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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묵상 사울 -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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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은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율법의 신봉자였고, 전래의 관습과 관례의 옹호자였으며, 종교적 열정에 가득 차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 하느님을 열심히 섬기는 사람(사도 22,3 참조)이라 칭하고 있다. 그는 자신에 대해 고백한다:

“나는 유대의 율법이 규정한 바에 따르면 정의에 있어서는 흠잡을 데 없는 사람입니다”(필립 3,6). “나는 유대의 율법에 대한 충성심에서 내 동족 중 동년배의 많은 이들보다 훨씬 더 앞서가고 있었으며, 조상들의 종교적 전통에 대해서도 대단한 열의를 가지고 옹호하는 일에 힘썼습니다”(갈라 1,14).

18세가 되자 사울은 가말리엘 밑에서 조상들의 율법에 관해 엄격한 교육을 받기 위해(사도 22,3 참조). 디아스포라에서 예루살렘으로 간다. 율법의 신봉자로서 그는 예수를 메시아로 주장하는 - 그러나 사울에게는 한낱 거짓 메시아에 불과할 뿐인 - 신생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맞서 싸운다. 사울은 사람들이 스테파노를 돌로 쳐서 죽이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런 다음 그는 다마스커스로 떠난다. 다마스커스에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압송하여, 그곳에서 돌로 쳐 죽이기 위해. 그렇게 편협하고 광신적인 인간을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무상의 은총에 대한 복음의, 가장 열정적인 선포자로 변화시키신다.

루카는 그 변화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길을 가는 도중에 ···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쏟아져 그를 에워싸 비추었다. 그는 땅에 엎어지면서 한 목소리가 그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3-4).

사울의 변화는 그가 자기의 주장, 자기가 규정해 놓은 삶의 체계와 함께 땅에 떨어진 것으로 보아 심리학적으로 일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율법의 규정을 존중했던 그가 그것의 무게에 눌리어 땅으로 떨어진다. 그가 자기의 의지로 견지해 왔던 것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의 내부에는 아직도 어떤 다른 경향, 즉 사람은 결코 그렇게 영구히 살 수 없다는 예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격노한 그가 그리스도교 신자에 맞서 싸우고 있는 그의 분노의 정점에서, 그리스도는 그에게 나타나 그의 분노를 사랑으로, 그의 자기 정당성을 무력(無力)으로, 그리고 그의 확신을 실명(失明)으로 변화시킨다. 사울 자신은 자기의 분노가 변화하는 데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그는 단지 과도한 행동에 이를 때까지 분노할 대로 분노했을 뿐이다. 너무 지나친 열정이 갑자기 사랑과 겸손으로 변한 수 있다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통절히 느끼는 분노 속에서 하느님은 인간과 접촉하시고 또 그를 변화시키시는 것이다.

변화는 만남에 의해서 그리고 예수가 그의 박해자와 나누었던 대화에 의해서 일어난다. 왜 자기를 박해하느냐는 예수의 물음에 사울은 이러한 질문으로 응수한다: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는 그때 한 낯선 이가 그의 삶 속에 들어왔음을 감지한다. 그가 이제는 더 이상 전과 같이 그러한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없음을, 그의 지금까지의 삶의 계획이 동요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그에게 대답한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5).

그리스도는 그에게 그의 분노가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영향을 끼치는지를 말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하느님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하느님에게, 예수 그리스도, 즉 그의 구세주에게 폭행을 가한 것이다. 하느님을 위한 그의 열정이 사실은 하느님께 대한 분노였다. 그리스도는 그의 진짜 동기와 의도를 그 앞에 폭로한다. 그리고 그는 사울이 영구히 자기의 참된 본질을 거슬러 살아갈 수 없음을 드러내 보인다: 

“가시 돋친 막대기에다 발길질해 봐야 너만 다칠 뿐이다”(사도 26,14).

모든 열정은 맹목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훌륭한 시작을 했다고,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이익을 섬기는 것이다. 열정 안에는 언제나 권력을 획득하려는 노력 역시 존재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폭력이 잠재해 있다. 다른 이들에 대한 폭력, 그러나 또한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자기 심중의 예감에 대한 폭력이. 순수한 동기가 급속히 불순한 동기로 변화될 수 있다. 즉, 사랑이 미움으로, 열정이 광신으로, 이러한 부정적 변화를 다시 전도시키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직접 관여하여 그 박해자의 주의를 끌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그것이 하나의 객관적인 현상이었는지, 아니면 사울의 영혼 안에 내재되어 있던 온갖 것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던 것인지 결정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는 물론 그에게 맞서, 그의 영혼 안에 내재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벗기고, 그 속의 오랜 확신을 붕괴시켜, 새롭게 보는 방법을 부어줄 수가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사울에게 반대하여, 결국은 초기 교회에 있어서 결정적인 의미가 되었던 하나의 변화를 그의 마음 안에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이 추락은 사울에게 돌아설 것을, 사고방식을 바꾸기를 강요한다. 그의 종전까지의 관념은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그 오랜 확실을 이제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예수는 땅바닥에 엎어져 있는 사울에게 명령을 내린다: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가거라, 그러면 네가 할 일을 네게 일러줄 것이다”(사도 9,6).

지금까지 자기의 의지대로 살아왔고 행동해 왔던 사울은 이제 어느 낯선 이의 의지와, 곧 하느님의 의지와 대결을 하게 된다. 그때 그는 자신의 무력함을 감지하며 스스로 그것을 받아들일 각오를 한다. 그러나 변화에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사울이 일어섰을 때,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된 사실을 깨닫는다. 지금까지 터득해 왔던 그의 삶이 불명확해진 것이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통찰할 수가 없고, 한 가지도 정통해 있는 것이 없게 되었다. 그의 좁은 시야의 귀결은 그를 실명에까지 몰고 간, 완전한 어둠이었다, 3일 동안을 그는 눈이 먼 상태로 있는다. 다른 사람의 인도를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거기에다 사울은 단식까지 한다. 자기의 내면으로 철저하게 들어가 보는 것이다. 외부에 있는 것은 모두 그에게 보이지 않았고 또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하느님이 그에게 그의 시야를 내면으로 향하도록, 그리하여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이 이미 오래전에 마련해 놓으셨던 변화를 지각할 수 있도록 강요하시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사실 언제나 오랜 준비 기간을 가지고 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외부로 드러날 때까지 무엇인가가 무의식 가운데서 은밀하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다음에도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꿰뚫고 들어가기에는 변화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보내어 그로 하여금 사울에게 손을 얹어 다시 앞을 보게 하고, 또 성령을 충만히 받도록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변화는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바울로에게는 다마스커스에서의 경험을 심리학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소화하기 위한 3년이란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아라비아로 떠나가 그곳 사막에서, 그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묵상한다. 그러고는 하느님이 몸소 그를 대하셨고, 그의 길을 인도해 주셨으며, 결국에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에게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을 인식한다. 바로 이 시기에, 하느님이 당신 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유일한 은총에 관한 그의 신학이 무르익는다. 우리들 자신의 정의와 율법에 대한 충성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을 얻은 후 바울로는 다마스커스로 되돌아온다.

“3년 후에 나는 게파를 만나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그와 함께 보름을 묵었습니다”(갈라 1,18).

사울에서 이방인들의 사도인 바울로로의 변화는 그의 천부적인 기질과 성격의 특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바울로는 여전히 열정적인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자유에 대한 열정이라는 것이 달랐다. 그의 약간 강제적인 성격 구조는 이후에도 그의 활동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울로가 그의 모든 특성을 이제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민감하고, 약간은 신경증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가장 깊은 변화를 일으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 오로지 그것으로부터 우리의 구원이 오는 - 에 관한 복음의 통로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변화가 우리의 온갖 약점과 결점, 감성과 상처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리라는 기대를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신경증적인 구조를 보유하게 되겠지만 그것이 더 이상 우리의 삶을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느님의 뜻에 맞는 생활은 오히려 우리의 격정과 상처 안에서 나타난다.

영적 과정의 목표는 격정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격정의 변화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삶에 소용이 되며, 하느님을 열정적으로 선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분노는 더 이상 맹목적인 상태에 있지 않으며 하나의 힘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 힘으로 우리는 다른 이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별 지을 수 있으며, 하느님의 일을 강력하게 끝까지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감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겠지만, 그러니 더 이상 우리가 다른 사람을 향해 가는 길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다른 이들에 대한 감각력으로, 동정과 연민으로 변화된다. 그리고 우리의 격정은 영적 과정에서의 인내와 수련으로, 그리고 실망과 저항 중에 있을 때 그것을 끝까지 버티는 힘으로 변화된다.

야곱과 엘리야 그리고 바울로의 변화에서 인식했던 것을 우리는 성서상의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만나볼 수가 있다. 이를테면 아브라함, 모세, 다윗, 유딧 그리고 에스델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들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거룩하고 완전한 사람이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 역시 자기들의 삶 속에서 자신의 나약함과 무력에 부닥쳤고, 죄악과 잘못에도 떨어졌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점차로 변화시키시어 마침내 그들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선포자로, 그분이 세상에서 하신 활동의 증인으로 만드신 것이다. 신약성서 역시 태어날 때부터 완전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변화된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거기에는 자기의 스승을 위해 죽기를 원하고도 나중에 비겁하게 그를 배반하고 마는, 충동적인 인간 베드로가 있다. 또 천둥의 아들이라 불리는 공격적인 사람들인 요한과 야고보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한 마을이 그들을 맞아들이지 않자,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한 이들이었다(루카 9,50 이하 참조). 그들 외에도 제자들 중 가장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용기 있는 사람인 요한과 충성스럽고 의연한 증인으로 사도들 중 첫 번째로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한 야고보가 나타난다. 또한 거기에는 죄녀였지만 그녀의 열정적인 사랑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첫 번째로 만나볼 수 있었으며 그리하여 사도 중의 사도가 된 마리아 막달레나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서 성서는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완전하고 흠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에 의해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에 의해서 변화될 수 있다. 결정적인 것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어, 하느님께로부터 불림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충동적 행위와 공격성을 그분 왕국을 위한 열정으로 변화시키실 것이다. 그분은 또한 우리의 죄악을 위대한 사랑으로, 우리의 불안과 비겁을 신뢰와 용기로, 우리의 배반을 무조건적 충성으로 변화시키실 것이다. 변화에 관한 이 보고는 위안과 자유를 가져다주는 하나의 복음이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가 고쳐야 한다는 압박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란 하느님이 우리에게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형성하실 수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대단히 미미한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나약함과 비겁, 격정과 불성실에서조차 우리를 야곱과 같은 많은 이들의 조상으로, 베드로와 같은 다른 이들을 위한 반석으로 만드실 수 있다. 변화시키고자 하는 하느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하느님께 자신을 바친다면, 그분은 당신 아들의 모습에 상응하는 형태로 우리를 변화시키실 것이다. 사도 바오로와 같이 말이다.

(참조: 안셀름 그륀, 성서에서 만난 변화의 표징들, 분도출판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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