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것을 따라가라. 네가 갈 길을 찾아 얻으리라!
- didimausi
- 2024년 5월 30일
- 8분 분량
어느 누군가가 ‘지금까지 살면서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후회되는 일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후회되는 일은 나 자신의 회개로서,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인 다른 인생의 길을 찾아 얻지 못한 일이다.” 즉, 지금 당장 여기 이 순간에 나의 회개를 결단하여 실천하지 못하고 나중에 하면 된다는 생각에, 내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인 다른 인생을 찾지 못하는 현실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사람은 힘든 시기일수록 마음속에 사랑하는 어떤 것을 품고 다녀야 한다. 그 사랑하는 어떤 것이 늘 회개 생활로 이끌어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인 다른 인생의 길로 우리를 구원한다.
내 안에 항상 사랑의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다. 그 사랑의 불은 다른 사람 안에 불을 지르는 열정인 것이다. 만일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며 영혼들의 교차로에서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나려는 영혼과 엇갈려 만나면 그 영혼에 이렇게 말하리라. “그대가 진정 사랑하는 것에 이상한 끌림이 있다면 말없이 따라가라. 그러면 당신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인 당신의 다른 인생을 찾아 얻어 살 것이다. 그러면 하루하루가 당신이 생각한 당신의 인생이 아닐 것이다. 당신 자신 생각의 감옥 속이 아니라, 다른 세상의 해방된 인생을 살게 될 테니까 말이다.” 류시화의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라는 책에서 ‘사랑하는 것을 따라가라.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123-125쪽)라는 글을 인용해본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젊었을 때, 한 여자가 그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칸트가 청혼해 주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칸트는 만날 때마다 철학적인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고 느낀 여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저와 결혼해 주세요.”
그러자 칸트는 말했다.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나는 생각하는 일을 거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도서관에 가서 사랑과 결혼에 관한 책에 집중했다. 그리고 결혼에 찬성하는 354가지 이유와 결혼에 반대하는 350가지 이유를 노트에 기록했다. 그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며, 결혼에 찬성하는 이유 쪽에 4가지가 더 많았으므로 마침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칸트는 여자의 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고, 그녀의 아버지가 나와서 말했다.
“내 딸은 이미 결혼했네. 아이가 둘이나 있지. 그동안 자네는 대체 어디에 있었나?”
그가 결혼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3년이 흐른 것이다. 그 후로 어떤 여자도 칸트에게 청혼하지 않았고, 그는 평생 미혼으로 남았다.
우리가 생각에 붙들려 있을 때 삶은 흘러간다. 삶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으며, 그런 식으로 삶을 놓친다. 우리가 가서 문을 두드리면 그녀는 이미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있다. 오늘을 놓치면 이미 놓친 것이다. 모든 사랑이, 여행이, 불꽃이 그렇게 생각과 합리적인 판단과 비교 속에서 사라진다.
셰이크 사난은 페르시아의 경건하고 존경받는 학자였다. 이날 그는 독특한 꽃과 과일로 가득한 정원을 발견했다. 특히 잘 익은 석류가 매달린 아름다운 나무에 매혹되었다. 사난은 언제나 이 나무의 열매를 맛보고 싶었지만, 나중에 시간이 충분할 거라고 생각하며 망설였다.
사난이 계속 미루는 사이 며칠이 몇 주가 되고 몇 주가 몇 달이 되었다. 그는 나무가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일들에 몰두했다. 그러나 시간과 상황이 예기치 않게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어느 날 마침내 그 나무를 찾아가기로 결심한 사난은 실망스라운 광경과 마주했다. 한때 잘 익은 석류가 풍성했던 나무가 시들어 죽어 있었다. 가지가 메마르고 아름다움은 사라져 버렸다. 시난은 큰 후회와 슬픔에 젖었다. 뒤로 미루는 바람에 석류를 맛볼 기회를 놓친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기다리는 동안 인생은 지나간다.
미루는 행동의 결과를 깨달은 사난은 시간의 덧없는 속성과 기회가 왔을 때 붙잡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숙고했다. 이 학자처럼 우리는 하지 않은 일로 인해 더 많이 절망한다. 가장 아픈 말 이것이다.
“그것을 시도했어야만 했는데.”
자신의 노래가 자신 안에 그대로 남아 있는 채로 죽어서는 안 된다. 루미는 썼다.
“그대가 진정 사랑하는 것의 이상한 끌어당김에 말없이 따라가라. 그러면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 사는 길만이 아니라 저 세상 사는 길 이승 길도 잃고 지옥에 떨어진 수많은 길잃은 영혼들은 ‘사랑하는 일을 미루지 말걸, 말걸’ 하는 말로 아무리 후회해도 때는 늦어 영원히 사는 길을 잃어버린다. 사랑하는 때를 미루고 잃으면,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때가 온다고 보장할 수 없다. 전능하신 하느님 사랑이 놓으신 사랑의 불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시 놓지 않으면, 내 사랑의 불 자체도 영원히 꺼져버릴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내 안에 타오르는 사랑의 불을 놓지 않는다면, 그 사랑의 불을 꺼지게 마련이다. 성령의 불은 사랑하는 사람 안에 불이 타오르게 놓아야, 내 안에 다시 성령의 불이 댕겨진다. 내 안에서 타오르는 사랑의 열정, 다른 사랑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려는 그 열정, 사랑의 불을 끌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그 아무것도 없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 사랑의 불에서 세상 그 어느 것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한다고 하셨다. 하느님의 사랑의 불을 놓으러 오신 그 주님 사랑의 불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것은 없다. 나 자신 안에 불을 놓으신 그 불이 계속 타오르게 하는 길을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 계속을 불을 질러야 한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처럼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성화처럼 활활 타올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의지 안에서 의식적으로 깨어 있는 세 가지 행동 방식이 있다고 우리 시대의 영성가 에크하르트 톨레는 말한다. 받아들임이 먼저인데, 받아들임이란 지금, 이 순간, 이 상황에 나에게 그 일을 하라고 요구함으로써 기꺼이 그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적어도 상대자를 사랑하겠다는 의지와 지향으로 즐거움을 느끼고 사랑하겠다는 받아들임이 있어야 한다. 만약 자신이 하는 일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즐길 수도 없다면 중단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정말로 책임져야 할 것, 또한 진정으로 중요한 것에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의식상태이다. 자신의 의식상태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은 자신 삶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이 즐겁지 않으면 내 집은 감미롭고 가볍다는 사랑의 집이 아니다. 세 번째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
열정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깊은 즐거움을 느낌과 동시에 목표와 비전의 요소가 더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하는 일의 즐거움에 목표가 더해지면 에너지 장 또는 진동 주파수가 변화한다. 즐거움에 우리가 구조적 긴장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 어느 정도 더해져서 열정으로 바뀐다. 열정에 의해 연료를 공급받은 창조적인 활동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엄청난 강도와 에너지가 동반될 것이다. 당신은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그리고 그 여행을 즐기는 화살처럼 느낄 것이다.
스트레스와 달리 열정은 에너지 진동 주파수가 높기 때문에 우주의 창조적 힘과 공명한다. 랄프 왈도 에머슨이 “열정 없이는 어떤 위대한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말한 이유이다. 열정enthusiasm이라는 단어는 고대 희랍어의 ‘안’을 뜻하는 ‘엔en’과 ‘신’을 의미하는 ‘테오스theos’에서 유래한 말이다(‘내재하는 신a Godwithin’, 즉 ‘내 안에 신을 둔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단어 엔토우시아제인enthousiazein(신적 영감 상태)은 ‘신에 사로잡힌’의 의미이다. 열정에 불타고 있을 때는 자기 혼자서 모든 것을 해야만 할 필요가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열정은 창조적 에너지의 물결을 불러들이기 때문에 당신은 다만 그 ‘물결에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
한마디로 내 안의 열정은 전능한 하느님 사랑의 성령으로 내 안에 불을 놓은 사랑의 열정이 내 안에 타올라 불타고 있다는 것이다.
열정을 통해 당신은 외부로 향하는 우주의 창조 원리와 완전하게 연결되지만, 그 창조 행위와 자신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그곳에 에고는 없다. 동일화가 없다면 고통의 큰 근원 중 하나인 집착도 없다.
창조적 에너지의 물결이 지나가면 구조적 긴장은 다시 줄어들고, 자신이 하는 일에서 느끼는 기쁨은 남는다. 누구도 열정 속에서만 일생을 보낼 수는 없다. 하나의 물결이 지나간 뒤, 나중에 또다시 새로운 창조적 에너지의 물결이 찾아와 새로워진 열정으로 인도할 것이다.
형상의 소멸을 향해 돌아가는 운동이 시작되면, 열정은 더 이상 당신에게 봉사하지 않는다. 열정은 외부로 향하는 삶의 주기에 속한다. 오직 받아들이는 항복을 통해서만 돌아가는 운동, 즉 집으로 가는 여행과 자신을 맞출 수 있다.
정리하면 이렇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즐겁게 하고, 그것이 목표와 비전과 결합하면 열정이 생겨난다. 목표가 있다 해도 관심의 초점은 현재 순간에 하고 있는 일에 머물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주적 목적과의 연결에서 이탈하게 된다. 비전이나 목표가 영화배우나 유명 작가나 부유한 사업가가 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의 부풀린 이미지, 즉 숨은 에고의 형태는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 또 그 대신, 목표는 반드시 역동적이어야 한다.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활동을 통해 다른 인간 존재들뿐 아니라 전체와 연결될 수 있는 일에 초점을 향해야 한다. 유명한 배우나 작가 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보는 대신, 자신의 작품을 통해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보아야 한다. 그 활동이 자기 자신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고 깊어지게 하는가를 느껴야 한다. 자신은 하나의 문이며,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은 모든 생명의 원천에서 나온 에너지가 그 문을 통해 모두를 위해 흘러가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표와 비전이 자기 자신 안에서, 즉 마음과 느낌 차원에서 이미 현실이 되어 있을 필요가 있다. 열정은 마음속 청사진을 물질 차원으로 옮기는 힘이다. 이것이야말로 마음을 창조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며,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아무 결핍감도 욕망도 개입하고 있지 않다.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나타나게 할 수 없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만을 나타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힘든 노동과 스트레스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새로운 지구의 방식이다.
마음을 창조적으로 사용하고 의식을 통해 형상을 나타나게 하는 열쇠를 예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우리에게 주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열정이 없는 사람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성령, 사랑의 불이 꺼져간다. 사도 바오로의 지적대로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한낱 쓰레기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신 그 불이 내 안에 항상 타올라서 나 자신도 이 세상에서 불같은 열정을 갖고 사람들을 사랑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인면수심의 범죄, 강해 보이기 위해 살해했다는 변명, 살인이 어떤 것인가 해 보고 싶어서 사람을 죽였다는 인간들. 그들은 자신 안에 놓인 전능하신 하느님 사랑의 불길을 다 꺼버린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그렇게 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제아무리 디지털, 가상공간의 세상이라지만, 게임의 살생게임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가.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면 재만 남으리라’라며 노래 부르던 시절이 아련하다. 사랑하는 사람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려 자신을 남김없이 태우리라던 아날로그 시대의 사랑을 노래하던 추억이 있다. 김동명의 ‘내 마음은’이란 노래를 즐겨 부르던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 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 없이 타오리다
(이하 생략)
사람들은 갈수록 이 세상 살아가기가 힘들기만 하다고 말한다. 힘든 시기일수록 마음속에 사랑의 불이 타올라야 한다. ‘내 집은 감미롭고 가볍다’라고 하신 주님의 사랑만이 이 험한 세상을 감당할 힘을 주신다. 내 안의 주님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으면, 내 삶의 무게는 감미롭고 가벼워질 것이다. 내 등 뒤에만 지고 가면서 주체하고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삶의 짐만 지고는 살아가기 힘들어진다. 사랑하는 것을 따라가라!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느 누군가 인간 안에 사랑의 불을 놓아서 함께 살 수 있는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빈센트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위대한 대가들이 결코 양보할 수 없었던 것에 주목하여야 한다. 신은 하나의 작품을 통하여, 한 권의 책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세계와 자연은 신의 현존을 드러내는 암호와 같고, 철학자란 그 암호를 해독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사유를 중세철학자들은 유비적(analogique) 사유라고 하였다.
만일 우리가 세계와 인생을 유비적인 눈으로 볼 수 있다면 하느님의 뜻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고, 매일의 삶에서도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의 뜻이 우선적으로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Deus caritas est, 1요한 4.8) 때문이다.
단테의 한평생은 베아트리체와 사랑이라는 화두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아직 어린 나이에 한 소녀를 향한 사랑에 빠졌고, 이후의 삶은 그 사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의 모든 작품의 한가운데에도 사랑이 자리한다. 인생의 만년에 이르러 세상에 대한 절망으로 모든 삶의 희망을 상실하였을 때 그를 구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평생 간직해 온 그 사랑이었다.
단테 스스로가 고백하였지만, 그 고백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 사랑이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고귀한 무엇인가를 평생토록, 죽음에 이르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간직할 수 있다는 것. 이는 단순한 인간적인 열정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오상의 성 비오 신부는 “모든 진정한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1요한 4.7 참조)라고 하였다. 우리는 단테의 사랑을 보며 이 말이 진실임을 실감할 수 있다.
사랑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상승하는 것이다
‘사랑’만큼 다양한 의미를 품은 단어도 없을 것이다. 과학철학자인 가스통 바슐라르는 연금술사들의 물질에 대한 사랑을 놀라운 방식으로 해명하였으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모든 존재하는 것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였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으로 하여금 저편 세계까지 사랑하게 하는 사랑(에로스)에 대하여 말하였고,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모든 인간의 정념의 근원이자 원인으로서의 사랑(카리타스)에 대해 말하였다. 시몬 베유는 “사랑만이 삶의 가장 불행한 밑바닥에까지 우리를 내려갈 수 있게 한다”고 하였고, 피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는 “세상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해 줄 수 있는 것이 곧 사랑의 힘”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깨달음들에 공통되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사랑이 우리의 영혼을 위로 향하게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랑이든지 사랑은 항상 우리에게 ‘비상을 꿈꾸게 하고’, ‘더 큰 가치를 지향하는 것’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Dilige, et fac quod vis)라고 말한 것이다. 대상이 무엇이든 진정한 사랑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 이르지 않고서는 상승하기를 멈추지 않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테의 사랑이 가장 소박한 인간적 사랑에서, 정중한 기사도적 사랑을 거쳐, 뮤즈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되어, 마침내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품 안에 이른 것은 영적인 눈으로 보자면, 자연스러운 상승이고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단테 역시 그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위험천만한 작업물일 수 있는 「신곡」을 쓰면서 그에게 유일하게 위안과 용기를 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 일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는 믿음이었으리라.
아무리 그 작품이 다만 ‘알레고리’이자 ‘풍자’라고 해도, 과거에 유명했던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존경을 받았던 사람들이 어쩌면 그들의 가족과 지인들이 아직 눈을 부릅뜨고 살아 있었을 시기에 사실은 지옥에서 생전의 온갖 죄악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내용은, 범상한 작가라면 도저히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단테는 그의 말년에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는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그러했기에 오히려 단테는 오직 신의 사랑을 받고, 천국의 천사들만이 그를 벗으로 하는 복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사랑에 빠진 단테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 <경향잡지> 2024, 2월, 69-71쪽).
모든 시대에 승자독식의 밀림, 오직 동물적 본능만 남은 정글의 약육강식, 야만의 시대에 오직 인간 사랑으로만 살다가 간 역사적 인물 예수 그리스도. 앞서 인용한 글처럼, 단테의 <신곡>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랑의 노래를 부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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