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인격의 완성을 이루자

최종 수정일: 2023년 3월 11일


ree
빈센트 반 고흐 ‘선한 사마리아인’(1890년)

하느님을 닮은 인간

구약 창세기 1장 26절, 하느님이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느님의 모습으로서 완성되어야 하고, 그분의 대리자 역할을 다하는 인간다운 자격을 인격이라고 일컫는다. 즉 인간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위격의 자격을 갖춘 첫째로 스스로 존재하는 주체적 존재요, 둘째로 성부·성자·성령의 삼위 위격의 관계적 존재요, 셋째로 삼위일체 각 위격의 역할을 다하는 존재라는 이 세 가지 요소야말로 인격의 핵심이다. 신은 신격을 갖고, 우리도 인간다운 인격을 완성해야 한다.

철학자 칸트는 신의 속성으로 전지(全知)·전능(全能)·전애(全愛)·전의(全義)의 네 가지 요소를 들었다. 신은 완전한 지혜와 완전한 능력과 완전한 정의(正義)를 지닌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을 믿고 신을 경외하고 신을 우러러본다. 신은 무한자요, 인간은 유한자다. 신은 창조자요, 인간은 피조자다. 신은 절대자요, 인간은 상대자다. 신과 인간은 완전히 차원을 달리한다.

“실수하는 것이 인간이요, 용서하는 것이 신이다”(알렉산더 포프, 1688-1744년)

인간은 실수한다. 실수하는 것이 사람이다. 인간은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많은 과오와 실수를 범한다. 인간의 실수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는 것이 신이요, 그래야 신답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서로 용서해야만, 하느님께서도 불완전한 실수를 저지르는 인간을 받아주신다.

인간다운 삶, 인격을 갖추자

동물은 언제나 본능과 충동대로 산다. 인간은 개나 돼지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격을 포기하고 동물의 차원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개나 돼지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은 인격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야 할 길(人道)이 있고, 인간다운 권리, 인간다운 품위를 지녀야 하고, 인간다운 윤리를 실천해야 하고, 인덕(人德)과 인정(人情), 그리고 인격(人格)을 갖추어야 한다.

인간답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격(格)에 따라 사는 것, 자신의 처지와 분수를 잘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아버지, 남편 그리고 어머니, 아내다운 격이 있고, 자식에게도 마찬가지 격이 있다. 세상 만물에는 다 격이 있다. 몸에는 체격(體格)이 있고, 뼈에는 골격(骨格)이 있고, 인품에는 품격(品格)이 있고, 성질에는 성격(性格)이 있고, 상품에는 가격(價格)이 있다. 격은 자격이요, 등급이요, 위치요, 격식이다. 인간은 저마다 저다운 격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직업인은 반드시 자격시험을 치른다. 이발사가 되려면 이발사의 자격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자격이란 무엇이냐.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신분과 조건이요, 어떤 일을 하는 능력과 자질(資質)과 품격이다(안병욱, 『삶의 완성을 향하여』, 88쪽 이하 참조).

인간의 가치관, 인생관

우리는 무의미한 것에 대해서 가치를 느끼지 않는다. 내 생명에 도움이 되고 내 자아실현과 인격 완성에 이바지하는 사물이나 대상에 대하여 우리는 관심과 흥미를 갖는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생의 목적은 가치창조다. 우리는 보다 더 건강하게, 보다 더 편리하게, 보다 더 풍족하게, 보다 더 참되게, 보다 더 아름답게, 보다 더 선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인생은 가치 추구, 가치창조를 위한 부단한 분투 노력이다. 어떤 가치를 추구하느냐, 어떤 가치에 더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하느냐에 따라서 생활의 내용과 정신의 태도가 달라진다. 인간은 저마다 자기 나름의 가치관과 가치 체계를 가지고 그 가치관에 따라서 행동하고 생활한다. 무엇을 인간의 최고가치로 보느냐, 이것이 가치관과 인생관의 근본 문제다.

잘못된 가치관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고 올바른 가치관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가치관의 확립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다. 인간의 가치관은 다음 네 가지의 단계로 발전했다.

첫째는, 물건가치의 단계다. 인간의 가치의식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 사회에서 인간은 금은보석과 장식품, 무기와 옷과 가장집물(家藏什物)과 같은 물건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가치관의 제일 낮은 단계다.

둘째는, 신체적 가치(身體的價値)의 단계다. 인간의 가치의식이 발달한 결과, 물건 가치보다도 신체의 가치, 건강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건(剛健)은 남성미의 상징이요, 우미(優美)는 여성미의 상징이다.

셋째는, 정신적 가치(精神的價値)의 단계다. 인간의 가치의식이 성숙함에 따라 신체의 가치보다도 정신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혜·용기·사랑·정의·성실·근면·신용·인내·겸손·애국심·책임·협동·정직·절제·침착 등 정신적인 덕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인간의 가치관이 외적 가치에서 내적 가치로 발전했다.

끝으로, 인격적 가치(人格的價値)의 단계다. 정신적 가치의 근본과 원천이 되는 인격이야말로 가치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가치다. 의식의 통일체요, 정신 작용의 주재자가 되는 인격이 인간의 최고가치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인격은 가치 중의 가치요, 소중한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다. 인간은 인격의 주체다. 가치의 정상 자리에 인격이 있다. 인격은 가장 으뜸가는 가치다. 이것이 인간 가치관의 결론이다.

인류의 사상사와 가치의 자각사에서 인격 가치를 가장 강조한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임마뉴엘 칸트(1724-1804년)다. 칸트는 인격의 발견자요, 인격의 확립자다. 칸트만큼 인격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사상가는 일찍이 없었다. 칸트의 인격주의를 쉽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가치가 있다. 하나는 수단가치(手段價値)요, 또 하나는 목적가치(目的價値)다.”

수단가치는 그 자체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 생활의 수단 노릇을 하기 때문에 비로소 가치를 갖는다. 집, 옷, 자동차, 만년필, 음식, 돈 모두 그렇다. 이러한 가치를 모두 수단가치라고 한다. 칸트는 수단가치를 ‘자케’(Sache)라고 하였다. 자케는 물건이요, 사물이다. 영어의 thing, 라틴어의 res에 해당한다.

목적가치를 그 자체가 목적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목적 가치를 갖는 것은 인간의 인격밖에 없다. 인격은 결코 수단이 아니다. 인격은 수단이 될 수 없고, Sache가 될 수 없다. 인격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인격은 목적 중의 목적이요, 가치 중의 가치다. 인격만이 목적가치를 갖는다.

수단 가치를 갖는 물건이나 사물은 상대적 가치를 갖는다. 이것을 저것으로 대용할 수 있고, 대치할 수 있고 교환할 수 있고 매매할 수 있다. 그러나 목적가치를 갖는 인격은 유일무이의 개성을 갖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딴 것과 대용할 수 없고 대치할 수 없고 교환할 수 없고 매매할 수 없다.

인격을 수단으로 다루지 마라!

이 세상에서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인격이다. 인격은 가격 대신에 품위와 존엄성을 갖는다. 인격은 가격을 매기기에는 너무나 소중하고 너무나 존엄하다. 인격은 무조건적 가치를 갖는다. 인격의 가치를 표현할 때 우리는 품위와 존엄이라는 말을 쓴다. 인격은 한없이 존엄하다. 존엄은 존귀하여 범할 수 없는 것이다.

물건은 수단 가치와 상대적 가치와 시장 가격을 갖는다. 그러나 인격은 목적가치요, 절대적 가치요, 존엄한 가치다. 물건과 인격은 그 가치에 있어서 천양지차가 있다. 그러므로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 “네 인격에 있어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나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서 다루어야지, 절대로 인격을 단순히 수단으로서 다루지 말라.” 이것이 칸트의 인격주의 사상의 결론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인격이나 남의 인격을 목적으로 다루지 않고 수단으로 다루려고 한다. 자타의 인격을 도구처럼 물건처럼 수단처럼 기계처럼 상품처럼 다루려고 한다. 이것이 인격의 멸시요, 인격의 비극이다. 이것이 인격의 물건화요, 도구화요, 수단화다. 이것을 인격의 비인격화라고 한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큰 비극이다.

인격의 감정 - 수치, 연민, 경건

러시아의 유명한 철학자 소로비요프(Soloviyov, 1853-1900년)는 인격의 특이한 감정으로서 세 가지를 들었다. 수치(Shame), 연민(Pity)과 경건(Piety)이다. 이 세 가지의 감정은 인격만이 갖는 독특한 감정이다.

첫째로 인격은 수치의 감정을 갖는다. 인간만이 부끄러워할 줄 안다. 동물은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개가 주인을 보고 반가워할 줄은 알지만 부끄러워할 줄은 모른다. 동물은 수치 감정이 없다. 수치감이란 무엇이냐. 자기의 잘못이나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낄 때 얼굴이 붉어지고 손으로 낯을 가린다. 인간은 도덕과 양심을 갖기 때문에 자기의 죄악과 과오에 대하여 수치감을 느낀다.

둘째는 연민의 감정이다. 연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남의 불행이나 슬픔을 보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휴머니티의 근본이요, 도덕의 핵심이다. 연민은 사회적 감정의 기초다. 사랑과 동정심과 동포애와 인류애는 모두 연민의 감정에서 우러나온다. 인간의 마음속에 연민의 감정이 있기 때문에 남을 사랑하고 남을 돕고 남을 위할 줄 안다. 인간에게 연민의 마음이 없다면 이 세상은 사막처럼 메마르고 얼음처럼 차가워질 것이다.

끝으로, 경건의 감정이다. 경건은 공경하는 마음으로 깊이 삼가고 조심스러워하는 것이다. 경건은 월등하게 위대한 것 앞에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신과 절대자 앞에 자기를 바치고 귀의하고 무조건의 충성과 순종을 하는 감정이다. 경건은 종교적 감정의 핵심이다. 우리는 위대한 진리요 거룩한 존재 앞에 설 때 마음속에 신성하고 고귀한 감정을 느끼고 겸허한 마음으로 마음의 옷깃을 가다듬는다. 경건의 감정은 인격의 깊이를 가장 잘 표현한다.

인간 실종, 인격 상실의 시대, 이웃은 누구인가

창조주 하느님께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부터 우주에는 대자연 질서의 격이 있었고, 모든 물건, 동물과 인간도 그 자체로서 스스로 존재하는 주체적 격의 가치로서 창조하셨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완전하신 것같이 완전한 자가 되라는 말씀은 창조주의 섭리, 하느님의 뜻대로 인격을 완성시켜 나아가라는 말이다. 하느님처럼 되는 것, 하느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의 완전함을 닮는 것, 그것이 인간 가장 큰 목적이요 가치이다. 그것을 우리는 인격의 완성이라고 일컫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 현실 문제 중 가장 근본문제는 가치관 상실, 인격 상실이다. 이로 인해 인간은 비인간화의 길로 빠져, 인간의 생존방식에 문제가 발생한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 이 말은 인간의 인격 상실의 단면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는 율법교사가 누가 내 이웃이냐고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최후심판 기준도 내가 사는 여기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바로 주님께 해드린 일이다. 어떻게 착한 사마리아인 같이 행동을 할 수 있는가? 보잘것없는 여기의 이웃에게서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위격을 닮은 인간이,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신 만큼 우리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그런 이웃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내가 너희를 사랑한 만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명령도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의 인격적 사랑 실천이다. 우리 인간은 인격적 사랑을 서로 나눌 때만 비로소 인간 완성도 이룰 수 있다.

사랑만이 인간 인격을 완성한다. 하느님의 위격을 닮은 인간은 향주삼덕, 곧 믿음, 희망, 사랑의 덕행을 닦아나가야 한다. 그것이 인격 완성, 하느님 모상성의 회복을 이루는 인간의 길이다. 인간다운 삶을 사는 방식은 그가 어떠한 인격의 소유자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사랑을 받고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 사는 방식의 삶만이 영원히 남을 수 있다. 태어나 그저 속절없이 죽고 마는 동물로 사느냐 아니면,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동물, 인간의 인격을 갖고 사느냐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인 것이다.

댓글


© 2023 by Train of Thoughts. Proudly created with Wix.co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