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묵상목련꽃을 보며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 didimausi
- 2023년 1월 21일
- 5분 분량

목련꽃을 보며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나의 숙소인 혜화동 신학교 ‘지혜관’ 입구 앞에 목련 한 그루 서 있다. 목련꽃이 화사하게 피기 시작하면, 살아생전 어머님께서는 홀로 가곡 ‘목련화’를 부르시곤 했는데, 그때 그 모습과 노랫소리가 지금도 들려오는 듯 하다. “그대 내사랑 목련화야, 희고 순결한 그대 모습, 봄에 온 가인과 같고, … 그대 내사랑 목련화야그대처럼 순결하고 그대처럼 강인하게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아름답게 살아가리~.” 노랫말이 마치 어머님 일생 같이 느껴졌다. 어머님은 흰옷을 즐겨 입으셨는데, 그래서인지 목련이 활짝피면 마치 어머님이 부활하셔서 나의 숙소 입구에서 서서 기다리시고 사랑스럽게 맞아주시는 것 같다. 그리곤 나의 어머니 사랑에 그리움의 품 안에 마냥 안긴다. 그리고 나는 류시화 시선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에서 ‘목련’이란 시를 꺼내 묵상한다.
목련
목련을 습관적으로 좋아한 적이 있었다
잎을 피우기도 전에 꽃을 먼저 피우는 목련처럼
삶을 채 살아 보기도 전에 나는
삶의 허무를 키웠다
목련나무 줄기는 뿌리로부터 꽃물을 밀어 올리고
나는 또 서러운 눈물을 땅에 심었다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나는 버릴 수 있었지만
차마 나를 버리진 못했다
목련이 필 때 쯤이면
내 병은 습관적으로 깊어지고
꿈에서마저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흰 새의 날개들이 나무를 떠나듯
그렇게 목련의 흰 꽃잎들이
내 마음을 지나 땅에 묻힐 때
삶이 허무한 것을 진작에 알았지만
나는 등을 돌리고 서서
푸르른 하늘에 또 눈물을 심었다
어머님께서 두 손 모아 기도하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치 십자가에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는 아드님의 비명소리에 눈물을 삼키시는 마리아 어머님 모습을 보았다. 잎이 나오기 전에 꽃을 먼저 피우는 목련처럼 신혼의 삶을 채 살아 보기도 전, 2년 만에 남편을 여의고 청상과부로서 사셨다. 마치 요셉과 결혼했으나 부부로 채 살아보지 못한 동정 성 마리아의 삶이 내 어머니님의 일생이셨다. 마치 헌금함에 가지고 있던 생활비 다 바치신 것이다. 자신이 가진 렙톤 두 닢을 모두 바치던 가난한 과부처럼, 어머님은 당신의 아들을 주님께 바치셨다. 목련나무 같은 어머님의 삶은 주님의 말씀을 뿌리로 삼고, 아래에서부터 하느님 사랑의 은총을 위로 밀어 올리시고, 당신 서러운 눈물은 땅에 심으면서, 모든 아픔과 사랑을 말없이 품으며 살아가셨다. 그것은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하신 어머니의 조건 없는 내리사랑이셨다. 나는 이같은 하느님과 성모님의 조건 없는 내리사랑으로서 내 사제 사랑의 꽃과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우리 인간을 흔히 이성적 동물이라고들 하지만, 참된 인성도 배워서 깨닫고 체험해야만 실천하는 이성적 사람으로 거듭 태어난다. 마찬가지로 사랑도 배우고 깨닫고 체험해야, 자신이 받은 사랑을 그대로 남에게도 전할 수 있다. 받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 사랑을 받아 본 사람만이, 즉 자신이 사랑을 체험하고 깨달아 알지 않고는 남을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이다. 사랑도 능력이며 하나의 기술이고 닦아 나아갈 덕행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사라질지라도 마지막 남는 것은 사랑의 기억뿐! 사랑의 그리움으로, 그 사랑은 다시 살아난다. 류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라는 시를 묵상하면서도, 나의 어머님을 그리워한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이 시를 몇 구절 다시 써서 내 어머니 사랑을 떠올리며 그리워해 본다.
땅속에는
땅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부활하시어 나의 전체를 흔드는 이여
땅속처럼 하늘처럼 내 깊고 높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없어도
나는 그대가 한없이 그립다
희고 순결한 그대 모습
희망의 봄에 온 가인같고 두 손 모은 성 마리아 어머님 모습같이 거룩하도다. 그대처럼 순결하고 그대처럼 강인하게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아름답게 살아가리, 하는 어머님의 목련화 노랫소리는 마치 기도처럼 내 귓가에서 여전히 메아리쳐 울리고 맴돌며 사무친다.
내가 받은 나의 어머니 사랑이 그만큼 크기 때문에, 어머님이 주신 사랑의 그리움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깊어가고 커가기만 한다. 아마도 사랑은 그리움의 어머니이기도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한 그리움의 메아리로 들려오는 소리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들려온다. 마치 나의 어머님이 살아생전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하신 말씀처럼 말이다. 그 사랑한다는 말씀은 마치 빈 들판에 선 나에게 들려오는 사랑의 고백처럼 들렸다. 그리고 내가 받은 사랑, 그대로 남을 사랑하라는 말씀과도 같이.
비인간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주님의 길을 곧게하라!”. 정의와 사랑의 외침으로 인간화와 민주화의 길을 걸을 수 있는 나의 사제의 길도, 결국 어머니 사랑의 음성으로 인해, 광야에 선 세례자 요한의 외침도 들렸던 것이다.
요즈음은 전에 같이 가정교육이 중시되지 않는 듯하다. 여든이 넘은 나의 어린 시절, 우리 부모님 세대에 가장 많이 듣던 훈계로는 ‘인간이면 다 인간이 아니다. 인간 된 도리를 다해야만 인간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자랐다. 오늘날은 그런 부모님들의 훈계보다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공부하라’는 훈계아닌 훈계를 들어야 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인간된 도리가 바로 인간 사랑인데, 그 인간 사랑이 없어서 비인간화길로, 약육강식의 맹수의 시대가 된 듯하여 너무 씁쓸하다. 최근 자기의 5살 난 딸은 굶어 죽는데, 반려견의 개사료는 챙겨주는 비인간적 어머니의 엽기적 살인사건은 정신건강의 문제이며, 그러한 개만도 못한 인성은 사랑받아본 적이 없어 인간성 상실에서 오는 것 같다. 사랑받은 체험이 없으면, 인간의 본성은 사라지고, 동물적 본능만 남게 되고, 결국 개만도 못한 악령들린 인간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가 되어버린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인간 사랑이 없으면, 사람은 사람에게 악령들린 악마와 같다. 지금 우리 사회는 바로 이러한 일들을 목격하고 있다.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는 곳이 지옥’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생지옥을 만들어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 우리 현실사회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사랑은 이 세상 살아 나아가는 맛이며 향기다. 사랑의 고민, 사랑의 십자가는 바로 이 생지옥의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는 출발이다. “너는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다” 하신 주님 말씀도 그렇다. 사랑의 빛은 이 세상 살아 나아가는 원동력이고, 소금은 이 세상 살아 나아가는 맛이다. 사제서품 35주년 사목체험을 정리한 한 사제의 책에서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랑을 하고 받은 사람이었느냐”라고 물었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 세상에 사랑의 불을 놓으려 왔다.”
소금이 음식에 짠맛을 내려면 자신은 완전히 없어져서, 그 음식에 녹아 들어가야 합니다. 빛이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는 본연의 역할을 하려면 다 없어질 때까지 자기 몸을 태워야 합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죽이는, 그 녹여지고 태워지는 삶이 바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길입니다. 안도현 시인의 <연탄 한 장>이라는 시가 떠오르네요.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을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이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바야흐로 이 세대 ‘결혼도 하지 않겠다. 자녀들도 낳지 않겠다. 사랑도 하지 않겠다’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안도현 시인은 연탄 한 장을 바라보다가 “일단 제 몸에 불이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속성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은 다 타고 나서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그 누구에게도 연탄 한 장 되지 못하였던 삶을 살아왔구나.” 하고 부끄러워합니다. 남김없이 자신을 태우는 일의 두려움, 일의 끝에 맞닥뜨려야 하는 허무감, 이런 것들에 지레 겁을 내고 아무 실천도 하지 못했던 자신의 용기 없었던 삶을 솔직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새로운 깨달음에 이릅니다. 이 세상사는 동안 우리가 하는 일이 결국 타고 남은 재처럼 쓸쓸한 결말로 내게 온다 할지라도 의미 있다고 여기는 일을 위해 몸을 활활 태우는 일,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일, 그 자체로서 삶은 의미 있는 것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안도현 시인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허무한 한 덩이 재마저 산산이 으깨어져, 미끄러운 세상에 마음 놓고 걸어갈 길을 만드는 일에 바치는 삶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나의 어머님이 당신 아들, 딸 남매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연탄불같이 뜨거운 사랑으로 온몸과 마음을 다하여 태우시면서, 내 안에 사랑의 재를 남기셨다. 어머님은 그 사랑의 불씨로 놓아 주셔서, 사제로서 나의 평생을 사랑으로 타오르게 하셨다. 탈대로 다 타시오! 가곡 ‘사랑’의 노랫말처럼, 타다 말면 사랑의 불씨로 다시 살아날 수 없으리, 탈대로 다 타시오, 라고 말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소금이 짠맛을 내지 못하면 버려질 거라고, 빛이 어둠을 비추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간절히 호소하시는 것처럼 말이다. 주님은 오늘도 “나는 이 세상의 불을 놓으러 왔다. 이미 그 불이 불타오르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시면서 당신이 불 질러 놓으신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도록 애타게 간절히 기도하고 계신다.
너는 내가 너를 사랑한 것 같이 너도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랑의 불타던 사람이었느냐? 사도 베드로에게 던지신 물음을 우리 자신 각자에게도 던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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