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돕는 자는 하늘도 돕는다
- didimausi
- 2023년 7월 28일
- 4분 분량

나는 누구이고 무엇이냐,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인간 삶과 의미와 목적에 관한 것이다. 나는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자주적이며 독립된 생명체다. 자주적이고 독립적이라는 말은 남의 도움 없이 스스로 주체적으로 자기 일을 해나가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스스로 자기완성에 이를 자주·독립적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인간이 주체적으로 설 때만이 하늘도, 하느님이 완전하심 같이 완전한 자가 되도록 도와주신다.
안병욱 선생이 쓴 철학에세이 <삶의 완성을 향하여>(철학과현실사, 1994)에 ‘스스로 돕는 자’(53-56쪽)에 나오는 이야기를 나눈다.
인도의 위대한 영도자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가 배워야 할 인생의 제일과(第一課)는 무엇이냐, 내가 나를 믿고 내 발로 서서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마하트마란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위대한 영혼(靈魂)이란 뜻이다. 마하(maha)는 크다는 것이요, 아트마는(Atman)는 영혼이라는 뜻이다.
인도의 유명한 시인 타고르(R.Tagore 1861~1941)가 간디의 생일날 간디를 찬미하는 시를 썼을 때 ‘위대한 영혼 간디’라고 예찬했다. 그 후부터 인도인들은 간디를 부를 때 마하트마라고 하였다. 간디의 이름은 원래 카라므챤드 간디(Karamchand Gandhi)다.
진실(眞實)과 비폭력(非暴力)의 사상을 가지고 인도 독립운동을 영도한 간디는 참으로 위대한 영혼이었다. 간디는 인도의 영원한 진주요, 불멸의 보배다. 나는 간다의 무덤과 간디의 수도원(修道院)을 보면서 과연 ‘마하트마다’라고 감탄했다. 우리는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자립자강(自立自彊), 자주자활(自主自活), 자각자영(自刻自營)의 철학을 먼저 배워야 한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골다 메이어(Golda Meir 1898~1978) 수상(樹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운명(運命)이 타인에 의해서 좌우되어서는 안된다.”
여성으로서 이스라엘 독립운동 등에 헌신한 메이어 수상은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여성 정치 지도자의 한 사람이다. 세계의 여러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 민족만큼 가혹한 고난(苦難)의 십자가를 지고 산 민족은 세계사에 일찍이 없었다. 자기의 운명을 자기의 손으로 결정하고 자기의 힘으로 개척해야 한다. 나의 운명이 남의 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수치스럽고 슬픈 일이다. 네가 네 운명의 주인이 되어 네 힘으로 네 미래와 진로를 개척하여라. 이것이 자주독립인(自主獨立人)의 기본자세다.
자조(自助)의 원리를 가장 강조한 것은 영국의 문필가 사뮤엘 스마일즈(Samuel Smilse 1812~1904)다, 스마일즈는 원래 의사였으나 문필가로 대성하였다. 1859년 스마일즈는 자조론(自助論, Self-help)을 썼다. 이 책은 영국인에게 큰 감동과 용기를 주었다. 그 후 스마일즈는 문필에 주력하여 「성격」(性格 Character 1859) 「의무」(duty 1880) 「인생과 근로」(Life and labour 1887) 등의 명저를 발표했다.
19세기의 영국인들은 스마일즈의 자조론을 읽고 많은 감명을 받아 근검절약(勤儉節約)하고 분투 노력하는 자주독립의 국민이 되어 영국을 19세기 세계최강(世界最强)의 나라로 만들었다. 스마일즈가 강조한 자조독립(自助獨立)의 사상은 영국을 일으킨 커다란 정신적 지주(支柱)가 되었다.
이 책은 세계 수십 개 나라에 변역되어 널리 읽혔다. 지금도 자립사상(自主獨立)의 고적으로 애독되고 있다. 일본의 뛰어난 선각자요, 계몽 사상가요, 영국 유학생이었던 나가무라 게이우(中林 敬宇)는 영국 유학을 하고 돌아오면서 이 책을 구입하고 변역하여 「서국입지론(西國立地論)」이라는 책 제목으로 출판했다.
1871년 명치 4년에 변역된 이 책은 그 당시에(그때 일본의 인구는 3500만에 지나지 않았다) 백만 부를 돌파하여 일본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자주독립의 슬로건은 일본 국민을 분발향상(奮發向上)시킨 정신의 큰 등불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6, 7년 전에 이 책이 변역되었지만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이 책은 자기단련(自己鍛鍊)의 명저요, 정신수양(精神垂楊)의 교과서요, 심전경작(心田耕作)의 고전이다.
자주독립이란 말은 자주와 독립의 두 낱말의 복합어다. 자주란 무엇이냐, 내가 남의 간섭과 압력을 받지 않고 내가 주인이 되어 나의 힘으로 나의 운명을 개척하는 것이다. 독립이란 무엇이냐,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내 발로 혼자 서는 것이다. 자주의 반대는 의존(依存)이요, 독립의 반대는 굴종(屈從)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심 같이 너희도 완전한 자가 되라는 말씀은, 스스로 완전한 자가 되려고 최선을 다한 뒤 하느님의 도움, 성령의 은총으로 그 일을 이룬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가 아이를 갖게 된다는 엄청난 소식을 접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이 늘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던 마리아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면서, ‘이 몸은 주님이 종이오니 주님 뜻대로 이루소서’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의 도움으로 여인 중에 가장 복된 믿음과 사랑의 어머니가 되었지만, 성모 마리아의 앞길은 슬픔 그 자체였다. 성전에 아기 예수님을 봉헌할 때 시메온 예언자는 성모 마리아는 영혼이 칼에 꿰 찔릴 것이라 말한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루카 2,34). 인간의 역사, 하느님의 역사 안에서 아들 예수님의 스스로 돕는 자의 운명에 같이하실 어머니는, 이제 모든 여인 중에서 가장 복된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셨다.
구약성경은 참 하느님과 참 나의 발견을 히브리 민족의 출애굽 역사, 해방의 여정을 통해서 보여준다. 탐욕의 덩어리, 금송아지를 섬기는 백성에게 모세는 늘 참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참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어쩌면 참 나를 발견하는 것일 것이다. 모든 속박과 억압에서 나를 풀어주실 하느님은 인간의 탐욕으로는 찾아낼 수가 없었다. 금송아지가 하느님일수는 없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는 온 이스라엘 지파를 세겜으로 소집하여 어떤 신을 섬길지 선택하라고 요구한다. 그 유명한 세겜집회다. 그들 조상들 시대에는 자신이 만들어서 자기들만 돕고 해결할 수 있는 낯선 여러 신을 찾아 숭배하였다. 야훼 하느님을 저버리는 우상숭배였다.
자기 자신 밖에서 주입되는 여러 가지 낯선 관념들은 우리를 옭아매고 구속하고 분열시킨다. 그런 우상을 숭배하는 한, 자기 스스로 자기를 돕고 그런 자를 도와주시는 우리 안에 살아계신 유일한 하느님을 섬길 수는 없다.
여호수아는 낯선 여러 신을 섬길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돕는 자를 도와주시는 유일하신 전능하신 하느님을 섬길 것인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한다. 즉, 밖에서 나에게 주입되고 강요된 여러 낯선 생각들, 다시 말해서 내가 필요하고 요청되는 내가 만든 우상을 추종할 것인가? 아니면 내 가슴 깊은 곳에 살아있는 영혼을 이스라엘 히브리 민족이 출애굽 역사에서 체험한 야훼 하느님을 선택할 것인가?
참 하느님에게서 참 나를 찾아가는 선택은 여호수아가 우리 각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선택은 자기 스스로 돕는 각자의 몫이다. 이는 바로 나는 누구이고 무엇이냐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인간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대답도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한 민족이 되어 가는 출애굽 해방의 역사 이야기를 한 사람이 자기소외(자아상실)에서 탈출하여 참 자아를 발견하기까지의 기나긴 자기 해방 여정에 대한 상징적 역사 진리 이야기로 이해할 때, 이스라엘 민족 종교 메시지는 인간을 구원하고 자유롭게 해방하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될 것이다(이성우, <나는 나다>, 성서와함께, 2004, 226-227쪽 참조).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 은총의 질그릇으로 자기 자신을 비유하였다. 바오로는 주님의 은총이 항상 내게 차고 넘쳤다고 했다. 이는 인간이 자기 스스로 자기를 돕는 질그릇의 사명과 역할을 다할 때, 주님의 은총이 내게 항상 차고 넘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깨진 그릇에 물 붓기가 아니다.
또한, 사도 바오로는 당신 자신 안에 항상 차고 넘치는 은총인 하느님 사랑을 다른 모든 인간의 질그릇에 퍼 날랐다. 그것은 늘 바오로의 기쁨이고 자랑이었다.
“우리는 이 보화를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힘이며 결코 우리에게서 솟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실상 우리는 갖은 환난을 다 겪어도 곤경에 빠지지 않고, 가망이 없어도 실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죽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은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드러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실상 살아 있는 우리가 늘 예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는 것은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드러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7-11).
이는 바오로 사도가 늘 말하듯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시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그때에 스스로 돕는 자는 하늘도 돕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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