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이란 다큐멘터리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 didimausi
- 2024년 5월 20일
- 6분 분량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란 류시화 시인의 책에 나온 ‘인생이란 영화다’라는 글을 보며 내 인생의 마지막을 묵상한다. 우선 시인의 글을 먼저 소개한다.
지금까지 영화 한 편을 제작했습니다. 제목은 「인생The Life」입니다, 감독은 저 류시화이고, 주연도 저입니다. 시나리오도 물론 작가인 제가 썼습니다. 조연은 그동안 제가 만난 분들입니다.
영화의 총감독은 당연히 신이며, 캐스팅도 저의 담당인 것처럼 보이나 그분에게 전권이 있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를 압축하면, 주인공의 계획대로 삶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그 대신 주인공이 무의식적으로 끌어당긴 일들, 의도에 없던 사건들, 우연을 가장한 만남들이 영화 곳곳에서 흥미롭게 펼쳐집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은 리허설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모든 상황과 대사가 실제 장면입니다. 연기 수업을 받은 적이 없음에도 주인공의 뛰어난 연기력은 곳곳에서 빛을 발합니다. 심지어 연기 재능이 없는 연기를 하는 데도 뛰어납니다. 의사 앞에서는 진짜 환자가 되어 연기하고, 슬퍼서 울 때도 눈물 용액이 필요 없습니다. 사랑에 빠졌을 때는 꽃과 선물 같은 소도구를 직접 챙기며 최선을 다합니다. 배신을 당하거나 실연을 겪은 장면에서는 오버액션하라고 지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화 촬영이 진행되면서 차츰 그는 혹시 이 대본을 매일 자신이 창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합니다. 그리고 자신만이 앞으로의 대본을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히말라야 트레킹과 다르질링의 차밭, 자원봉사가 필요한 아프리카 등 다양한 로케이션 현장과 더 다양한 국적의 조연 배우들을 화면에 등장시킬수록 영화가 더 흥미진진하고 다양해지리라는 것도, 또한 이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기쁜 일과 슬픈 일, 만남과 헤어짐 전부에게 “네”라고 말해야 하는 것도 깨달아 갑니다. 그것이 인생 영화의 주제라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제작 완료 일은 언제가 될지 주인공인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총감독님에게 달린 일입니다.
우리가 각자가 원하는 것을 이 영화 속에서 찾고 있습니다. 저는 저의 영화를 만들고 있고, 당신은 당신이 주인공인 영화를 만드는 중입니다. 당신도 당신 영화의 대본 작가이면서 또 그 대본대로 연기하는 배우입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독특한 캐릭터이니 자부심을 가져도 됩니다.
때로는 조연 배우들이 주인공인 당신보다 더 열연을 펼치거나, 더 멋있고 화려한 의상을 입고 등장해 당신 역이 초라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우주의 중심인 영화인 줄 알았는데 은하계 맨 가장자리, 별로 빛나지도 않는 스타에 불과하다고 느끼며 좌절합니다. 하지만 이때 ‘별들도 멀리서 보면 작아 보인다’는 내레이션이 흐릅니다.
조연 배우들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영혼을 자극하기 위해 신이 출연시킨 연기자들입니다. 결코 당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단역들이 아닙니다.
부모님과 형제자매, 학교 교사와 친구들, 만났다가 헤어진 여성들, 당신 영화에 출연을 취소시켜도 됩니다.
리허설도 없고 재촬영도 없는 이 영화에서 당신과 나는 감독, 주연, 조연, 엑스트라, 행인1, 행인2 등 싼 출연료로 1인 다역을 해내는 전문배우들입니다. 또한 우리는 「인생」 영화를 만들고 있는 동시에 연기력을 높이 인정받아 「업業」(영어 제목 「카르마」)이라는 영화에도 더블 캐스팅되어 출연하는 중입니다. 제작은 전량 현지 로케이션으로 계속됩니다.
이러한 영화 기획, 제작, 감독이 나 자신! 착각도 자유지만 내 인생이 영화의 모든 것이 된다라는 생각에 잠겨본다. 찰리 채플린이 말했던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고. 계속 류시화 시인의 책에 나온 말이다.
내가 아는 사람의 실제 이야기다. 신은 비극과 상실을 일으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그렇게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 가슴이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자신이 계획했던 삶을 기꺼이 놓아 주어야 한다’(조셉 캠벨). 우연을 거부하는 것은 신의 계획을 무효화시키는 것과 같다.
우리가 죽기 직전에 우리 눈앞에 한 편의 영화처럼 내 인생이 펼쳐진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이 옳다.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지는 삶이 바로 그것이다!
인생은 길을 보여주기 위해 길을 잃게 한다. 돌아가는 길투성이의 인생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일과 행복한 일은 동시에 일어난다. 플랜A보다 플랜B가 더 좋을 수도 있다, 가 아니라 더 좋다. 플랜A는 나의 계획이고, 플랜B는 신의 계획이기 때문이다(류시화의 책).
시편 기도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야 팔십년”이다. 그렇게 훅 지나가는 짧은 인생은 내가 세운 플랜A, 내가 기획·제작한 새드 무비, 슬픈 영화로 끝나는 듯한 다큐멘터리다.
최근 상영된 두 편의 영화를 떠올린다. 전두환의 1212쿠데타를 다룬 <서울의 봄>과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을 다룬 <길위에 김대중>이다. 전두환이 나오는 영화가 플랜A라면, 김대중이 나오는 영화는 플랜B이다. 두 사람 모두 대통령을 했다. 전두환은 자신의 기획대로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김대중은 마치 신의 계획대로 인간 희망의 길을 제시한다. 전두환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권력을 잡고 일신의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자신의 동료 군인들뿐만 아니라, 광주시민을 학살했다. 사조직 하나회를 중심으로 국가권력을 찬탈한 전두환은 군부독재 17년 흑역사의 주인공이다. 전두환은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는 법원의 판단 아래,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렸다. 반면에 ‘길위에 김대중’의 삶은 그야말로 플랜B와 같은 신의 섭리로 보인다. 그의 삶은 한국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희망과 빛의 역사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주의, 인권, 평화를 위해 헌신하면서, 테러 및 납치살해, 사형선고 등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겪고, 6년간 감옥생활을 하고, 40여 년간 망명, 연금, 감시당하는 삶을 살았지만, 심지어 가족과 친지들까지 감옥에 가고, 고문당하는 고통을 겪었지만, 단 한 번도 좌절하거나 불의한 세력과 타협하지 않은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전두환 신군부가 1980년 5월,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내란음모로 조작하고 김대중 대통령을 그 수괴범으로 몰아 사형선고를 하고, 신군부에 협조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죽는 것이 두렵지만 내가 살기 위해 타협하고, 국민에 의한 민주적 선택이 아닌 방법으로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국민과 역사를 배반하는 것이다. 내가 타협하면 나는 역사와 국민에게 영원히 죽고, 내가 신념을 지키고 죽으면 역사와 국민에게 영원히 살 것이다. 나는 역사와 국민을 믿는다.”
김대중 대통령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50년 만에 처음으로 민주적, 수평적 정권교체를 했다.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킨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취임사에서 “국민이 주인 대접을 받고, 주인 역할을 하는 참여민주주의,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를 선언했다.
국가는 국민의 주인 됨, 곧 민주적 결정권과 인권 그리고 행복 추구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국가의 존재 이유와 목표는 모든 국민이 평등하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정부가 국민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한마디로 말하며 국민에 의한 정부이다. 참여의 정치이다. 참여의 정치란 백성이 주인이 되는 정치, 백성이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정치, 백성이 스스로 신이 나서 건설하고 나라 지키는 정치, 백성이 그 속에서 발전하는 정치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국민의 자유와 평등과 복지를 향상시키며 세계 각국과 평화로운 협력을 하는 것이다.
박정희 군사쿠데타로 시작해서 전두환, 노태우까지 17년 넘은 군부독재와 싸워 국민주권의 승리라는 희망을 보여주었던 김대중은 신의 계획, 플랜B를 잘 이루어낸 인물이다. 그 플랜B는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로 이끌어 제2의 건국을 이루었다. 박정희나 전두환은 자신의 권력과 안위만을 위하여 수많은 국민을 희생시켰다. 게다가 자자손손 부귀영화를 누릴 부정한 돈을 쟁여두었다. 영화 <서울의 봄> 마지막 장면에서 수도경비 사령관이 전두환에게 ‘너는 군인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자격이 없다’라고 말한다.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차지철을 보면서 한 말이긴 하지만)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이란 소리를 듣고 최후를 맞았다.
이 두 영화를 보면서, 우리 인생은 자신이 만들어 내는 플랜A만 있는 인생이 아님을 확인한다. 그리고 위의 류시화 책에 나오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도 떠올렸다. 시인은 대학 신입생 때 학교 앞 경양식 집에 가서, 친구와 붉은 조명 아래 앉아 희미한 메뉴판을 보고 나름대로 신중하게 오므라이스를 시키며 벌어졌던 이야기를 전한다.
처음 먹어보는 양식이 그런 맛일 줄은 정말 상상하지 않았다. 느끼하기만 하고 아무 맛이 없었다. 게다가 ‘양식’(양이 많은 음식)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양이 너무 적었다. 하지만 뭐라 내색할 수 없어서 숟가락 소리가 나든 말든 바닥까지 긁어먹은 후 우리는 허무하게 밖으로 나오고야 말았다. 호주머니에 있는 전 재산을 털어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지불하고서.
친구와 나에게 오래 기억에 남은 사건이다. 지금도 가끔, 이름난 시인이 된 그 친구가 전화해서 말한다.
“그때 우리는 에피타이저만 먹고 실망해서 나왔지. 오므라이스는 구경조차 못 했어.”
달랑 수프 맛만 보고서 정작 우리가 먹으려 했던 메인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불평하며 연극 무대 같은 그곳을 나온 것이다. 영문을 몰라 쳐다보는 웨이터와 얼굴을 포갠 남녀를 뒤로하고서.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그리고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혹시 이 오므라이스 이야기가 당신의 이야기는 아닐지.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평생 애피타이저만 먹으면서 “내가 상상한 음식이 아니야”하고 불평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으로 아직 앞에 나타나지도 않은 메인 요리를 평가하며 좌절과 실망 속에 너무 일찍 포기하는지도. 그래서 자신이 삶에게 기대하는 것뿐 아니라 삶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까지 부정하면서 희망과 화해하기를 삶이 거부하는지도 자신을 위해 신이 준비한 멋진 메인 요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253-254쪽)
애피타이저는 플랜A, 본 메뉴는 플랜B. 정작 맛보아야 할 것은 본 메뉴. 플랜A는 내 생각이고, 플랜B는 신의 계획이라면, 인생의 본 맛을 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내 묘비명에 ‘피에타, 주님의 뜻에 충실한 믿음’이라고 새겨 넣었으면 한다. 나는 한 사제로서 56년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의 마지막 선종을 보았고, 종부성사를 집전하였다. 가끔은 그들의 선종을 지켜보면서, 내 인생의 마지막 장면을 묵상한다.
골고타 언덕 위 십자가에서 선종하신 예수 그리스도 옆에 함께 매달려 있던 좌도와 우도를 떠올린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예수를 모독했던 좌도.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라며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던 우도. 예수께서는 그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을 남기신다(루카 23,39-44 참조). 나는 이 둘을 보면서, 예수님을 모욕했던 좌도는 플랜A의 삶이고, 회개하며 하느님의 뜻을 청하는 우도는 플랜B의 삶이라 생각해 본다. 인생의 마지막 장면, 내 생각과 계획을 끝내 놓지 못하고 선종하는 좌도의 운명을 자처하고 최후를 맞이하는 사람들. 반면에 플랜B, 신의 계획을 따르는 예수님, 그리고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라며 만복소(萬福所)에 들어가는 우도와 같은 사람들.
야구에 유명한 명언이 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다 진 경기인 것만 같아도 9회말 투아웃에 역전홈런을 칠 수 있다. 우리 인생의 플랜B는 9회말 홈런과도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부여! 저들은 자기가 하는 바를 모르오니 저들을 용서하소서’라며 최후를 맞이하신다. 그것은 우리 모두를 플랜B에로의 초대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군대를 사조직 운영하듯, 또 서부활극처럼 군사력으로 정치를 했다. 사반세기 넘는 이들의 군부독재 시절, 그들은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면 호의호식을 했다. 그들은 철저히 플랜A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십자가의 좌도처럼 아무런 회개도 없고, 자신들이 기획한 데로 살면서 사라져버렸다.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이 기획하고 감독하는, 플랜B를 믿는 사람들이다. ‘내 인생이란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하느님의 플랜B에 맡겨본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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