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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묵상 사랑으로 깨어나기

최종 수정일: 2022년 1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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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묵상


사랑으로 깨어나기


잠든 사람은 깨우기 쉽지만 잠든 척하는 사람은 깨울 수가 없는 법이다.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그는 계속해서 잠든 척하고 있기 때문에 깨울 수가 없다. 그대여, 차라리 깊이 잠들라. 아니면 자신이 이미 깨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그대가 부처가 아닌 체 행동한다면, 누구도 그대를 부처이게 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같이 완전한자 되어야 한다. 불교에서도 우리 모두가 부처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고 부처가 아닌 것 같이 사는 사람도 있다. 그들 결코 회개하지 않는 성서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같은 자들인 것이다. 위선자들과 자기 자신이 완전한 자 같은 거짓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예수님께서 회칠한 무덤이니 독사의 종류라고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부류의 인간들이다. 그들은 결코 회개생활을 하지도 않으면서도 회개한척 하기 때문인 것이다. 흔히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정의 내리면서 이성이 작용하지 않는 의식을 잃을 때나 잠잘 때는 한낱 식물인간이니 동물에 지나지 않다고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이성에서 깨어나기가 아니면 잠자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깨어 있는 순간만이 그래도 이성적 동물로서 그 순간을 영원히 사는 것과 결혼을 해서 우리 인간은 영원히 사랑하며 살아 나아간다는 것이다. 현재 이 순간을 어떻게 의미와 가치 있게 사느냐 하는 삶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의식적으로 깨어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의지로 의식적으로 깨어나야만 한다.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나는 신의 마음을 알고 싶다. 나머지는 작고 세부적인 것들이다." 신의 마음은 무엇인가? 의식이다. 신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작고 세부적인 것들이란 무엇인가?

당신의 외부적인 목적, 바깥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다. 따라서 당신은 어쩌면 자신의 삶에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이 이미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 왔음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생각과 알아차림의 분리 과정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안다. 깨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당신이 삶과 하나가 되는 것은 현재 순간을 의식적으로 깨어 있으면서 받아 들여서 현재의 순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당신의 삶 전체의 여행이 궁극적으로는 이 순간에 내닫는 발걸음으로 이루어 져 있다. 언제나 이 한 걸음만이 존재하며, 이 한 걸음이 가장 중요하다. 당신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무엇을 만나는가는 이 한걸음의 성질에 달리 있다. 미래가 당신을 위해 보관하고 있는 것은 당신의 지금의 의식 상태에 달려 있다. 그때에 당신은 생각하는 대로 살아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풀부르제 말대로 머지않아서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 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완전하심 같이 너희도 완전한 자 되라. 인간은 행복하게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라고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완전한 자 되고 행복하게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려는 의무와 책임에서 깨어 있지 않는다면 인간다운 삶을 살아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는가가 당신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리고 당신이 하는 일을 어떻게 하는가는 당신의 의식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자신의 의식 상태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은 삶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다. 깨어 있는 행동의 세 가지 방식은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이다.

각각은 의식의 특정한 진동 주파수를 대표한다. 가장 단순한 일부터 매우 복잡한 일까지 당신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그 셋 중 하나가 작동하도록 특별히 깨어 있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의 어느 상태에도 있지 않다면, 자세히 살펴보면 당신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음을 발견 할 것이다.

헤르만 헤세 시인은 행복해진다는 것에서 노래한다.


- 중략 -

예수도

부처도

공자도 그렇게 가르쳤다네.

모든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가장 깊은 곳

그의 영혼

삶은 의무였습니다.

나는 일했고 이제는 알아요.

그 의무가 기쁨이었다는 걸.

사랑의 의무를 다할 때에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으로 깨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같이 완전한 자 가 되려는 삶의 목적의식과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는 의식으로 항상 깨어 있어야만 한다. 사랑을 받고 줄때에만 사랑으로 깨어 있을 수 있다.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사랑의 자취를 소중하게 돌아보는 한 우리는 살아있는 것이고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의 대상은 다양하지만, 우리가 처음 사랑을 제대로 배우는 것은 사람에 대 한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지니는 것은, 연인이든, 가족이든, 벗이든, 누군가 어떤 '사람' 을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했고 사랑하는 것이 인생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돌아보면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확인합니다. 사랑의 역사를 가진 사람은 인생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믿음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듯, 사랑 역시 왜곡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을 선사하고,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그 사랑이 향하게 하는 사람 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것이 내가 하는 사랑을 지키고 꽃피우는 길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좋은 삶이었는가는 우리의 사랑이 결정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향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향한다는 것은 사랑을 부르는 것이고, 사람에 의해 불리는 것입니다.

(철학자의 음악서재에서, 최대환 신부처, 책밥상 222~223쪽)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왜 사는지 아는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를 거의 모두 견디어 낸다.

죽음의 재의 수용소인 아이스비츠 감옥에서 자신이 결정적 실험을 경험한 빅톨프랑클 교수는 "그럼에도 우리는 삶에 예라고 말하려 하네"하는 자신들이 부른 노래 가사를 곱씹으며 정신의학의 로고테라피 의미 치료법을 창시했다. 프랭클은 생의 철학과 실존 철학에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 F.W.니체의 글을 종종 인용하곤 했는데, 인간의 자기 초월과 주체성을 역설한 의미 치료사로서 이는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귀결로 보인다.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라고 말하면서 삶은 곧 힘에의 의지임을 표명했다. 여기서 힘에의 의지란 맹목적인 것이 아닌 자기 강화와 자기 극복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 프랭클에게 그 힘은 의미였다. 그는 인간 현존이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의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런 의미는 삶에 대한 절대 긍정에서 나오며, 책임지는 존재의 행동으로 발견 되고, 발견돼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를 견뎌 낼 수 있었고 그 위대한 증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할 때 134쪽, 빅터 프랭클 지음. 마정현 옮김)


이로부터 빅터 프랭클은 중요한 사상을 전개했는데, 그것은 그가 발전시킨 실 존 철학적 개념의 핵심을 이룬다. 이제부턴 '내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하고 [물어선 안 되고 "삶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프랭클은 삶이란 우리가 대답해야 할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라고 말 했다. 그리고 그것에 답변할 때에만 의미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빅터 프랭클은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들에 대답하는 데 있어 우 리가 가진 도구로 적극적인 행위와 타인을 향한 애정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 을 포함한) 아름다운 감동의 체험을 꼽았다. 그러면서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당한 사람에게는 사랑받은 체험(경험을 포함)이 남아 있고 '행동을 초월해 세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프랭클은 의미의 잠재적 원천을 숙고하는 대목에서 독자들을 가장 깊은 심부로 이끌고 간다. 그는 인간에게 부과된 거의 해결되지 않은 고통도 의미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고 믿었고, 인간이 내적으로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의미 있는 행위 가 될 수 있다고 봤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외적인 실패와 좌절도 질병과 죽음으로 밝혀질 수 있는 의미까지 결코 해치지 않는다. (해칠 수 없다.)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할 때, 11~12쪽)

고통이 의미가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는 인간에게 오직 그 자신에게만 달려있 다. 나치에 체포된 그 순간에도 빅톨 프랭크 교수는 자신이 쓴 원고 뭉치를 윗 소매 외투 안에 꿰매 몰래 숨겨서 이것이 언젠가 출간된다는 정신적 아들의 버팀목 때문에 어깨의 힘이 빠지지 않고 가스 사형실로 끌려가는 것을 면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결정적 실험을 체험할 수 있었다. 사랑으로 깨어나기 위해서는 이 같은 삶의 목적의식으로 이 같은 생명줄을 붙잡고 있는 버팀목이 있어야만 한다. 빅톨 프랭크 교수가 감옥에 함께 있는 동료들이 배급용 같이 먹을 양식을 어느 죄수가 자기 혼자만 살려고 몰래 훔쳐 먹은 사건이 일어났다. 응당 그 사람이 다른 죄수보다도 더 오래 살 수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 반 대 현실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인간으로서 도덕적 인간성을 상실해서 인간으로서 사랑으로 깨어 있을 수 없는 그는 배고픈 다른 죄수들보다도 사랑으로 깨어나서 그 배고픈 고통을 이겨 낼 힘이 더 이상 없어서 그만 더 일찍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 결과로 결정적 실험이 증거된 것이다. 우리 인간의 삶에는 그럼에도 삶에 "에"라고 말하는 것은 온갖 고통과 어려운 상황에서도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온갖 상황에서 가능한 것이다. 성서에서 사랑으로 깨어나기에 본보기인 것이다.

열처녀의 비유 (마테오 25장 1~13절) 장면은 이렇다.

열처녀의 비유

"그 때에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다오.'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이신 신랑이 오는 그날과 그 시간에 현재, 이 순간에 사랑으로 깨어나기가 아니면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공경하며 본받으려 하는 성인 성녀들이야말로 사랑으로 깨어나기로 슬기로운 처녀로서 준비하고 있던 자들로서 한밤중에 오시는 신랑을 맞아 혼인잔치에 들어가신 분들인 것이다.

우리 각자 자신이 이름 없는 성인 성녀로서 성서에 등에 기름을 가지고 있는 사랑으로 깨어나 준비하고 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 같이, 한밤중에 오시는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갑시다.

성령으로 주 안에 항상 거듭 태어나시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성령으로 의식적 안에 사랑으로 항상 깨어있을 때에 지혜로운 처녀들 같이 준비하고 있던 자로서 신랑을 맞아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주 안에 항상 거듭 태어날 수 있는 것은 지속적으로 회개생활을 하여 나아감으로써 성령의 세례로 항상 거듭 태어나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를 주 안에 항상 거듭 태어나서 살아간다는 의미와 내용인 것이다. 살 때에는 삶을 철저이해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에는 죽음에 철저해서 그 전부를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당신은 신인가?” 하고 사람들이 부처에 게 물었다. 그는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성인인가?” “아니오.” 그렇다면 “천사인가?” “아니오.” “그럼 당신은 무엇이오?” 부처가 대답하시기를 “나는 깨달은 자요.” 결국 인간은 깨어있어서 깨달은 자만이 자기 운명의 주인공이라는 부처님의 득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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