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말씀, 내 삶의 의미와 실천
- didimausi
- 2024년 3월 8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4월 19일
요한복음서 시작은 이렇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14).
우리 인간은 구약시대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했다. 신약시대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되셨다. 이제 말씀이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가르침이 우리 일상생활의 지침이 되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해주셨던 말씀과 그분의 실천을 가장 잘 따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복음선포 곧 복음화의 문제가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담은 성경, 복음서에는 인간 삶의 의미와 실천, 구원의 문제가 올곧이 담겨 있다.
우리 교회사에서 수도회들이 가장 번창하던 시대를 보게 되면, 대부분 수도공동체 안에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처럼 일상을 살아낸 이들이 있었다. 그분들은 성인성녀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일상 속에서 충실히 따랐다. 완덕을 향한 그분들의 수덕생활은 많은 이들이 귀감이 되었고, 그 덕행의 삶을 따르는 이들이 나타났다.
베네딕토 성인을 따르는 이들이 베네딕토회, 프란치스코 성인을 따르는 이들이 작은형제회, 이냐시오 성인을 따르는 이들로 예수회를 만들었다. 가톨릭교회의 수도회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일상에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던 성인을 본 사람들은 성인의 삶을 롤모델로 삼아 그대로 살아나갔고,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실천하는 길로 알았다. 사실 그랬다. 우리 인간은 사랑을 받고 사랑하는 길에서 자기 자신 변화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 첩경을 발견한다. 다른 왕도는 없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며, ‘이제 다 이루었다, 마쳤다’ 하시며 인간으로 이룰 수 있는 완덕의 삶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길밖에 없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영성생활이며 수덕생활이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실은 그렇게 말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우리 각자 일상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봉헌해야만, 우리도 마지막 날에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복음이 전하는 말씀은 듣고 공부하여 알게 된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 뜻대로 사는 삶이다.
헨리 나웬 신부는 교회와 가까이하는 것이 예수님과 가까이하는 것이라며 이렇게 말한다(<예수 내 인생의 의미>, 분도출판사 1990, 123-125쪽).
[우선] 교회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교회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교회의 전례적 생활 – 대림절, 성탄 시기, 사순절, 부활 시기, 예수 승천, 성신 강림, 연중 시기를 통하여 – 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이 모든 전례 시기와 축일들은 네가 예수님을 더 잘 알게 해주고, 너를 훨씬 더 친밀하게 그분이 교회에서 네게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의 생명과 일치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 미사 성제는 교회의 생명이며 심장이다. 너는 바로 여기서 생명을 가져다주는 복음을 듣고 네 안에 있는 그 생명을 길러 줄 선물을 받는다. 미사 성제에 규칙적으로 참여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네가 지속적으로 교회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너를 붙들어 줄 것이다.
두 번째로 책의 말을 들어라. 이 말은 성서를 읽는 것을 뜻한다. 마르코, 성서에서부터 시작해서 성서와 영성생활에 관한 책들, 그리고 “위대한” 성인들의 전기를 읽어 보도록 해라. 네가 많은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지만, 네가 읽은 것 중의 많은 것들은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길에서 너를 떠나게 하고 있다. 고등학교와 대학은 “영성적 독서”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도움도 제공해 주지 않는다. 따라서 네가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책들을 규칙적으로 읽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우연히 혹은 신중하게 가려서 읽은 영성 서적들을 통하여 하느님께 가는 길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아우구스티노, 이냐시오, 토마스 머튼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책을 통해서 회개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영성 서적들은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로 읽을 것이 아니라 너한테 직접 말을 건네는 목소리에 귀기울이듯이 그 문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귀를 기울이면서 읽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너의 알고자 하는 욕심이 가끔 장난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네가 만일 네 마음에 간직하고자 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를 계속 노력한다면 많은 것을 배우게 되리라.
마지막으로 네 마음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은 네 마음 안에서 네게 말씀하신다. 기도한다는 것은 네 마음 깊이 계시는 예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을 말한다. 그분은 소리치지 않으신다. 그분은 보채지 않으신다. 그분은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소리는 조심성 있게 거의 속삭이는 소리이다. 그것은 부드러운 사랑의 소리이다. 네가 어떤 일을 하든지 언제나 네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예수님의 목소리에 끊임없이 귀기울이도록 하라. 이렇게 귀기울일 때는 능동적이고 주의를 집중해서 시도해야 한다. 예수님의 사랑 깊은 목소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불안정하고 시끄러운 세계에서 쉽게 묻혀 버리기 때문이다. 너는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위해서 날마다 10분이라도 좋으니까 일정한 시간을 내야 한다. 예수님 한 분만을 위해서 매일 할애하는 10분이 네 삶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다.
10분간 고요히 있는 것도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너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즉시 너는, 하느님한테서 나오지 않는 다른 많은 소리가 너의 주의를 끄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소리들은 특히 시끄럽고 빗나가게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네가 만일 매일 규칙적으로 기도시간을 지켜나가면, 서서히, 하지만 분명하게 그 온유한 사랑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고 그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것을 점점 더 갈망하게 될 것이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이 세 가지 양식을 너를 보다 더 깊은 영성 생활로 인도할 것이다. 너는 이 세 가지 양식을 통해서 지극히 친밀한 방식으로 예수님을 알 수 있도록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그분이 너를 부르시는 독특한 방식을 깨닫게 되고, 너 자신이 가고 싶지 않은 곳까지도 그분을 따라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큰 모험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랑의 모험이다. 네가 네 마음속에 예수님이 들어가시게 한다면, 말이 앞서는 일은 드물 것이다.
예수님같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삶의 의미를 우리의 일상에서도 실천할 수 있다. 나는 우리 인간 영혼 생명을 아름다운 꽃을 피워 생명의 씨앗을 남기는 식물에 비유하고 싶다. 우리는 어는 누군가를 꽃피우게 할 수 있고, 그리하여 생명의 씨앗을 잉태할 수 있다고 묵상해본다.
<변신>과 <심판>을 썼던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체코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인생 초기는 아웃사이더의 삶이었다. 류시화는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수오서재 2023년, 39-45쪽)라는 책에서 카프카 삶의 단면으로 보여준다.
세상 떠나기 1년 전, 폐결핵을 앓던 카프카는 요양을 겸해 독일 베를린에서 지냈다. 하루는 베를린 근교의 공원을 산책하다가 어린 소녀를 만났다. 소녀는 벤치에 앉아 슬프게 울면서 망연자실해 있었다. 우리는 왜 우는가? 영혼에 물을 줌으로써 성장하려는 걸까?
무슨 일이냐고 묻자 소녀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인형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소녀와 함께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나무 밑과 풀숲 어디에도 인형은 보이지 않았다. 카프카는 소녀에게 내일 그곳에서 만나 다시 찾아보자고 달랬다.
다음 날도 인형은 발견되지 않았다. 실망해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소녀를 위로하며 카프카는 말했다.
“사실 너의 인형은 여행을 떠났어.”
소녀가 놀라서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카프카는 말했다.
“인형이 너에게 전해 달라며 편지를 보냈어.”
소녀는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 편지를 가지고 있느냐는 소녀의 질문에 카프카가 대답했다.
“미안해, 지금은 나에게 없어. 깜박 잊고 집에 놓고 왔어. 내일 꼭 가지고 올게.”
집에 돌아온 카프카는 곧바로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 인형 대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백지 위에 몸을 기울인 카프카의 자세는 작품을 쓸 때처럼 진지함 그 자체였다. 그는 그 일을 놀라울 만큼 중요하게 받아들였고, 여자아이를 결코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꾸며낸 이야기지만 진실하게 쓰면 소녀의 상실감을 다른 차원의 상상으로 채워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글을 쓸 때 세상의 모든 작가가 같은 믿음을 마음에 품듯이.
[…] 소녀에게 인형의 편지를 읽어 주었다. 편지가 거듭되면서 인형의 자아도 점차 성장해 나갔고, 학교에도 다니고,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며칠 후 소녀는 인형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잊었으며, 그 대신 카프카가 들려주는 상상 속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었다. 그 몰입이 그녀의 마음을 새로운 차원으로 바꿔 놓았다. 인형이 모험이 담긴 편지들은 카프카에게 문학 작품을 쓸 때만큼이나 진정어린 글쓰기 그 자체였다. 아이를 교묘하게 속이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허구의 이야기가 진실한 울림을 통해 생동감 넘치는 현실로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3주가 지났을 때 소녀의 슬픔은 완전히 치유되었다.
마지막 날 카프카는 마침내 베를린으로 돌아온 인형(실제로는 카프카가 소녀를 위해서 산 마지막 선물)을 손에 들고 소녀 앞에 나타났다.
소녀가 놀라며 말했다.
“내 인형과 전혀 안 닮았어요.”
카프카는 소녀에게 인형이 쓴 또 다른 편지를 건넸다.
‘내 여행이 나를 변화시켰어.’
카프카는 소녀에게 인형이 쓴 또 다른 편지를 건넸다.
‘내 여행이 나를 변화시켰어.’
어린 소녀는 행복하게 새 인형을 껴안고 집으로 데려갔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카프카는 너무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여러 해가 지나 어른이 된 소녀는 인형 속에서 카프카의 서명이 적힌 편지 한 장을 발견했다.
‘네가 사랑하는 것은 모두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지도 몰라. 하지만 그것들은 반드시 다른 형태의 사랑으로 돌아올 거야.’
이 일화는 세계 문학사에서 인간 존재의 불안한 상황을 가장 깊이 파헤친, 열에 들뜬 고독과 과민한 신경을 안고 평생을 산 작가가 보여 준 친절의 행위이다. 그것도 병에 시달리던 만년에 한 소녀의 슬픔을 승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쏟아 마법 같은 작품을 만들어 내었다. 창작에 몰두하는 것 못지않게 다른 인간과 연결되는 것, 다른 영혼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다.
민족학자이며 정신분석학자인 클라리사 핑콜라 에스테스는 말한다.
“우리의 임무는 세상 전체를 한꺼번에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이 닿을 수 있는 부분부터 손을 뻗어 나가는 것이다. 한 영혼이 슬퍼하는 다른 영혼을 돕기 위해 하는 작고 조용한 일은 큰 의미를 갖는다.”
칼 융이 말했듯이, 모든 이론을 알고 심리 기법에 통달한다 해도 한 인간 영혼을 대할 때는 단지 따뜻한 인간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상실의 깊이는 저마다 다를지라도 그 상실감은 다른 형태로 다가오는 사랑에 의해 회복될 수 있다. 불완전한 인간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인생을 받는 것이다. 인간의 사랑만이 우리 인간 영혼 생명의 씨앗으로 다른 인생을 선물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자신의 세계를 넓혀준 사람을 몇 번이나 만났는가에 따라 방향이 정해진다. 마음을 닫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불안한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인간이라는 존재의 의미는 관계에서 찾아진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카프카’를 ‘나’로 바꿔 읽는 상상을 한다. 슬픔에 젖어 있는 소녀를 위해 인형의 편지를 쓰고 있는 사람이 나 자신인 것처럼.
삶을 꽃피우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스스로 꽃을 피우는 일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의 삶이 꽃피어나도록 돕는 일이다. 당신도 나도 누군가를 꽃피어나게 할 수 있다.
‘그때’ 예수님 말씀대로 사는 내 삶의 의미와 내용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내게 이루어지리다’라고 항상 기도하며 실천에 옮기자.
스펜서 존슨의 <선물>이라는 책에서 보았던 글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은 오로지 오늘뿐 내일을 오늘로 당겨쓸 수도 지나간 어제를 끌어와 부활시킬 수 없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라. 이 순간이야말로 세상이 여러분에게 준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지금 당장, 여기 이 자리, 이 순간에 하느님 나라를 살아나아가기 시작하라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자. 그것이 실천이다. 하느님 사랑이 선물로 이 순간을 영원한 사랑으로 살아나가라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행하며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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