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안에 항상 깨어있어라!
- didimausi
- 2023년 7월 10일
- 3분 분량

인간은 스스로 배우고 알고 깨닫는 존재다. 곧 인간은 자각할 줄 아는 존재로서, 자기 자신을 누구인지를 깨우치려 한다. 특히 불교에서는 누구든지 부단히 마음을 갈고 닦아 얻은 최고의 깨달음은 해탈이자 구원이라고 한다.
바오로 사도도 ‘주님 안에 항상 깨어있으라’라고 권고했다. 바오로 사도가 깨어있으라 한 것은, 항상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가운데, 다시 말해서 사랑하는 사람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통하여 사랑으로 깨어있으라는 말씀이다. ‘등잔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에 관한 복음서 비유 말씀도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씀은 기도 생활과 일상을 서로 사랑의 생활 안에 통합하여 지속하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그 사랑을 받는 인간인 나를 알고 깨닫는 수양의 시간을 가지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그 수양의 시간을 채울 내용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시면서, 항상 깨어있으시며 하느님 나라를 직접 몸으로 살아 나아가시며, 완성하셨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있고, ‘아직’ 아닌 긴장 사이에 위치한다. 오늘 지상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늘 깨어 살아가셨던 주님의 삶을 묵상하고 그대로 살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며, 주님의 길을 실천하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에게 있어 주님 안에 거듭 태어나는 삶은, 주님 안에 늘 깨어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 깨어있는 삶은,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주님께서 사시는 것이다.
잠자는 사람을 깨우기는 쉬우나, 잠자는 척하는 사람은 깨우기가 어렵다고 한다. 잠자는 척하는 사람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야말로 의식적으로 깨어있어야만 하는 것인데, 어떻게 깨어있느냐는 것이 관건이다. 성경은 우리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보화를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우리 마음도 움직인다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으뜸 계명은, 마음과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그러한 길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으로 깨우침을 얻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루카 10,25-28; 마태 22,34-40; 마르 12,28-34).
열 처녀의 비유 말씀처럼, 우리는 주님의 때가 언제인지 모른다. 신랑이 언제 오는지 그날과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지혜로운 처녀는 깨어 등불을 준비하고 세상을 밝히고 있다.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도 이성과 사랑으로 깨어 세상을 밝히면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야 한다. 우리 손에 들려진 등잔에 사랑의 기름을 충분히 부어 불을 밝히고 주님을 기다리자.
아래는 유시화의 <새는 날아가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라는 책에 나온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에 나온 대목을 옮겨보았다.
독일 출신의 영적 교사 에크하르트 톨레가 대학에 다닐 때의 일이다. 하루는 지하철을 타고 학교 도서관을 가고 있는데 30대 초반의 여성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어딘지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고, 몹시 긴장해 있었으며, 화가 난 듯 쉴 새 없이 혼잣말을 했다. 자신의 생각에 몰두한 나머지 지하철 안의 다른 사람들이나 주변 상황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가 하는 말은 이런 식의 독백이었다.
“내가 그 여자한테 말했지. 넌 거짓말쟁이라고. 어떻게 감히 나를 욕할 수 있지? 나를 이용한 건 너잖아. 난 너를 믿었는데 네가 내 믿음을 배신했어···.”
자신이 겪은 부당한 일에 대한 분노와 반박이었다. 그 감정이 너무 사무쳐서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으며, 그것이 반복된 나머지 자신의 행동을 알아차리는 지각 기능이 정지해 있었다. 그런 그녀를 만난 후 에크하르트 톨레 영성가는 ‘난 저 여자처럼 되지 말아야지.’ 그러자 남자가 그를 흘낏 바라보았다. 톨레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소리 내어 중얼거렸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그는 충격에 빠졌다. 자신의 마음도 그녀의 마음처럼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녀는 생각을 소리내어 말하고, 그는 대부분의 사람처럼 머릿속에서 중얼거림을 이어 간다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미친 것이라면 그 자신을 포함해 모두가 미친 것이었다. 단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 경험은 그에게 생각에서 ‘생각의 알아차림’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알아차림이 없는 생각이야말로 인간의 주된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삶은 내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만큼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는 것도.
어느 아메리카 인디언 스승이 서양인 제자에게 말했다.
“그대는 그대 자신에게 너무 많이 말한다. 그대는 그 점에서 특별하지 않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세상을 내면의 중얼거림으로 유지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말하기를 멈추자마자 세상이 완전히 바뀐다는 것을 안다.”
생각은 내가 아니다. 본래의 나는 생각들이 아니라 그것들의 관찰자이다. 그 ‘나’의 알아차림이 없으면 생각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고, 현존이 아니라 끊임없는 중얼거림이 일상을 차지한다. 이 중얼거림에서 깨어나 미소 짓지 않겠는가?
생각이 깨어있고 알아차림이 없으면, 생각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고 현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고 꿈꾸는 자의 꿈인 비현실이 주인행세를 한다. 망상과 환상 속에서 끊임없이 홀로 중얼거리면 누가 그 이야기를 들을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정신건강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과 말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면 말이다. ‘정신줄을 놓았다’라는 말을 한다. 그것으로 줄이 끊어진 연같이 허공을 맴도는 형상을 연상하게 된다. 깨어서, 의식적으로 알아차려 몸과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주체적으로 살아 나아야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을 따라 기도 바친다. “사랑의 주님! 당신을 알기 위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기 위하여 당신을 알게 하시고, 당신을 알고 사랑하는 가운데 깨어있어서 알고 사랑하며 하느님 나라를 살아나아가게 하소서!” 깨어 기도하십시다! 아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