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아는 게 아니라 행동하는 것!
- didimausi
- 2024년 2월 13일
- 5분 분량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다만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행함의 시작이다. 행동은 앎의 완성이다. 성인은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을 하나라고 가르쳤다. 다만 어쩔 수 없이 지행(知行)을 나누어 설명할 뿐이다.(왕양명, <전습록(傳習錄)>
중국 당나라에 백낙천(白樂天)이란 시인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느 날 도림(道林)이라는 유명한 스림을 만납니다. 백낙천은 스님에게 마음에 새기고 살아갈 법(法)을 청합니다. 선사가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착하게 살라’고 말하죠. 백낙천이 실망해서 말합니다. “아니, 그런 말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말 아닙니까?” 선사가 대꾸합니다. “이보게. 그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지만, 팔십 먹은 노인도 행하기 어려운 것이라네.”
복음에서 만나는 율법학자는 머리로는 율법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온 정신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닥도 그가 그렇게 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사랑은 알고 인식하는 차원이 아니라 행동하는 차원입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알고 있다면 가서 그렇게 행동하고 실천하세요.”
샤를 드 푸고는 말합니다. “복음은 읽는 것만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오직 이를 행할 때만이 이해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진리는 이미 다 말하여졌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행하고 있지 않을 뿐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그는 지금 자기를 중심으로 놓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사실 사랑을 알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을 들려주며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강도 당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이 누구입니까?” 중요한 것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고통당하는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는 일이라는 것이죠. 고통당하는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는 일이 바로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지만, 여든 먹은 어른도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어렵더라도, 그래도 알고 있으니 이제 행동하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게 이웃 사랑일 것입니다.
(‘모든 것 안에 축복이 있습니다’, 박신부의 묵상 산책, 149-152쪽)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천지 차이로 천당과 지옥살이를 하게 하는 기준이 된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두고 회칠한 무덤 같다고 하시면서, 독사의 자식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고도 하나도 실행에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천이 없는 그들의 모습은 타인에게는 악표양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다 안다. 이제 내가 아는 것만으로 다 되었다’라면서 자기가 아는 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 사람은 전혀 사랑이 없는 사람이다. 안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정비례로 서로 상승하여야 한다. 사랑하기 위해 알게 해주시고, 알기 위해 사랑하게 해 달라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기도가 다시 떠오른다.
인간의 교만과 자기중심의 이기주의,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관철하려는 아집이 우리 사랑의 실천을 가로막는다. 이를 우리 신앙인의 언어로 말한다면, 인간에 대한 사랑은 십자가의 자기 희생과 자기 헌신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사랑과 앎을 위한 청원기도는 결국 사랑의 실천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의미 없이 울리는 징과 같을 뿐이라 말한 바오로 사도를 떠올리게 한다. 사랑만이 모든 것을 완성한다.
인간의 사랑이란 서로 주고받는 행위 안에서만 알 수 있다. 사랑은 아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야고보서의 말씀을 나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그대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습니까?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마귀들도 그렇게 믿고 무서워 떱니다. 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실천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싶습니까?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칠 때에 실천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대도 보다시피,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느님의 벗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보다시피,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창녀 라합도 심부름꾼들을 맞아들이고 또 그들을 다른 길로 내보냈을 때에 실천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26).
구약성서는 하느님의 말씀과 행업을 기록한 구원의 역사서이다. 하지만, 신약성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하시며 행동하고 실천하신 강생육화 영성생활의 기쁜 소식이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은 행동, 실천의 모범이었다. 최후만찬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이 예를 행하고 가서 행하라’라고 하신다. 우리의 미사도 그렇다. 미사 후 일상으로 돌아가 주님을 기억하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을 뛰어넘는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셨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이 누구인가? 중요한 것은 누가 우리 이웃인가, 라는 질문이 아니라,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에게 이웃사랑을 실천하여 그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어 주는 일이다. 고통받는 이를 외면하는 사제나 율법학자가 아니라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이 자신이 아는바, 그 사랑을 실행에 옮겼다. 그만이 고통받는 이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
나의 이웃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을 이웃사랑으로 보여주는 이들이 그들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당신의 사랑을 주고받고 사랑으로 응답하는 실존으로 창조하셨다. 따라서 누구든 서로 사랑의 대상인 이웃이 되어야 한다. 이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 그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랑의 나눔, 곧 하느님 사랑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는 것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는 것이다. 언젠가 오늘의 묵상에 적어 두었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생각난다(루카복음을 읽으면 생각나는 이야기, 백성호 엮음, 6-9쪽).
판관기는 이스라엘을 구원한 영웅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숭배를 한 결과로 주변 국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그들이 뉘우치면 하느님은 판관을 보내어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런 내용이 반복되는 형식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한 영웅들의 이야기가 판관기입니다. 판관들의 특징은 평소에는 보통 사람과 같다가 하느님의 영을 받는 순간, 하느님께서 마음에 두고 계시는 일은 그것이 예언이든, 전쟁이든, 무엇이든지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전쟁에서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전승을 거둔 후에는 다시 보통 사람이 됩니다. 판관들은 처음부터 영웅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영웅이 되었습니다.
1923년 뉴욕 양키스에 입단한 루 게릭은 14년 동안 2,130게임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연속 출전하는 대기록을 달성하며 미국의 야구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1937년 그는 소아마비에 걸린 열 살짜리 소년이 재활 치료를 거부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자신의 영웅을 만난 소년은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가 소년에게 치료받기를 권하자 소년을 말했습니다.
“아저씨가 저를 위해 홈런을 하나 쳐주시면 저도 걷는 법을 배울게요.”
루 게릭을 꼭 홈런을 치겠다고 약속하고 경기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게릭은 홈런을 두 개나 처서 소년에게 힘찬 응원을 보냈습니다.
2년 뒤, 게릭은 근육이 마비돼 죽음에 이른 병에 걸렸습니다. 그해 7월 미국 독립기념일에 6만여 명의 관중은 양키 스타디움에 모여 특별한 은퇴식을 열어 게릭에게 존경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2년 전에 만났던 소년이 목발을 내던지고 걸어와 그에게 안겼습니다. 그는 소년을 안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라는 고별사를 남긴 뒤 야구장을 떠났습니다.
은퇴하고 2년 후인 1941년 루 게릭은 38세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등번호 4번은 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영구결번이 되었습니다. 게릭이 앓았던 근위축성측삭경화증은 훗날 그의 이름을 따서 루게릭병으로 불렸습니다. 루게릭병 협회는 뛰어난 업적을 이룬 환자들에게 그의 이름을 딴 상을 수여하며 그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이렇듯 영웅은 자신보다 누군가에게 더 큰 무엇을 해주는 사람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을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인 요셉의 의로움 때문도 아니고 마리아의 처녀성 때문도 아닙니다. 순전히 하느님의 은총 덕분입니다. 복음은 마리아가 자신이 거룩하고 덕이 있어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시는 은총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마리아는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명에 따라 은총이 가득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가장 행복하시다고 가브리엘 천사의 찬미도 있었다.)
(성 마리아 어머니같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나 자신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우리도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복음에서 마리아가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highly favored) 사람입니다. 이 은총으로 우리 모두 기쁜 마음으로 나 자신보다 누군가에게 (성모 마리아같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사랑같이 무엇을 해주는 영웅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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