기 위해 힘없는 노동자, 가난한 이들만 괴롭히고 소외시키는 거였지요. 나는 이러한 노동현장에 발생한 사건을 노동운동이라기보다는 ‘나도 인간이고 싶다’라는 인간존엄 선언, 하느님이 주신 천부의 인권회복운동으로 보았어요. 박정희가 노동3권을 박탈하고 노동자를 핍박하면서, 한국사회는 경제사회적 불균형이 심화되고 양극화현상이 커져 생지옥이 된 것은 사실이지요. 게다가 장기집권 시나리오 유신헌법에 대한 저항이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어요. 동대문성당에 있으면서 주변의 대학생들이 데모하는 모습을 많이 보기도 했습니다. 또 대선 후보였던 김대중 씨가 일본에서 납치되어 죽을 뻔한 사건도 일어났지요. 나중에 김대중 씨는 ‘예수님 살려주십시오’라고 기도했더니 미국 CIA헬리콥터가 나타나 죽이지 말라고 해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주었어요. 그러한 사회, 경제적 배경이 사제단 출범과 무관하지 않다고 봐요. 그리고 우리 동창들은 물론 당시 한국교회는 2차 바티칸공의회가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에서 말한 ‘시대의 징표’를 보고 있었지요. 원주의 지학순 주교님, 전주의 김재덕 주교님 등은 사제들과 함께 공의회문헌을 공부하기도 했었고요. 그래서 복음화를 인간화와 연결하기 시작하면서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원주는 사제단 창립에 주요한 도시가 되는데, 지 주교님이 1971년 10월 5일에 원동 주교좌성당에서 ‘부정부패 뿌리뽑자. 사회정의를 이루자’라며 특별미사를 하고 거리시위에 나섰어요. 권력에 장악된 원주 MBC에 대한 경고였지요. 이것이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복음화를 위한 첫 번째 미사이자 선언이라고 봐요.

오: 신부님 말씀을 듣다 보면, 사제단 출범이 인권이 부정되고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소외되고 배척받는 현실 속에서 인간과 복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서 나왔다고 보게 됩니다. 그리고 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학습을 통해 복음화가 인간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결론을 통해 비인간화, 반민주의 독재정권에 대한 투쟁에 서게 되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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