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직한 목자상 - 원로사목자 안충석 신부와의 ‘만남’ I
- didimausi
- 2024년 7월 9일
- 9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7월 10일
오민환(오): 지난 <기쁨과희망> 32호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라는 제목의 ‘만남’은 신부님의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에 집중한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 ‘만남’에서 신부님의 신앙과 사회참여적 영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신부님의 영성이 본당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체험을 나누어주시면, 후배 사제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안충석(안): 그래요. 나는 사제단 활동과 본당신부로서의 삶은 분리 되지 않 았다고 봤어요. 나이 육십이면 회갑을 지내며, 새로운 인생을 살라고 합니 다. 이제 얼마 있으면 서품을 받은 지 육십 년이 돼요(1967년 서품). 많은 사제가 다시 태어나도 사제가 되 고 싶다고 말합니다. 나 역시 다시 태어나도 사제가 될 것이고, 또 지난 60년 사제 의 삶 그대로 살면서 제대로 사목을 하고 싶어요. 오늘 그 마음을 담아 이야기를 해볼 까 합니다.
오: 네. ‘만남’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우선 신부 님의 첫 본당 이야기부터 시작할까요.
본당사목 - 동대문, 이문동, 금호동, 아현동, 사당동, 고덕동, 일원동성당
안: 나는 1939년 11월 28일에 태어났고, 서품은 1967년 12월 12일에 받았 어요. 첫 발령지는 용산성당이었어요. 본당신부님은 신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쳐주시던 임화길 신부님이었지요. 임 신부님으로부터 덕원신학교 독일 교 수신부님들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사제생활을 시작했어요. 첫 본당신부님 의 사제상이 나의 첫 사목자상으로 내 안에 자리잡았어요. 외부활동이 많으셨던 임 신부님을 대신해 보좌신부인 내가 본당을 많이 지켰어요. 이후 종로본당으로 옮겨서 1년을 유영도 신부님, 또 1년을 백일성 신부님과 함께 살았어요. 용산과 종로본당에서 2년씩 4년을 보좌신부로 지내고 동대문성당(1972-1977년) 본당신부로 가게 되었어요.
오: 당시는 2년씩 두 군데만 보좌신부로 지내면 본당신부 발령이 났군요. 지금 서울교구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네요.
안: 그렇지요. 당시는 서품받고 3~4년 지나면 본당신부가 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바티칸공의회의 교회쇄신과 적응(aggiornamento) 정신에 따라 교구 참사위원을 뽑았는데, 내가 보좌신부 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하는 바람에 동 창보다 1~2년 정도 늦게 본당신부 발령을 받았어요. 그후 본당신부 때에 도 교구참사위원으로 위촉되어 2년 동안 재임해서 4년을 봉사 하였다. 아무 튼 종로본당 보좌신부 2년 생활을 마치고, 약 1,000명 정도 교우와 함께 동 대문 숭신동에 개신교회 건물을 사들여 신설 본당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하 게 되었어요. 서울에 동방의 빛이 들어오듯, 복음의 진리의 빛이 전해지기 를 바라는 마음에서 동대문천주교회라는 이름을 지었어요. 성당 이름은 내 가 교구참사회 일을 봤기 때문에 그렇게 정할 수 있었어요. 또 민족 구원과 성화를 위한 사제성소가 많이 나오길 바라면서 성당 주보성인을 김대건 안 드레아 신부님으로 정하고 기도를 많이 했어요. 이런 지향 때문인지, 가톨 릭대학 총장을 지낸 임병헌 신부님을 비롯해 내 임기 동안 사제 7명을 배출 했어요.
오: 4년 차 사제에게는 쉽지 않은 본당 신설이었지만, 동대문성당이라 이름 지으신 것, 김대건 신부님을 본당 주보성인으로 하신 것, 모두 많은 준비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안: 동대문본당은 신설본당이지만, 성가정 공동체같은 가족애와 형제애가 가득한 본당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요. 마치 첫사랑의 순정을 다 바치듯이 말이죠. 첫 본당이라 첫정도 많이 들었고요. 예비자교리를 직접 하 면서 입교자들을 만났고, 성서공부에 주력하면서 신자들과 가까워지려고 했 어요. 그런데, 동대문성당에 부임한 그해 10월 박정희의 유신헌법이 등장하 고 공포정치가 시작되었어요. 지난 호(<기쁨과희망>32호) ‘만남’에서도 언급했 듯이, 동료 사제들과 함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만들어 활동한 것도 동대문본당 주임신부 때 일이에요. 인간화, 민주화를 위한 전국사제 시국기 도회와 본당사목을 분리할 수 없었어요. 이 땅의 인간화, 민주화가 복음화와 서로 다르지 않고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제단 활동과 본당 사목 그 어느 것도 소홀할 수 없었지요. 되돌아보면, 그때가 청춘을 불사른 가장 뜨거운 사목활동의 시기였어요. 정보과 형사들은 동대문성당 앞 아파트에 방을 얻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지요.
오: 첫 본당신부를 맡고 첫정이 들은 동대문성당, 그런데 유신독재 시절이 라 정부의 감시도 받으셨네요. 30대 청년 본당신부이셨을텐데, 고생 많으셨 습니다.
안: 본당신부로서 우리가 사는 시대의 징표에 따른 강생육화 영성을 살아내고자 했어요. 첫 본당부터 그랬지요. 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기쁨과희 망>에서도, 세상의 기쁨과 희망, 특히 가난한 이들의 슬픔과 고뇌를 그리스도인들이 보듬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고, 내가 생각 한 본당사목 방향과도 맞아떨어졌어요.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유감인 것 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천주교 사제로서 당연히 해야 할 사회적 책무와 발언에 대해 정치적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박정희, 전두환 독재 그리고 현재 검찰 독재 세상에서 사제가 정의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어떻게 정치적이란 말인가요. 정의구현이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구현입니다.
오: 정의구현은 사랑의 구현이라는 말씀, 진영논리에 빠져 진실을 보지 못 하는 세대가 깊이 새겨야 할 말씀 같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동대문성당에서 본격적으로 본당신부의 삶을 시작하셨는데, 이후 이문동성당으로 가셔서 또 소위 ‘분가’를 하셨어요.
안: 종로본당에서 동대문성당 분가를 할 때 애정을 갖고 헌신적으로 성전건 립기금을 모았던 신자들 모습이 떠오릅니다. 또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동대 문성당에 견진성사를 오셔서,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께서 한국에 오셨을 때, 신설 본당인 동대문성당과 청량리 성바오로병원 방문하셨는데, 동대문성당의 열악한 주일학교 교리실을 보여드렸던 것이 생각난다고 하시면서, “여기야말로 가난한 본당 모습이다. 서울교구 신부님들도 안 신부처럼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동대문에서 5년을 보내고 이문동본당 (1977-1982년)으로 가게 되었어요. 이문동은 대학가라 젊은이들이 많았어요. 본당도 젊은이들이 넘쳐났어요. 메리놀회 배네로사 신부님이 보좌신부로 오셔서 함께 사목을 했고요.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전 교우가 주일 복음말씀 으로 한 주를 살아가자는 모토로 성경공부를 하고 그랬어요. 그때는 꾸르실료가 한창이었고, 거기 지도신부를 하면서 강의를 열심히 준비했어요. 미국 여러 도시에 가서 교포들에게도 강의했고, 그 내용을 모아 <성사생활>이라 는 소책자도 냈지요.
오: 신부님이 가신 본당은 활기가 넘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문동본당에 계실 때 광주 5·18 진상을 알리는 비디오테이프로 인해 보안사 서빙고 지하 실에 끌려가셨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안: 네. 그때 미사 후 공지사항 때나 테이프로 광주의 진상을 알리려고 노력 했지요. 나를 연행하려는 이들과 나를 지키려던 교우들이 대치하던 기억이 납니다. 본당교우들의 끈끈한 정을 느꼈습니다. 나는 메리놀선교회로 피신했다가 서빙고 지하실로 끌려갔어요. 그들은 나 때문에 뭐가 잘못되었다면 서 고문을 하기도 했어요. 오: 군사독재 정권 아래서 신부님을 지키려던 교우들과 신부님의 끈끈한 정 이 눈에 보이듯 느껴집니다. 그것은 그간 신부님과 함께했던 신자분들이 느 꼈던 공동체적 교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여집니다.
안: 그래요. 본당 교우들과 일년에 한 번씩은 꼭 해외 역사문화탐방, 이스라엘 비롯한 성지순례를 하면서 꾸르실료와 같은 집중 신앙교육을 했어요. 함께 순례하면서 생활체험도 나누고 신앙교육도 하면서 신앙의 변화와 성숙을 도모했지요. 이런 기획과 실행은 본당을 옮길 때마다 계속되었어요. 본당사 목을 하면서 늘 신자들과 사랑을 나누고, 하느님 나라를 ‘여기’에서 살아나 아가는 성모님의 성가정과 같은 본당공동체를 꿈꾸었어요. 그것이 그리스도 교 신앙생활의 정체성을 찾아나아가는 것이라 생각했지요.
오: 신부님께서 생각하시는 본당공동체란 무엇일까요. 안: 본당이란 파견과 선교의 공동체라 생각해요. 그것은 바오로 사도께서 지중해 연안을 다니시면서 선교하시고 공동체를 세우신 것을 생각하면 됩 니다. 2~3천 명 교우가 있던 종로본당이 동대문성당으로 신설, 분가하면서, 또 동대문본당은 그만큼의 교우들이 있는 공동체가 되었어요. 이문동성 당에서 2년이 좀 안 되었을 때, 석관동본당을 신설하였어요. 종로에서 동대 문본당으로 발령받듯이 보좌신부로 있던 박노헌 신부를 신설 석관동성당 본 당신부로 발령받게 했어요. 분가한 석관동본당은 그 일대 선교에 앞장서게 되었지요. 이제 이문동을 떠나 금호동본당(1982-1985년)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은 본당을 신축해야 하는 산동네 성당이었어요.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성전 신축 대신에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본당사목에만 집중했지요. 3년 동 안 모금을 했지만 성전 신축은 어려웠어요. 교구에 사정을 얘기했더니, 아현동본당으로 발령을 내주었어요. 그런데 후임으로 온 이해욱 신부님이 금호동성당 묘지분양 관리비로 새 성전을 아름답게 지었습니다. 나는 그 방법 을 몰랐어요. 참, 금호동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오토바이로 생선배달을 하 던 교우분이 장에서 받아 온 가장 신선한 생선을 가장 먼저 본당신부님 드린 다면서 사제관으로 가져왔어요. 그런 마음과 정을 잊지 못하는 곳이 금호동 본당입니다. 아무튼 금호동에서 성전을 짓지 못하고, 아현동으로 가게 되었 어요. 그런데 십자가를 피해 도망가면 다른 십자가를 지게 된다는 말처럼, 그렇게 되었어요. 신촌 대학가와 산동네가 있는 아현동본당은 6·25전쟁이 끝나고 흙벽돌로 성전을 지었어요. 아현동본당(1985-1993년)에서 사목할 때 1987년 6월항쟁이 있었어요. 민주화와 인간화를 갈망하는 학생들과 함께했 다는 이유로 사제가 정치활동을 한다며 ‘반대 받는 표적’이 되었어요. 하루는 나중에 국회의장까지 했던 여당 측 인사 이만섭 씨가 내 강론을 듣기 싫어서 어린이미사 간다며 정색하고 나에게 항의한 적도 있어요. 내 강론 들으면 골치 아프다던 그에게,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이한열 열사의 죽 음은 전인 구원을 위한 우리 시대의 징표이자, 하느님 강생육화의 상징적 사건이라 대꾸한 기억도 나네요. 또 대통령선거 부정을 감시하기 위해서 전 국에서 모인 청년학생들에게 성당 지하교리실을 내어주고 밤새도록 활동을 벌일 수 있도록 도왔던 기억도 있습니다.
오: 신부님의 본당 생활은 어디를 가시든 파란의 연속입니다. 그만큼 신앙과 역사 앞에서 사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몸으로 보여주셨던 것 같습니 다. 어떤 신부님은 평생을 사제로 살아도 성당을 짓는 일은 꿈도 못 꾸는 경 우가 많은데, 신부님께서는 분가든 신축이든 성당 건축에 공을 많이 쌓으셨습니다. 아현동본당에서 7년을 계셨다고 하는데, 그것도 성전건축과 무관하지 않겠지요.
안: 아현동본당에서 성전을 짓는데는 본당사목회 이영섭 콘스탄틴 회장님의 탁월한 리더십이 큰역할을 했어요. 바자회, 모금강론 그리고 콘스탄틴 회장님의 2억원 봉헌과 500세대 교우분들의 모금으로 총공사비 22억원을 단 한 푼의 빚도 없이 해결했어요. 아현동본당 교우들은 새 성전 건축을 통해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체험을 했어요. 이 새 성전 건축의 ‘사랑 이야 기’를 <애오개 새 성전>이란 한 권의 책으로 남겨놓았어요. 당시에는 쉽지는 않은 일이었지만, 본당신부로서 본당 분가를 세 번이나 할 수 있었고, 성 전 신축은 보통으로는 받기 어려운 은총의 기회였다고 생각해요. 아무튼 그 렇게 성전 신축을 마무리 짓기 위해 아현동본당에서는 7년을 사목하였어요. 아, 그리고 사목회 이영섭 총회장께서는 “안 신부님은 주머니에 몇만 원만 있어도 교우들과 영화를 보러가거나 외식을 하면서 교우들과 친밀하게 깊은 정을 나누셨다”라고 하셨어요. 난 그저 본당 신자들과 일상생활을 함께 나 누며 성가정 가족공동체를 소망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인데 말이지요.
오: 본당 신자들에게 다정다감하셨던 본당신부이셨군요. 아현동성당에서는 파견과 선교의 공동체인 본당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새 성전건립, 한국 민 주화의 획을 그었던 6월항쟁 등 교회와 사회 안에서 굵직굵직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모두 한 본당에서 7년 동안 계시면서 벌어졌던 일입니다.
안: 사실 7년 동안 성전 건립하면서 진이 다 빠졌어요. 그래서 교구에 2년간 안식년을 요청해서 해외에서 재충전할 기회를 만들었지요. 안식년을 마치고 아일랜드 신부님들이 시작하셨던 사당동본당(1944-1999년)으로 갔어요. 여기 서도 마찬가지로 신자들과 성경공부도 함께 하고 예비자교리도 했지요. 특 히 한국 103위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라 신앙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애를 썼어요. 남성구역반장단 외에 103위 형제회 등을 만들어 남성 교우들의 단체 참여를 활성화하려 했어요. 물론 지속적인 공부와 신앙생활 실천은 당연했지요. 사당동에서 본당재건축을 위해 2억 원 정도 모금을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 사당5동성당인 그 터가 매물로 나왔다고 하기에 교구와 의논한 뒤 좀 무리해서 땅을 샀어요. 이문동성당에서 석관동성당 을 분가한 경험을 살려 성당 터를 샀지요. 성당 터는 매물이 나왔을 때 사두지 않으면, 나중에 돈이 있어도 사지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옆 본당인 동작동성당에 이석충 신부님이 계셨어요. 그분은 나를 신학교에 보내주 셨던 아버지 신부님이시죠. 의논도 안 하고 그렇게 땅을 샀다고, 이 신부님에게 아주 호되게 혼났어요. 그렇게 야단맞아도 좋은 일 한 것 같아 기분은 좋았어요. 나중에 교구 총대리께서도 잘한 일이라면서 칭찬을 하셨지요. 또 교우들의 성숙을 위해 피정과 특강도 했는데, 한번은 안동교구 두봉 주교님 께 교우들 피정을 부탁드렸어요. 그때 주교님은 강론하시면서, 사당동본당 일 년 예산이 안동교구 전체 예산보다 많다고 하셔서 열악한 지방교구 재정에 가슴 아픈 기억이 있어요. 김대중 선생을 모시고 ‘민족통일과 국민상’이 라는 주제로 사순특강을 한 적도 있지요. 이때 본당에서 전라도 출신과 경 상도 출신 신자 사이에 반응이 달랐어요. 지역주의의 폐해가 본당에도 여전 한 것에 또 마음이 아팠어요. 그리고 매 주일미사 강론을 듣던 중앙일보 편 집자가 일주일에 한 번 ‘한주 새 아침마당을 열며’라는 고정칼럼을 마련할 테니 원고를 써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6개월 동안 중앙일보에 칼럼을 기고했고, 독자로부터 감사 인사를 받은 기억도 납니다. 사당동본당 에서 행한 강론을 모아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라는 책을 냈어요. 동대문 성당에서 낸 <사랑의 외침>에 이어 두 번째 강론집이죠. 강론집 내용은 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이 제시한 사회사목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핵심으로 하여, 민중 중심의 본당 사목 실천을 정리했어요. 여기서 민중과 함께 인간해방의 동행자이자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임을 확인하는 교회상을 찾아 나가려 했어요.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이란 하느님의 자녀 로서 인간의 자유와 인간해방을 추구하는 것이고,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하 느님 나라와 하느님 아버지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나가는 일이 아닌가요. 나의 정의구현사제 단 활동도 하느님의 앙떼인 교우들을 사랑하는 내 사목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봐요. 사당동성당에서 꾸르실료 수첩같이 우리 일상생활 수첩을 만들어서 본당교우들에게 나눠주면서 신앙생활 정체성을 찾을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오: 안식년을 마치고 가신 사당동본당에서도 신부님의 열정은 식지 않았습 니다. 신부님의 마음속에는 늘 교우들과 함께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나가려는 생각뿐이신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은 당연히 신앙의 정체성 을 찾아가려는 것과 연결되겠지요. 이제 신부님도 육십의 나이를 넘기시면서 본당을 이동하시게 됩니다.
안: 그래요. 사당동본당 5년 임기를 마치자 총대리 주교님께서 마땅히 보낼 본당이 나오지 않으니 몇 개월 더 있으라고 하시길래, “정의구현사제단 활 동만 한다고, 평생 아파트 있는 동네는 가보지도 못하고 산동네, 가난한 본 당만 보내셨습니다”라고 대답했지요. 그래서 간 곳이 하남시와 경계에 있는 고덕동본당(1999-2004년)입니다. 견진성사를 집전하러 오신 정진석 추기경님 이 “안 신부, 여기는 아파트 동네잖아”라고 하셔서 “저는 아파트 동네가 아 니라 ‘뒤파트’ 동네에서 삽니다”라고 답한 일화도 있네요. 사실 내가 거친 본 당은 대부분 살림살이가 넉넉한 동네는 아니었어요. 그러나 본당신부로 부 임하면 늘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나의 사목방향을 실천하려고 노력했지요. 고덕동에서는 보좌신부님들을 너무 잘 만나, 더불어 함께 그리고 가장 편안 하게 본당사목을 할 수 있었어요. 성당 입구에 103위 순교성인화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들어서 순교자들의 신심을 본받자는 기도를 바치기도 했지요. 나중에 고덕동에서 강일동본당이 분가되었는데, 내 욕심인가, 재임 기간에 못 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기는 하지요. 당시 고덕동성당은 지금처럼 고층아 파트로 개발되기 전이라 모금 자체가 불가능했어요. 한편 사순절 신앙생활 계획표를 본당 교우들에게 배부하여, 사순절 신앙과 부활 파스카 신앙 생활 체험을 맛보도록 했어요. 대림절에도 신앙생활 계획표를 만들어 기도와 교 육을 강조하면서, 예수성탄, 강생육화 신앙을 체화하도록 도움을 주려 했지요. 날로 잃어가는 우리 신앙생활 정체성을 찾아 나가자는 의도와 목적으로 한 것입니다. 이는 내가 사목하던 본당에서 늘 해오던 일이지요.
오: ‘아파트가 아닌 뒤파트에서’ 사시면서도 늘 해오시던 사목을 하셨습니다. 이제 신부님께서 마지막으로 본당사목 열정을 쏟아부으셨던 일원동본당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안: 일원동본당(2004-2010년)에서 일선 사목 은퇴를 했어요. 생전 처음 강남 소재 본당으로 부임한 셈이죠. 3대 주임신부였으니까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본당이었어요. 어느 동창신부가 “너 강남 본당 갔다”고 하길래, “‘일원’밖 에 안돼”라고 대꾸했더니, “난 ‘노원’(성당)도 있었다”해서 웃은 적도 있습니다. 어쨌든 본당사목에서 마지막 유종의 미를 거두자는 생각에서 최선의 사목을 찾아 나가려 했어요. 내 사목방향의 바탕이 된 사목헌장과 시대의 징표, 인간화, 민주화를 염두에 둔 교회상은 물론, 당시 대두되기 시작한 기후 변화와 환경문제에 접근하였어요. 하느님의 창조질서 보전과 회복이라는 환 경생태 사목을 시도한 거죠. 양재 시민의 숲에서 생태 보존과 회복을 기원 하는 야외미사, 또 미사리에서 생태회복 미사를 봉헌하고 환경을 생각하는 가족 도보행진도 했지요. 이러한 생태교육을 위해 2년여 임기 연장을 허락 받아 내 본당사목의 마지막을 환경사목에 집중하려고 했어요. 앞으로 환경생태사목은 우리 시대의 징표에 따른 최우선 사목방향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처럼 사스가 유행했어요. 한데 모여서 교육 나눔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1년 더 있다가 일선에서 은퇴하게 되었어요. 그동안 본당신부로서 내가 경험한 사목 활동 내용은 많지만, 기억에 남 는 몇 가지만 떠올려 봤어요. 40년 가까이 본당신부로 살면서, 나는 이 세상, 우리 사회의 사건과 역사를 통해 하느님 말씀을 묵상하고, 시대의 징표를 알아차리고 강생육화의 영성생활을 강조하는 본당사목을 해왔다는 자부심이 지금까지 있어요.
오: 동대문성당에서 시작해서 일원동성당에 이르기까지, 그러니까 1970년 대 초반부터 2010년까지 약 40년에 걸친 본당사제로서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물론 신부님께서 못다 하신 말씀도 많으시겠지만, 신부님께 서 기억하시는 소중한 체험을 잘 들었습니다. 후배 사제들에게 바람직한 사목자상을 보여주시려는 신부님의 마음도 읽혀집니다. 여러 말씀을 주셨지만, 본당신부와 신자와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요. 예전과는 달리 최근 본당신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신자들이 적지 않습니다.(안충석 신부는 사전 질문지를 받고, 상당 분량의 답변을 미리 글로 준비해두었다. 안 신부는 본당사목과 관련한 이야기를 마치자, 이제 본격적으로 ‘바람직한 사목자상’에 관한 평소의 생각을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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