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기똥풀 같은 인간아!
- didimausi
- 2023년 2월 20일
- 2분 분량

나태주 시인의 ‘똥풀꽃’이란 시다.
방가지 똥풀꽃
애기똥풀꽃
가만히 이름을 불러보면
따뜻해지는 가슴
어떻게들 살아왔니?
못났기에 정다워지는 이름
방가지똥풀꽃
애기똥풀꽃
혹은 쥐똥나무
가만히 이름 불러보면
떨려오는 가슴
안쓰러움은 밀물의
어깨.
사랑하는 아기의 똥을 두고 이름을 붙인 아름답고 따뜻하고 정다운 모성애다. 건강하게 잘 살아가라고, 아기 이름이 개똥이니 분이니 이름 지어 두 손 모아 그렇게 기도한다. 이 똥의 향기, 사랑의 향기가 얼마나 사랑스러웠으면 그 조그만 똥싸개 동물의 배설물까지 애기똥풀꽃이라고 명명했겠나. 못났기에 더 정다워지며, 높고 험한 깊은 산골짜기에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애기똥풀로써 자기 생명을 다하여 생명과 사랑을 알리는 아름다운 꽃이여! 이름이야, 무엇이라 부르던지 그것은 부르는 사람의 말이다. 애기똥풀꽃은 저만치 혼자서 이름 없어도 잘만 피고 또 다른 생명의 씨앗을 맺는 지극히 평범하기 짝이 없는 보통 사람 중에 한 인간과 무엇이 다르랴.
김춘수 시인의 아름다운 ‘꽃’이라는 시도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그렇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에 핀 꽃을 ‘애기똥풀꽃’이라 부르자 하나의 똥싸개 몸짓에 지나지 않던 동물이 사랑의 꽃을 피웠다. 시인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히지 않는 그런 하나의 사랑의 눈짓이 되고 싶다. 그래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사랑으로 피어났으면 좋겠다.
바로 코앞에 있는 것만 식별할 수 있는 소년이 있었다. 지독한 근시이자 난시인 한 소년은 모든 사물을 거의 알아볼 수 없어서, 제 나름대로 세상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안과에 가서 시력을 교정하고 모든 것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소년은 그날 자신의 경험을 본당 신부님에게 이야기했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은 일 중에서 두 번째로 신나는 날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 본당 신부님은 그렇다면 가장 신나는 일이 무엇이냐고 궁금한 듯 물으셨다. 그 소년은 영성의 대가이신 균 포웰 신부에게, “그것은요, 예수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제 인생의 모든 일에 사랑의 하느님이 함께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담겨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확신하게 된 주님 안에 내가 다시 태어난 일입니다”라고 대답했단다.
그렇다. 사도 바오로가 주님 안에서 거듭 다시 태어나라고 한 것은,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항상 거듭 태어나는 사랑의 꽃이 되라 하신 것으로 묵상해본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성령의 빛에 싸여 말에서 떨어졌다. 그리곤 회개의 세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다시 태어났다. 그것이 바오로 사도에게는 첫 번째 주님 안에 태어남이었다. 그 두 번째 태어남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12장 바오로 사도의 환시와 계시에서 엿볼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뵙고 난 후 주님의 힘은 약함에 온다는 것, 그래서 그 약함으로 재난도 박해도 역경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자신의 몸에 박힌 가시는 늘 자만하지 말라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며 자신의 환시 이야기를 들려준다. 두 번째 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사도 역시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 사랑의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고백이다. 사도 바오로는 그러한 정화의 시간을 거친 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필리 1,21)라고 말한다. 이는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말로, 주님 안에 거듭 태어난 사람의 모습이다.
인간은 짐승처럼 울면서 태어났으나, 사랑으로 이름이 불려지고, 사랑으로 보살핌을 받고 거듭 태어난다. 마찬가지로 영원한 사랑의 주님 안에 거듭 태어날 수만 있다면, 그 때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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