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와의 만남으로 자기완성을…
- didimausi
- 2023년 2월 8일
- 3분 분량

인간은 ‘너’와의 만남으로 자기완성을 이루기 위해,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 아담(사람)은 자신의 뼈에 나온 하와를 두고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구나”(창세 2,23)라며, 사랑으로 자기완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삼위일체 사랑의 하느님이 일치하여 사랑으로 완성되듯, 인간도 그렇게 사랑으로 완성을 이루는 실존이다. 유대계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을 ‘나와 너의 만남의 실존’으로 규정한다. 사람 인(人)은두 개의 막대가 서로 만나 버티고 있는 형상이다. 사람(人)의 삶은 그렇게 서로 자신의 역할과 사명을 다하면서, 함께 버티어 내야 실존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서 하느님 말씀으로 인간은 온 우주를 만났다. 그렇게 함께 창조된 우주, 대자연과 인간은 만남으로 하느님의 질서 안에서 공존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뜻, 탐욕으로 세상과 우주를 대하면, 우주의 질서와 하느님의 질서를 벗어나는 결과를 만든다. 다시 말해 창조질서를 왜곡하는 일이 벌어진다.
만남은 창조(創造)의 시작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생명이 탄생한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 부처를 만나고, 진리를 만나고 이데아를 만나고 우리의 사명을 만난다.
사회(社會)는 만남의 자리다. 원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여러 사람이 모였다는 뜻에서 이 단어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즉 사단(社壇)에서 풍요를 기원하기 위한 제사를 위해 사람이 모였다는 것에서 만들어진 단어라는 것이다. 다분히 농경사회의 흔적이 남아 있는 단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는 서로 협동하여 공동생활을 하는 인류 집단을 의미하게 되었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은, 그래서 관계와 만남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관계는 나와 너 사이의 만남이요, 상호 작용이다. 서로 관계를 맺으려면 서로 만나야 한다. 서로 만나야만 관계가 이루어진다. 관계와 만남은 상호불가분이다. 관계와 만남은 너와 나와의 모든 대인관계의 시작이며 모든 것이다.
한편 인간의 만남 자체가 서로에게 생지옥의 시작인 경우도 있고, 또 이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보여주기도 한다. 천지창조 때부터 아담과 하와는 하늘의 아버지 완전하심을 닮으라는 자기완성의 소명이 주어졌다. 하느님을 닮기 위해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 나아가라는 명령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낙원을 잃고서 생지옥의 세상에서 서로 만나야 했다. 이제 인간은 지상 천국에서 나와 자신의 자유의지로 천국과 지옥을 선택하면서 살아야 했다.
우리는 깊고 창조적인 행복한 만남을 가져야 한다!
인생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즐거운 만남’ 속에 있다. 인간의 불행은 어디에 있는가. ‘저주스러운 만남’ 속에 있다. 만남이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과의 만남과 관계를 기준으로 최후심판 내리시는 장면을 설명해주신다.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7-40).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우화를 통해 이 상황을 설명하였다.
한 남자가 예수께 다가와 숨어 계시기만 하는 하느님께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왜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십니까? 저는 평생 하느님을 뵙기를 기다리면서 매일 기도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고 부드럽게 대답하셨다. “어느 날 가난한 거지가 맨발로 배를 굶은 채 말했다. 하느님 자비를 베푸시어 당신의 힘을 진정시키시고 당신의 영광을 낮추시어 저같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이 당신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저희가 당신을 제대로 봤다간 장님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한 조각의 빵, 차가운 물 한 잔, 따뜻한 겉옷, 그리고 작은 움막이 되셨고 그 움막 앞에서 아기를 돌보는 여자가 되셨다. 그 거지는 속삭였다. 주님 감사합니다. 당신은 저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빵, 물, 옷, 부인과 아이가 되셨으니 제가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당신이 갖고 계신 사랑스러운 그 얼굴들에 경배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몸을 취하심으로써 모든 가정이 교회가 되고, 모든 아이가 아기 예수가 되며 모든 음식과 음료 성찬이 될 수 있게 하셨다. 하느님은 수많은 모습으로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셨다. 삼위일체 사랑의 신비인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들과 만나시면서, 우리 인간들끼리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그 방향을 보여주셨다.
삼위일체 사랑의 신비는 하느님을 하나의 위격체 인간으로서 설명한다. 첫째, 영의 위격적 실재에 관해서는 그것이 동시에 구원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구원의 선물인 영에 관해서는 그것이 사물이 아니라 위격적 실재라고 말해야 한다. 둘째, 영의 위격과 아버지와 아들의 위격 사이의 구별에 관해서는 영이란 사람과 세상 안에 아버지와 아들이 현존하는 현실성 그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셋째, 사람에게 아버지와 아들이 현존하신다는 데 관해서는 이 현존이란 인간의 정신적 노력 - 예컨대 기억 - 의 결과가 아니라 명백히 현세의 현실체험을 초월하는 한 사실이라고 말해야 한다. 한마디로 나와 너가 자기로서 완성되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완전하심 같이 인간완성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이신 성령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성서는 우리에게 전하고 말한다.
우리와 같은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과 같은 인간 완성을 위함이라는 창조의 목적이 있다.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고리는 바로 성령이다. 성령은 하느님과 인간,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른 연결하는 사랑의 고리, 사랑의 불길이다.
사랑은 모든 덕의 완성을 이루고 엮는 끈이다. 천지창조 모든 피조물은 모두 사라지지만, 인간의 사랑은 영원히 남는다. 창조주 사랑의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중하고 절대로 요청되는 하느님과 우리 인간들과 만남에서 으뜸 계명인 사랑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하지 않고 사라져 버릴 것에만 집착하며 짧은 인생을 소진하는 것은 동물적 생존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생명으로 태어난다는 그 자체가 하느님 사랑, 너와 나 만남의 기적이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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