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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막달레나, 성서가 전해주는 사랑의 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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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그리스도와 죄인의 참회’(1617, 뮌헨 알테 피나코텍)

성서 속 여인상은 인류 첫 조상 아담이 ‘이는 내 살이요 내 뼈“라며 이름을 부르며 찾았던 에와처럼, 사랑받기를 갈망하는 실존의 반영이다. 하느님과 남편의 사랑을 받은 여인은 또 다른 자기 생명의 분신으로 자녀들을 낳고 모성애로 키운다. 인간은 그렇게 어머니로부터 한 인간으로서 태어나 자란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여성을 자기 문학 작품의 모티브로 삼아 수많은 불후의 작품을 남겼다.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에서 주인공 소냐를 위대한 사랑의 화신으로 등장시킨다. 그녀는 돌같이 인간성이 굳어버린 살인자를 죽음의 질곡에서 부활시켜 다시 새로운 인간으로서 변화시키는 사랑의 위력을 증거한다. 안셀름 그륀은 이를 그의 책 <여왕과 야성녀>에서 거룩한 창녀, 야성녀로 표현한다.

     

성서는 이렇게 전한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하시는 도중에, 그 고을에서 죄인으로 낙인이 찍힌 여인이 향유가 들고 왔다. 여인은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으며 자기 죄를 용서 청한다. 당연히 바리사이들은 불편해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1-47).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아 본 사람은 그만큼 가장 많이 사랑을 드러낸다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이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창녀였는지 일곱 마귀가 들린 죄 많은 여자인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성서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녀는 각별히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것만큼 확실하다.

아래에서 안셀름 그륀의 마리아 막달레나 묵상을 참조한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의 길에 동행한 첫 번째 여자다. 그녀는 강한 여자였다. 그녀는 예수 곁에 있었다. 루카는 그녀에게서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갔다고 전한다(루카 8,32 참조). 예수는 그녀를 내적 분열과 소외에서 해방시켰다. 그녀는 본디 사랑할 능력이 있었다. 예수가 그 능력을 이끌어 주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 곁에 머무르고 싶었다. 예수는 그녀에게 존엄과 중심을 찾아 주었다. 그녀는 이제 자기중심으로부터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롭게 깨달은 사랑의 능력으로 예수를 사랑했다.

요한은 마리아 막달레나 예수의 무덤으로 제일 먼저 달려갔다고 전한다. 그녀가 첫 번째로 부활을 목격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든 ‘사도 중의 사도’(aspostola apostolorum)가 되었다. 요한은 마리아가 무덤으로 달려가 부활한 예수를 만나는 장면을 사랑 이야기로 묘사한다. 두 여인의 사랑의 노래인 아가(雅歌)와 연결한다. 연인은 사랑을 즐기고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에 감사한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소. 한 번의 눈짓으로, 그대 목걸이 한 줄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소”(아가 4,9).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네”(아가 3.1). 마리아 막달레나도 아직 어두운 아직 어두운 이른 새벽에 자기 영혼을 사랑한 그분을 찾으려고 일어난다. 아가에서 신부는 자기 영혼을 사랑한 사람에 대해 세 번 말한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세 번 묻는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16). 두 번째로 그녀는 무덤 안에 있는 두 천사에게 묻는다. 사람들이 꺼내 난 “저의 주님”(요한 20,13)에 대해 묻는다. 세 번째로 부활한 예수를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묻는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가겠습니다”(요한 20,15).

예수가 “마리아야!”(요한 20,16) 하고 부르자 그녀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요한 20,16). 예수는 그녀만의 스승이다. 그녀는 자기 이름을 부르는 예수님의 음성에서 사랑을 느꼈다. 아가를 배경으로 마리아 막달레나 이야기를 읽으면 그녀의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아가는 도덕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사랑을 찬미한다. 그것은 신부와 신랑 사이의 자유로운 사랑이다. 그것이 놀랍도록 아름다운 그림으로 묘사되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대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얼마나 더 달콤하고, 그대의 향수 내음은 그 모든 향료보다 얼마나 더 향기로운지! 나의 신부여, 그대의 입술은 생청을 흘리고, 그대의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다오. 그대 옷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려. 그대는 닫혀진 정원,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는닫혀진 정원, 봉해진 우물”(아가 4,10-12).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 사랑을 예수에게서 체험했다. 요한은 아가에서 노래한 사랑을 예수의 부활해서 확증한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에처럼 억센 것. 그 열기는 불의 열기, 더할 나위 없이 격려한 불길이랍니다. 큰물도 사랑을 끌 수 없고 강물도 휩쓸어 가지 못한답니다” (아가 8,6-7).

예수의 부활은 예수와 마리아 막달레나를 하나로 결합한다. 죽음으로도 사랑은 사라지지 않음을 보여 준다. 사랑은 죽음을 이긴다. 죽음은 자유로운 것이다. 타인의 신비를 아는 것이 사랑이다. 타인 안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속하지 않으며, 누구도 그 안으로 밀고 들어갈 수 없는 신비, 바로 하느님이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의 고통을 겪는다. 바로 그 고통을 통해 어떤 것보다 강한 사랑을 발견한다. 죽음도 사랑을 뺏을 수 없다. 예수의 무덤에서 자기 영혼을 사랑한 분을 모든 열정을 다해 찾는다. 울음을 터트리고 격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다. 예수를 알아보자마자 껴안는다. 그녀의 열정적 사랑은 보답을 받는다. 그녀는 부활한 예수를 보고 만질 수 있었다. 부활을 선포한 첫 번째 사람이 된다. 그녀에게 부활은 죽음을 이긴 사랑의 승리다. 예수를 향한 그녀의 열정적 사랑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변화되었다. 그녀는 자기의 힘을 잃지 않았고 자기 사랑에 강했다.

심층심리학적으로 볼 때 마리아 막달레나는 열정적으로 사랑한 여자다. 그녀는 온몸으로 사랑한다. 죄는 계명의 위반이 아니다. 삶의 빗나감이다. 전승에 따르면 마리아는 사랑에 상처받은 여자였다. 그러나 열정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마침내 모든 열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예수 안에서 찾았다. 그 사랑은 그녀를 변화시켰고, 몸은 하느님의 빛과 아름다움을 비추게 되었다. 깨달은 여자, 마리아 막달레나는 위대한 신비가다. 그녀가 관상할 때마다 천사에 의해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고 묘사된다. 그녀는 온전히 하느님에게 머무르며 기도했고 이미 하늘을 경험했다.

     

하느님 나라가 네 마음에, 네게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 그 하느님 나라를 살아라고 하신 주님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살아 나아갔던 것이다.

     

예수와의 만남으로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랑으로 받아들임이 무엇인지 경험한다. 예수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어떤 조건이나 소유를 주장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그로 인해 그녀는 자유로워진다.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난다. 그녀는 이제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자기가 어떤 사랑을 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된다. 이제 자기 안에 붙들고 있는 것을 자유롭게 놓아준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받아들인다.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

“나만이 네 안에 있는 것,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사랑한단다.” 이 문장은 여자에게 사랑과 결합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준다. 여자들에게 언제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지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한다. “누군가에 의해 내가 깊이 인식될 때. 누군가가 내 영혼을 바라보며 내가 누구인지, 지금 어떻게 느끼는지 알아줄 때, 그러면 마음이 움직여 눈물이 흐른다. 누군가 나 자신에게로, 내 깊은 갈망과 힘으로 이끌어 주는 것을 느낀다. 내 안에 있지만 내가 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음을 느낀다.

우리 모두 사랑받고 싶고 자신을 사랑하고 싶다.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먼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함은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자기를 배려한다는 뜻이다. 내 느낌과 고유함, 나를 살아 있게 하는 모든 것을 내 안에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자기 느낌이 존중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여자가 많다. 어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했는지 묻는 것은 소용없다. 오늘 무엇을 살아 내고 표현하고 싶은지 묻는 자기 사랑이 필요하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께서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체험하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변화되었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그 누구에게도 이런 사랑을 더 이상 받을 수 없을 것으로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받은 사랑으로 인해 예수님과 다른 인간들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즉 마리아 막달레나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사랑하신 것 같이, 그녀도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 사랑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여자는 용서할 때 사랑하며 존재한다. 용서는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선 분노와 실망을 허용해야 한다. 자기가 용서받았던 기억이 도움이 될 것이다. 타인에게서 경험한 사랑을 자기도 전할 수 있다.

타인의 사랑을 구걸하면 그 사랑을 미성숙한 채로 남아있다. 성숙한 사랑은 타인에게 자기를 내어 준다. 사랑이 한계에 이를 때도 있겠지만 성숙한 사랑은 타인이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충분히 마음을 주지 못할 때, 사랑을 원하는 자신의 욕구를 채워 주지 못할 때도 받아들인다. 유치한 사랑의 욕구에 머물며 그 이상 성숙하지 못한 남자들이 있다. 여자는 모성애를 갈구하는 남자의 유아기적 욕망에 끌려가지 않고 사랑의 사람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여자는 남자의 사랑이 원하는 대로 자신과 삶을 몰아가지 않는다. 사랑 안에서 자기 가치를 느낀다. 타인의 삶의 틀 안으로 얽혀 들어가지 않는다. 사랑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자기 사랑을 빼앗아 가도록 두지 않는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는 사랑에 대한 동경과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녀는, 여자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안에 스스로를 세울 수 있게 하는 표상이다(안셀름 그륀/린다 아로슈,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176p-189쪽 참조).

     

회개 생활로서 죄녀가 성녀로서 변할 수 있고 사랑으로 한 인간이 변할 수 있다는 그 실재를 성서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통해 증언하고 있다.

     

남녀 간의 사랑에서도 인간은 그렇게 나란 인간 안에 있지만, 내가 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한 것을, 내 영혼을 바라보며 즉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시는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구나! 내 깊은 인간적 갈망을 당신 힘으로 이끌어 주시고, 나라는 인간을 완성에 이르게 함께 해주시는구나! 내 마음과 나 자신의 모든 걸 내어 그분에게 맡기려 한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분에게 그런 사랑을 체험했으며 자기 자신을 온전히 예수님께 내어 맡긴 것이다.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은 주님의 사랑 때문에, 자신이 지은 죄를 사랑으로 보속해야 한다.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 예수님께 향료를 바르던 죄녀는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더 많이 사랑하며 자신의 죄스런 삶을 보속했다. 성서는 그렇게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랑받는 그대로 사랑한 여인으로 전한다. 성서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첫 증인으로 내세울 정도로 예수님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고 전한다. 그런 인물을 성서에서는 더는 보지 못한다.

     

칼릴 지브란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에게서 느꼈을 자신의 열정적 사랑을 이렇게 서로 표현한다.

     

그분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어. “평화가 너와 함께하기를, 미리암.” 그분의 음성이 나를 향했을 때, 생명이 죽음에게 말했지. 친구여, 나는 죽어있었어. 나는 영혼을 잃은 여자였지. 네가 지금 보고 있는 ‘나’와 따로 살았어. 나는 모든 남자에게 속했지만,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았지. 사람들은 나를 창녀라고, 일곱 마귀가 들린 여자라고도 불렀지. 나는 저주와 시샘을 받았지. 그러나 그분의 아침 햇살 같은 눈과 마주쳤을 때, 밤의 모든 별들이 빛을 잃었어. 나는 미리암, 그저 미리암. 내가 알던 세상을 버리고, 새로운 땅을 발견한 여자가 되었지.

나는 그분께 말했어. “저의 집에 오셔서, 저와 함께 빵과 포도주를 드세요.” 그분은 물었어. “왜 나를 손님으로 초대하느냐.” 나는 그냥 그분께 청했어. “저의 집에 오세요!” 내 안에서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것들이 그분을 향해 외쳤어. 그분이 나를 보았고, 그분의 눈길이 내게 머물렀어, 그리고 내게 말했지. “네게는 연인이 많구나. 미리암, 그러나 나만이 너를 사랑한단다. 다른 남자들은 너를 사랑하면서 자기 자신을 찾고 있지. 나는 너 때문에 너를 사랑한다.” 다른 사람들은 너의 아름다움을 원하지. 그들의 아름다움은 세월보다 더 빨리 지나가 버리거든, 그러나 나는 네 안에 결코 시들지 않는 아름다움을 보고 있단다. 네 인생의 가을에도 너는 거울을 보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아름다움은 시들지 않을 테니까. 나만이 네 안에 것, 사람들이 보지 목하는 것을 사랑한단다.”

그분이 나를 보고 웃으며 말씀하셨지. “남자들은 자신을 위해 너를 사랑하지, 나는 너 때문에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분은 떠나갔어. 어떤 남자도 그분처럼 걷지 못해. 그 걸음은 내 뜰에서 일어나 동쪽으로 부는 아침 바람이었나, 아니면 모든 것을 뿌리째 뒤흔든 폭풍이었나. 모르겠어, 그러나 그날 그분의 눈에 떠오른 태양은 내 안에 있는 뱀들을 죽였어. 나는 한 여자가 되었어. 나는 미리암, 미리암 막달레나가 되었어(Khalil Gibran, Jesus Meschens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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