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직한 목자상 - 원로사목자 안충석 신부와의 ‘만남’ II
- didimausi
- 2024년 7월 9일
- 10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7월 10일
파견•선교공동체로서 본당,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 맛보기
안: 은퇴하고 난 뒤, 교사를 하던 일원동성당 한 여교우가 “학교에서 인생 선배로서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해 주곤 했는데, 신부님 주일미사 강론이 많 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 강론을 듣지 못하게 되어 아쉽네요. 그동안 신부님 강론, 고마웠습니다”라고 말해주더라고요. 오히려 나는 내 강론을 들어준 그 교우에게 한없이 감사했지요. 사제의 삶은 하느님 말씀으로 사는 일상의 연속입니다. 주일미사 전례의 중심도 하느님 말씀, 예수님의 기쁜 소식이지요. 그 말씀을 본당생활에 적용하려 했던 것이 나의 본당사목이었 다. 내 사목의 중심은 늘 우리와 함께 살아가셨던 역사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예수님같이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아 완성해 나 아가는 신앙공동체,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 파스카-부활 신앙의 공동체였 습니다. 그러한 본당공동체의 내용을 채우는 것은, 시대적으로 이 땅의 인 간화, 복음화, 민주화였습니다. 1970~80년대 군부독재 시절에는 더욱 그 러했지요. 나의 사목은 본당의 전례생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본당에서 세 례를 주고 장례미사만 지내는 사목이 아니라, 본당 울타리 밖 세상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사는 모습을 보려고 했어요. 성당의 제단 안에서 성사생활을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생활화하는 영역으로 되돌리려고 노력한 것 입니다. 성당의 인간해방과 전인적 구원에서 본당과 세상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하느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 느님은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시죠(마르 12,27). 그래서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 사는 맛을 보면서 항상 새롭게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야만 합니 다. 본당사목하면서 늘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강조를 했어요. 오: 앞서 본당신부로서 실천하셨던 사목의 신학적 기초를 듣는 느낌입니다. 오랜 사목 연륜에서 나오는 목자상인 것 같습니다. 계속 말씀해주시지요. 안: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을 묵상하면서, 예수님 제자들의 초대교회로 돌아 가 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가족애, 형제자매 애를 지녔습니다. 이 사도들의 공동체가 요셉, 마리아, 예수님의 성가정 생 활공동체와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나는 그 모습을 늘 이상적 본당공동체상 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가족애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의 기쁨은 널리 퍼져 야 했고, 그것은 사도 바오로의 파견/선교 공동체상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 다. 그런데 오순절 제자공동체, 바오로 사도 공동체의 원모델은 늘 착한 목 자 예수님이지요. 자기 양들과 소통하며, 양들을 지키는 목자, 자신의 생명 과 모든 것을 바치는 목자의 사랑, 그렇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이 세상 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본당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공동체가 보여주는 성사생활입니다. “이는 내 몸이니 너희는 받아먹으라”며 자신을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이기 때 문입니다.
오: 신부님이 생각하시는 본당공동체는 앞서 말씀하신대로 사도들의 초대 교회와 지중해 연안을 돌아다니면서 그리스도교를 정초한 바오로 사도의 ‘파견공동체’라는 교회관에 바탕을 두신 것 같습니다. 이제 본당신부와 신자 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죠.
안: 프랑스의 레옹 블루아라는 작가가 쓴 개종일기를 보면, 아주 강하게 얘길 합니다. 성인이 아닌 신자는 모두 돼지라고 말이지요. 자기만을 위한 신부, 내 뜻에만 맞는 신부만을 찾는 교우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응한 신부는 돼지우리에 갇힌 우리신부입니다. 성서에서 악령은 예수님께 자신들을 괴롭 히지 말고 돼지 무리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는 청을 합니다. 그리곤 비탈 을 달려 모두 호수에 빠져 죽고 맙니다(마르 5,1-20).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본당신부가 교우들 비위나 맞추고, 인기만 누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에요. 그건 돼지 떼가 물로 뛰어들 듯 신자들을 데리고 바다로 뛰어드는 격입니다. 목자가 양들을 살리는 푸른 풀밭으로 나아가야지, 죽음의 바다로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좁은 시야를 갖고 우리 안에 갇혀있는 사목은 좋지 않 습니다. 교회 밖 세상에서 길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것이 강생육화를 살아가는 사목입니다. 본당사목은 그만큼 막중하여, 늘 조심하고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기 위해 노력하면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생 각하고 선택하고 판단하여,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답해야 하지요. 주님의 말씀대로 그 이상의 것은 거짓임을 명심해야 합니 다. 그런데,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을 겸하면서 사목을 하다 보니, 정치와 교 회는 분리되지 않았느냐, 왜 사제가 정치에 참여하느냐는 말을 많이 들었어 요. 그럴 때마다 나는 하느님은 정치와 교회가 분리된 인간만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사랑하셨으며, 전인적 구원을 원하시지 않았느냐며 반문하곤 했지요. 특히 요즘같이 진영논리로 상대를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다는 세상, 그리고 대한민국수호천주교신자모임, 일명 대수천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더 들어요. 사제가 그들이 원하는 길로 가지 않는다고 옷을 벗긴다느니 하면서 막말도 서슴지 않아요.
오: 그렇지요. 대수천의 언행은 상당히 심각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적으로 봐도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정치적이고, 신앙인의 행동이라 할 수 없지요. 눈먼 양들이 목자에게 달려드는 격입니다.
도전의 연속이었던 본당신부 생활
안: 지상의 예수님께서 33년을 살아가신 그 길을 따라 순례단을 안내하다 보면 사목자로서 많은 묵상을 하게 됩니다. 어느 날 버스 창문 너머로 비치는 풀밭과 양 떼를 보게 되면, 앞장서 가시는 목자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을 떠올립니다. 양들은 바로 자기 앞에 있는 한 마리 양들만을 볼 수 있는 지독한 근시이기 때문에 산비탈로 가는 길이 지그재그로 한줄로 나있는 흔적을 보게 됩니다. 양이 길을 잃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는 거죠. 그래서 목자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목자를 따르지 않고 길을 잘못도전의 연속이었던 본당신부 생활 안: 지상의 예수님께서 33년을 살아가신 그 길을 따라 순례단을 안내하다 보면 사목자로서 많은 묵상을 하게 됩니다. 어느 날 버스 창문 너머로 비치 는 풀밭과 양 떼를 보게 되면, 앞장서 가시는 목자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을 떠올립니다. 양들은 바로 자기 앞에 있는 한 마리 양들만을 볼 수 있는 지독한 근시이기 때문에 산비탈로 가는 길이 지그재그로 한줄로 나 있 는 흔적을 보게 됩니다. 양이 길을 잃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는 거죠. 그래서 목자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목자를 따르지 않고 길을 잘못든 양들을 쫓아가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 수천 입맛대로 신부가 살면 안 된다는 거죠. 착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 는 양들(요한 10,1-10), 양들에게 넘치도록 생명을 주시는 주님 … 사슴이 시 냇물을 그리워하듯이 하느님 내 영혼이 당신을 그리워하며, 생명의 하느님 을 목마르게 기다리오니. …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 뵈리까 하는 시편 저자 의 기도에 양들과 목자의 관계를 묵상합니다. 사제는 양떼가 길을 잃지 않 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는 목자임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말이지요. 그러다가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겹치곤 합니다. 요한은 절대 속삭이 지 않고,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비 인간성의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가 왔으니, 회개하라 외치는 세례자 요한을 따라 외쳤던 글을 모아 첫 강론집 <사랑의 외침>을 펴냈어요.
오: 아, 그렇게 세례자 요한처럼 큰소리로 세상에 외치신 책이 바로 <사랑의 외침>이군요.
안: 가끔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누가 들을까, 묵상해보곤 합니다. 광야에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는 요한의 외침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 진 이들은 누구인가. 아무리 외쳐도 들을 귀가 없는 사람은 도저히 들을 수 가 없어요. 본당에서 주일미사 강론을 하다 보면 때로는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자 요한 같은 심정이 들 때가 있어요. 예수님 말씀처럼 구원에 이르는 문은 좁아요. 사람들은 대부분 쉽고 편안한 넓은 길로 가려 하지, 불편하고 힘든 좁은 길로 가지 않지요. 게다가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걸어간다? 그것은 보통 세상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삶이지요. 그 어려운 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셨기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길을 좇아가야 한다는 거죠. 게다가 사제라면 말이지요. 왜 그래야 할까. 두 번째 강론집 <반대 받는 표적>은 이런 생각을 정리했어요. 예수님을 스승으로 삼고 그분을 쫓아가려 노력했고, 시대의 징표를 읽으면서 강생육화 영성생활을 본당 교우 들과 함께 실천하려 했어요. 그렇게 40여 년 본당신부 생활은 늘 도전의 연 속이라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뜻이 다른 교우들이 뭐라 해도, 사도 바오로처럼 나는 달릴 길을 달렸고, 싸울 것을 위해 싸웠으니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린다는 외람된 바람까지 가지게 되었다. 은퇴 이후 15년째도 같은 생각이고 여태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오: 신부님께서는 사제로서 살아오신 삶에 큰 보람을 느끼고 계시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더구나 신부님께서 생각하시는 착한 목자상 얘길 들으면 더 그런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현실참여와 본당사목에 균형을 맞추 시려는 노력에서 신부님의 노고를 보게됩니다.
안: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다’(소포클레스)라는 말이 있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내일도 나의 길을 간 다고 하셨지요. 그러한 마음으로 50년 사목자의 길에서 한눈팔지 않으려 했 고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 노력했어요. 심용섭 신부님이 유학시절 스승에게 들은 얘기라면서 들려준 얘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제 다 마쳤다. 끝났다. 내 영혼을 당신께 맡기나이다’라고 하신 것처럼, 사제는 서품받는 순간부터 선종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거죠. 이 몸이 다할 때까지 그렇게 살다 가, 십자가상에서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셨다 하신 주님의 뒤를 따라 목자의 길을 끝까지 가고 싶어요.
사랑은 구원이다!
오: 책 제목이기도 한 ‘사랑의 외침’과 ‘반대받는 표적’은 신부님의 삶을 강력히 대변하는 듯 합니다. 신부님 목자상의 힘이 되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고 생각됩니다. 도대체 신부님께 말씀하시는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안: 흔히 사랑만이 우리 인간을 구원한다! 사랑만이 진리를 깨닫게 한다! 진리가 자유롭게 한다! 라고 말하지요.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처럼 된다는 것이에요.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나도 그분과 같이 되려는 것 이지요. 예수님의 복음은 믿음과 자유에로의 초대입니다. 즉 나 자신이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같은 사랑이 될 수 있다는 믿음과 자유에로의 초대가 바로 복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라고 외쳤던, 그 사랑의 외침이 바로 나의 강론이고 내 본당 사목 전부였어요. 그 사랑의 외침은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에도 그대로 연결되었지요. 사랑이 죽어 버린 비인간화, 독재의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알리며 인간해방과 구원 에 힘쓰는 일이 하느님 나라를 앞당기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1970~80년대 엄혹한 시절, 시국미사에서 자주 인용되었던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은 커다란 위안이 되었지요.(이해를 위해 성경 본문을 인용한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아 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 십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 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 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 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2-35).
이 말씀 안에서 우리는 사랑의 일치를 이루었고, 모든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어요.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남녀성별만 바꿀 수 없고 뭐든지 다 공작해낸 다는 중앙정보부 3국, 국내정치 담당 6국이나 보안사령부의 서빙고 지하실로 끌려가 고초를 당해도,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라는 믿음은 든든한 위로가 되었어요. 그 위로로 인해 정의구현사제단은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사독재, 야만의 시대에 시대의 징표에 따라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지요.
사제란? 또 다른 그리스도
오: 신부님의 본당사목이나 현실참여의 바탕에는 하느님의 사랑과 위로가 있었음을 다시 확인합니다. 사제에게 사랑의 실천은 절대적이라 생각되네요.
안: 60년 가까이 사제로서 살아오면서 최근 화두로 ‘또 하나의 그리스도’ (alter Christus)와 사제직을 연결하여 묵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을 사랑하는 데 있어 자식과 아내가 있는 이보다 더 차원 높은 사랑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제2의 그리스도라 할 사제들은 정작 자식과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 정도도 되지 못하고, 자신만을 위한 사제직을 산다면 그렇겠지요. 본당사목의 성공 여부는 애오라지 본당 교우들을 얼마나 사랑하는 데에 전적으로 달려있어요.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 치는 예수님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의 힘을 드러 내기 위해 노력해야겠지요. 현 프란치스코 교황은 양 냄새 나는 목자를 말 씀하시는데, 요즘 교우들은 본당신부에게서 양 냄새는커녕 공무원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사제직을 직무상으로만 일하는 공무원 같다는 말입니다. 본 당신부는 등잔에 기름을 넣고 신랑을 기다리는 지혜로운 처녀들처럼, 의식 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등잔에 기름을 준비하지 않고, 사랑의 애덕도 닦지 않고 게으른 잠만 잔다면 신랑인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모른다고 하시며 혼인잔치에 들여보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 본당신부에게서 양 냄새가 나지 않는다면, 목자의 직분을 제대로 수행 한다고 볼 수 없겠지요. 우리 신앙에서 깨어있음은 늘 강조되고 있는 부분 인데요. 깨어 기다리는 처녀들의 비유는 마치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어떤 삶 을 살아야 하는지를 예시하는 듯 합니다.
안: 40세로 단명한 프란츠 카프카는 ‘인간의 죽음이란, 날마다 밤이 오고 해 마다 겨울이 찾아오는 자연의 이치처럼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밤이나 겨울 을 맞은 채비를 하듯이 죽음에 대한 준비는 단 하나밖에 없다. 바로 훌륭한 인생을 사는 것이다’라고 했어요. 그 훌륭한 인생이란 이런거죠. 시각, 청각, 언어 장애가 있는 헬렌 켈러는 어릴 적에 설리반 선생이 우물가에서 펌프로 물을 퍼내 손바닥에 올려 그 감각으로 소통을 하게 된 뒤, 더는 컴컴한 어둠 에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언제나 태 양이 떠 있기 때문이라는 거죠. 세례를 받은 우리도 성령과 함께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죽음의 사촌인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 사제는 선종 시에, 십자가상 예수님처럼 ‘다 마쳤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처럼 ‘달릴 길을 다 달렸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쉬움으로 남는 애덕 실천
오: 신부님은 깨어있는 사제의 삶을 강조하십니다. 그 깨어있음은 또 사랑 의 실천, 신부님 표현대로라면 ‘애덕실천’이겠지요. 그 애덕실천을 위한 본 당을 만들기 위해 애도 많이 쓰신 것 같은데, 돌이켜 보시면 어떠신지요.
안: 기도하고 묵상하며 실천하는 깨어있는 본당신부가 되기 위해, 부임한 본당마다 예비자교리, 성서공부, 피정 등 신앙생활 공부를 직접 담당했어 요. 본당은 성가정공동체와 같이 신망애 복음삼덕을 닦고 배우며 실천하 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체성사 사랑, 애덕 실천을 위한 본당 예산을 30% 이상 과감하게 지출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사 랑의 불을 놓으셨어요. 그 불길은 이미 타올랐으니 우리는 성체를 본당 감 실에 가둬 모시지만 말고 활활 타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그게 실질적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성체성사 사랑, 애덕실천입니다. 언젠가도 소개한 수락산 기슭 일명 ‘감자탕교회’라 불리는 광염교회가 있어요. 이 교회 신도들은 안 부를 물으면 늘 “너무 행복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재미있는 곳인 줄을 미처 몰랐습니다”라고 말해요. 주일 예배에서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고 합니다. 교회 이름도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다하자는 뜻으로 광염교회라 지었다 하지요. 이 광염교회, 감자탕교회는 100만 원만 남기고 100% 교회재정 공개를 원칙으로 하고, 최소화한 교회 운영비만을 제외하고 90% 이상을 성체성사 사랑 실천에 쓴다고 합니다. 광염교회의 신도들이 그처럼 행복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사랑의 실천에서 하느님 나 라를 산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봉헌자들의 지향대로 헌금을 다시 가난한 이웃들에게 돌려주는 교회, 믿음과 사랑으로 성체성사 사랑의 기적을 일궈 큰 감동을 주는 교회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나는 본당 전체 예산의 20~30%만 사회복지, 애덕을 실천했 어요. 본당 예산의 절반이라도 광염교회같이 성체성사 사랑을 실천하는 애덕의 산실로 본당을 꾸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아요. 본당 신부 님들이 미사 전후 성체조배도 하고, 본당 신자들에게 성체성사 사랑의 불을 지피는 사목도 중요하다고 봐요.
오: 은퇴 후에 보니까, 본당예산으로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애덕실천에 아 쉬움이 남는다는 말씀이네요. 그러나 은퇴 후에도 신부님께서는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신앙을 사시려는 것 같습니다. 독서, 집필, 홈페이지 운영 등을 통해 일선 사목자 못지않은 열정을 보여주십니다.
안: 본당에서 신자들에게 교육했던 내용을 모아 은퇴하던 해에 693쪽에 달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라는 제목으로 가톨릭예비자교리서에 따 른 신앙생활교리서를 출간했어요. 은퇴 이후에도 꾸르실료 롤료 강의록을 모아 <성사생활>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 살아나아가기>, <한국 순교자의 영성>, 강론과 사회활동을 정리한 <정의와 사랑> 등의 책도 냈어요. 그리고 성가정생활의 모범에 따라 신자들을 사랑의 공동체로 이끌기 위 해 ‘성가정생활캠프’라는 홈페이지도 만들었지요. 이런게 다 본당사목에서 못다 한 아쉬움에서 비롯되었어요.
오: ‘성가정생활캠프’(Holy Family Camp)는 신부님이 앞에서 꿈꾸셨던 본당공 동체 모습이 연상됩니다. 안: 예수님이 돌아가신 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떠올려 보세요. 그들은 신앙생활에 지치고 회의로 가득 찬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동행한 낯선 나그네가 부활한 주님이셨어요. 그분의 말씀으로 성령의 불이 댕겨져 마음이 뜨거워졌고, 마침내 성체성사 나눔과 같은 식사를 할 때 비로소 부활 하신 주님을 알아보았어요. 바로 그 모습을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 구현해 보고 싶었어요. 특히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만남과 소통에 어려움이 많은 교회의 현실을 보니 더욱 그랬지요. 이제 인터넷 온라인, 심지어 AI가 대세 가 된 세상이지요. 교회는 세상의 발전을 쫓아가기 힘들어요. 물론 나이 든 나는 더 그렇고.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어떻게든 해봐야겠다고 생각해서 홈페이지를 만들고 소통하려 했지요. 은퇴 사제로서 어려움이 많 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세상의 도구를 사용해서 하느님 나라를 함께 살아보고 싶었어요. 고생물학자 떼야르 샤르댕 신부님은 중국 어느 사막에서 제대는 물론 제병, 포도주가 떨어진 상태에서 이 우주, 세상을 제대 삼아 그 위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빵과 포도주로 삼아 미사를 드렸다고 하지요. 그게 생활미사, 생명의 미사가 아닌가요. 그런 생각을 한 거지요. 옆으로 얘기가 샜지만, 아무튼 사랑은 하느님의 유전자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가장 닮는 순간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유전자를 가진 존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는 한 몸 입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우리 교회공동체의 모습이죠. 교회 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인 성체성사로 한 몸의 생명을 이루고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이지요. 성체성사 사랑이 없는 본당공동체 죽 은 몸으로서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아닙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 성체성사 생활의 잘못을 이렇게 지적하십니다(안 신부의 요청에 따라, 성경 본문 인용함).
이제 내가 지시하려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러분을 칭찬할 수가 없습 니다. 여러분의 모임이 이익이 아니라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우선, 여러분이 교회 모임을 가질 때에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있다는 말이 들리는데, 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에 분파도 있어야 참된 이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 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 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 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 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 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 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 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1코린 11,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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