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탓이로소이다! - 타인의 문제는 노 프라블럼, 내 문제는 빅 프라블럼
- didimausi
- 2024년 4월 26일
- 6분 분량
류시화 시인은 쓴 최근 책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에서 ‘타인의 문제는 노 프라블럼, 내 문제는 빅 프라블럼’이라 한 글을 읽고 묵상해본다. 류 시인은 인도 갠지스 강변 바라나시에서 머물 때 종종 찾아오는 한 지인과 짜이차를 마시면 나누던 대화를 전해준다.
영화보다 생생하고 인상적인 사건들과 삶의 애환을 들으면서 소설가가 아닌 나 자신을 한탄하기도 하고 슬픈 사연에는 연민의 감정이 일기도 했지만, 그 인도인 남자는 그럴 때마다 이 세 가지를 말했다.
“노 프라블럼!”
“그 사람 업보야.”
“걱정할 일이 아니야. 신이 도와줄 거야.”
물론 그는 태어날 때부터 힌두교인이라서 신의 섭리를 믿고, 과거의 행위가 지금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카르마 법칙을 신뢰한다. 그 법칙을 받아들이면 모든 일이 노 프라블럼, 즉 문제없음이다. 악당 같은 집주인이 터무니없이 올리는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강가에서 비닐 천막을 치고 생활하는 가족도, 서른다섯 살이나 많은 한국 여성과 결혼했다가 마침내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돌아온 28세 청년도, 아내가 무슬림 조폭과 눈이 맞아 집에서 쫓겨난 남편이 어린 딸을 데리고 살면서 사원 앞에서 가짜 사두 행세를 하면 생계를 잇는 일도 다 업보이고 노 프라블럼이었다.
노 프라블럼이 향할 곳은 나 자신이다. 노 프라블럼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적용해야 한다. 그때 그 노 프라블럼은 가슴에 피는 꽃이 된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는 ‘마치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도와줘야 한다’는 가르침만큼 종교적 진리는 없다. 다리가 부러진 사람에게 다가가 위로하는 얼굴로 “노 프라블럼! 신이 도와주실 거예요”하고 말하고 지나간다면 그 사람을 두 번 부러뜨리는 것이다. 그때 그는 신뿐만 아니라 당신에게서도 멀어진다. 화살 맞은 사람은 일단 화살을 빼 줘야 한다. 화살을 맞을 수밖에 없는 업보를 토론한다면 화살을 몇 개 더 꽂는 일이다.
타인의 문제에 대해 “노 프라블럼”을 외치는 일만큼 쉬운 일이 없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에 대해 “노 프라블럼”을 외치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 없아. 혹시 나는 타인의 큰 문제는 노 프라블럼이고 나의 사소한 문제는 빅 프라블럼이라고 하면서 살아오지 않았는지.
‘나 자신의 일에는 노 프라블럼, 타인의 일에 대해선 깊은 공감을.’ 이것을 그 친구가 실천했다면 우리 둘이 나눠 먹는 짜이와 사모사가 더 맛있었을 것이다(그것과 상관없이 진짜 맛있었다. 지금도 입에 군침이 돈다). 우리가 타인의 상실과 아픔을 공감해줄 수는 있어도, 그것이 얼마나 깊고 아픈지 가늠하기는 어렵다.
늦게 아들을 얻은 남자가 있었다.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바꾸지 않을 아들이었다. 그 아들이 열병을 앓다가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남자는 충격이 커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어떤 위로도 소용없었다.
마을의 수행자가 찾아와 남자에게 말했다.
“아드님의 죽음은 신의 뜻입니다. 울음을 그치세요. 영혼은 영원하면 결코 죽지 않습니다. 이 육신은 옷과 같아서 죽음은 우리가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아요. 아드님은 계속 살아 있고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어느 날 남자는 그 수행자의 집을 지나가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남자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모여 있지요?”
누가 대답하기도 전에 집 안에서 목놓아 우는 소리가 들렸다.
다름 아닌 그 수행자의 울음소리였다. 안으로 들어간 남자는 슬픔을 못 이겨 울부짖는 수행자를 발견했다.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왜 이렇게 울고 계시죠?”
수행자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2년 동안 폐결핵을 앓았소. 의사가 염소 우유를 마시면 회복될 거라고 해서 염소를 한 마리 사서 매일 우유를 마셨소. 정말 사랑스러운 염소였소. 그런데 오늘 그 염소가 갑자기 죽고 말았소.”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죽은 염소 때문에 우는 건가요? 내 아들이 죽었을 때는 울지 말라고 조언하지 않았던가요? 영혼은 영원하며 옷을 갈아입듯이 죽음도 겉으로 보이는 현상일 뿐이라고. 그런데 염소의 죽음 때문에 이렇게 통곡하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수행자가 화를 내며 말했다.
“그 죽음과 이 죽음은 엄연히 다르오. 죽은 아들은 당신의 아들이고, 이 염소는 내 염소란 말이오!”
그러고는 다시 꺼억꺼억 울기 시작했다.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울음을 만든다(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22-224쪽).
나도 인도 바리나시에 한번 방문한 적이 있다. 기차역의 짐꾼들이나 거리에서 인력거를 끄는 노동자들의 입에는 노 프라블럼이라는 말이 붙어있었다. 신의 뜻을 입에 달고 인사를 했다. 마치 네 문제를 내가 가지고 갈 테니 나한테 신한테 맡기라는 듯이 들린다.
나는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힌두교도들같이 태어날 때부터 신의 뜻대로 살려고 하지만, 하느님의 섭리에 내어 맡기는 일상생활 태도, 신앙심이 거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신의 섭리대로 하느님과 함께 사셨다. 인샬라, ‘신의 뜻대로’라는 신앙생활 태도가 부럽기조차 했다.
복음서가 전하는 역사적 인물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들의 모든 문제를 노 프라블럼, 하느님께 맡기고 십자가에 매달리셨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하느님의 뜻을, 그리고 당신의 뜻을 다 이루셨고, ‘인샬라’(하느님의 뜻대로)라고 말씀하시면서 운명하신 것이다. 모든 인생의 문제는 등에 지고 가면 짐이 되지만, 자신의 문제를 안고 가면 사랑이 된다.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프라블럼을 자신의 프라블럼으로 살아가는 것, 곧 사랑의 짐으로 지고 안고 사는 인생이다. 사랑하는 이여, 아무 걱정하지 마시라!
하느님 아버지!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모르니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이 행하는 모든 문제, 프라블럼을 나의 프라블럼으로 속죄하여 사랑으로 감수하겠으니 자비와 용서로 받아 주옵소서! 노 프라블럼! 예수님 마지막 당부의 기도로 이제 하느님의 뜻을 이루셨다. 마쳤다. 인샬라!
한마디로, 인생의 모든 프라블럼을 전능하신 하느님께 맡기면 노 프라블럼, 문제없음이며 인간의 뜻으로만 해결하려면 빅 프라블럼,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 뜻대로만 산 인생은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닐 수 있다. 그게 문제일 수 있다. 하느님 아버지 뜻대로 사는 인생은 노 프라블럼, 그렇다면 모든 인생의 문제가 노 프라블럼이다. 그 길을 찾아 걸어가야 한다. 인간이 지닌 인생의 모든 프라블럼은 자신이 만든 것일 수 있으나, 그 풀이는 우리 인간 영혼 안에 성령과 함께 계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뜻대로 풀어 나아가서 완성되어야 한다. 노 프라블럼, 문제가 없어야 우리 인간 구원이 이루어 진다. 하느님 나라는 모든 것이 노 프라블럼, 문제가 하나도 없이 다 풀리고 해결되는 곳이다. 우리가 지옥이라고 일컫는 곳은 모든 것이 문제이고, 영원히 문제를 풀 수 없는 프라블럼, 끝날 길 없는 절망, 희망과 사랑이 없는 영원한 문제라는 곳으로 묵상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라고 걱정거리라는 오만가지 생각은 상상에 의한 것이다. 실제로 벌어지지 않을 문제의 일을 미리 생각해서 애태우고 근심 걱정을 한다는 것이다. 성서에서도 오늘 걱정은 오늘하고 내일 걱정은 내일하라는 말씀이 있다. 성서에서 걱정이라는 단어는 ‘나누다’라는 동사와 정신이라는 명사가 합쳐진 말이다. 즉 우리말의 ‘정신사납다’라는 말처럼, 계속 정신이 나누어지게 되면 마음은 온통 걱정과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나도 한평생 신부로서 살면서, 사목활동을 한 것에 회한이 있다. 사제의 삶 속에 들어있던 희로애락의 시간, 이제 마무리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늘 그때를 생각하며,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에 나오는 사제의 마지막 고백을 가슴에 품고 있다. 시골 신부는 자신이 일생 살아왔던 모든 문제와 죄를 환속한 동료 사제에게 고백한 후 ‘모든 것이 은총’이었다며 생을 마감한다. 그 신부의 모습은, 마치 골고타 언덕 십자가에 매달린 우도처럼 자기 일생 모든 죄를 하느님께 자비와 용서를 청하는 모습이며, 그 한순간에 사랑 자체인 주님의 품 안에 안겨 선종한 것이다. 사실 시골 신부는 사제로 일생을 살면서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체험했고, 마침내 구원의 순간에 그것을 확인하였다. 정말 사제로서 내 삶 전체가 ‘어느 시골 신부’의 마지막 말처럼 하느님 사랑 안에 있었다는 것은 절대 의심할 수 없다.
우리는 믿음의 길을 가다가 어떤 문제에 직면하면,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본다(루카 9,57-62 참조). 하지만 시골 신부처럼 모든 것이 은총이고 사랑이라면서 자신의 프라블럼을 전능한 하느님의 사랑에 맡기면 두려움은 사라지고 평화가 올 것이다. 인생의 모든 문제를 ‘네 탓이다’라 한다면, 그 문제는 탓 있는 자만이 풀 수 있다. 그러나 ‘내 탓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빅 프라블럼이라 할지라도 나 자신의 회개 생활로 풀어나갈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풀리지 않는 문제는 없다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9-13).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주시는 성령, 십자가 전능의 사랑으로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는 다 풀리며 해결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오! 복된 탓이여! 오! 복된 내 프러블럼이여! 전능하신 하느님 사랑으로 구세주 예수님을 이 세상 문제아인 나에게 오게하신, 오! 복된 내 프라블럼, 내 문제여!
다시, 류시화 시인의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에 나온 이야기(‘문제를 발견하는 문제’, 258-259쪽)를 인용하면서 마무리한다. 문제는, 자기 문제만 보는 나 자신이 문제라는 말이다!
한 농부가 붓다를 찾아와 말했다.
“작년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서 농사를 망쳤습니다. 거의 굶어 죽을 뻔했습니다. 올해는 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걱정입니다.”
붓다는 남자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농부가 말을 이었다.
“내 아내는 좋은 여자입니다. 하지만 가끔씩 잔소리가 심해 피곤합니다. 아이들도 잘 컸지만, 나를 존중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또 때로는….”
남자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문제를 나열한 후, 붓다가 해결해 주리리라 믿으며 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붓다는 말했다.
“나는 그대를 도와줄 수 없다.”
남자가 놀라서 물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붓다가 말했다.
“모든 사람이 각자 83가지의 문제를 갖고 있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열심히 노력하면 한두 가지는 바로잡겠지만, 또 다른 문제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예를 들어, 그대는 결국 사랑하는 이들을 잃을 것이고,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남자가 화가 나서 소리쳤다.
“당신이 위대한 스승이라 생각했고, 나를 도와줄 것이라 믿었소.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면, 당신의 가르침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소?”
붓다가 말했다.
“한 가지 해결 방법이 있긴 하다. 사실 그대가 이 모든 문제들에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대가 가진 84번째 문제 때문이다.”
‘84번째 문제라고요? 83가지 문제로도 부족해서 나는 한 가지 더 갖고 있단 말인가요?“
붓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 그대의 84번째 문제는 ‘모든 것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마음’이다. 만약 그대가 이 ‘문제를 발견하는 문제’를 자각하고 그것에서 벗어난다면 83가지 문제들에 대해서도 놓여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문제를 발견하는 마음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삶의 아름다움을 놓치고 있다면 혹시 뛰어난 문제 발견자이기 때문은 아닐까?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보다 문제를 발견하는 눈을 더 크게 뜨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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