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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에 언제나 태양이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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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와 설리번 선생님의 일화를 다룬 영화 ‘미라클 워커’(The Miracle Worker)의 가장 유명한 장면. 설리번 선생은 헬렌 켈러에게 물 펌프를 통해 처음으로 ‘물’(water)의 의미를 깨닫고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한다.

     

그의 일생을 담은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헬렌 켈러가 초등학생 나이에 우물가의 물을 손바닥에 부으면서 물(water)이란 단어와 손바닥의 느낌을 연결하면서, 주위 모든 사물과 자연을 자신의 몸으로 느끼며 소통하는 순간이다. 헬렌이 마치 정상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물의 세례에서 성령을 받아 모든 사물과 상대방 언어를 느낌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된 성령강림 기적 체험을 연상하게 되었다. 이제 헬렌은 눈을 뜨고 듣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날 그 순간부터 헬렌은 이랬다. “캄캄한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내 마음속에 언제나 태양이 떠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나의 유토피아이다. 감각의 장애가 책이라는 친구들의 아름답고 고마운 이야기로부터 나를 가두는 일도 없는 것이다.” “나는 나의 한계에 대해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한계는 나를 절대 슬프게 하지 않습니다”(I never think about my limitations, and they never make me sad).

     

성서의 ‘당신의 빛으로 빛을 보나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말씀과 ‘내 마음속에 언제나 태양이 떠 있다’라는 말이 다르지 않다고 본다. 헬렌 켈러 여사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태양 같은 성령의 빛이 있고, 그 빛 안에서 살기 때문에, 캄캄한 세계 속에 산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몸 안을 비추는 태양 빛보다 더 빛나는 성령의 진리의 빛으로 광명천지를 살아 나아갔다. 성령의 빛이 보여주는 대로, 성령의 말씀이 들려주는 대로, 성령이 말씀하시는 대로 소통한다는 말이다. 헬렌 켈러 여사가 두 팔을 벌려 공중을 더듬으면서 ‘오늘 날씨는 좋구나’ 할 때면, 이는 대지의 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정말 헬렌 켈러의 보고, 듣고 말하는 일상생활을 보면서 이런 성서 말씀을 묵상하게 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지적하신 예수님의 말씀이다. 너희가 지금 잘 보이고 잘 듣고 말한다고 하니 말한다. 너희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너희는 보고 너희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마태 13, 10,17).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루카 8,9-10).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실 때 자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어라, 하고 말씀하시면서 말씀을 이어가신다.

     

사지가 멀쩡하고 온몸이 제아무리 정상적이라 할지라도 성서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같이 진리의 영과 함께 보고 듣고 말하지 않는다면, 자신만의 지식으로 편견만을 말하기 때문에 그들은 전체 진리를 부분적으로만 말하게 된다. 그것은 진리도 아니고, 그들 자신의 허세일 뿐이다.

     

창세기 이야기처럼,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지만, 하느님의 완전함에는 이르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창조되었다. 인간 한계는 우리 안에 언제나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 그 하느님의 성령의 힘으로 한계성을 극복하여 인간의 완성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헬렌 켈러는 ‘나의 한계에 대해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 한계는 나를 절대 슬프게 하지 않는다. 내 마음속에 언제나 태양이 떠 있기 때문에’, 그 태양 빛으로 자신의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실제, 정신과 마음의 이상이 생긴 정신병자들이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정상적이라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들이 아무리 정상이고 상식적이라 말해도,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정상적이고 상식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성서에 보면 악령을 물리치시는 예수님을 보고 악령들은 더 이상 인간 안에 살 수 없으니 자신들을 돼지 무리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하자 그대로 되었고, 그 돼지 떼가 바다로 돌진하자 악령들이 떼로 죽는 장면이 전해준다. 이성적 사랑의 동물인 인간 안에 악령이 함께 한다면 한낱 돼지만도 못한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성령으로 격려된 이는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사도 바오로께서 지적했다. 성령과 함께 생각하고, 보고 듣고 말하는 삶은 성령께 격려된 삶으로서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다운 일상의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간다운 삶을 산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완전하심같이 완전한 자가 되려는 복음 삼덕행을 닦아 나아가는 의지와 뜻을 지녀야 인간다운 삶이 가능하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일상생활이어야만 하느님의 자녀다운 인간의 삶이 가능하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일생을 사셨던 예수님의 삶은 우리 전례와 기도생활의 종합인 미사, 성체성사 안에서 사랑으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신다.

     

시몬 베이유는 신과 인간 사이의 약속, 계약에 의해 우리 생명의 음식, 빵조각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한다. ‘이는 내 몸이다.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을 기억하기로 이(약속, 계약)를 행하여라.’ 한 조각 빵과의 만남이 신과의 만남임을 믿음으로써 신에 대한 유일한 경배의 시험을 통과한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우리의 갈망은 신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조건이기 때문에 영혼과 신 사이에 진실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다(시몬 베이유). 계약의 빵과 만남이 현실의 갈망 지점까지 이를 때 영혼 안에서 무언가 실체적 변화가 일어난다. 즉, 우리 인간 영혼 안에서 성체성사 사랑과 만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 전체를 내어주신 사랑으로 우리 인간 자신도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열두 사도들은 문이 닫힌 어두운 방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강림사건을 체험하고 온 세상의 빛으로 파견되고 사도들이 되었다. 우리 인간 안에 성령이 함께하기를 청하는 기도로서, 성령은 내 마음속에서 태양이 빛나듯, 복음의 진리를 비추고 빛의 사도가 될 수 있도록 도운다. 인간은 자신의 영혼 안에 성령을 가득 채우고, 악령 같은 그 모든 것을 다 비우는 비움의 영성생활을 해야 한다. 인간 자신 안에 성령의 자리는 없고, 악령들만 설친다면, 그 악령들은 서로 못 잡아 먹어서 죽겠다는 소리만 낸다. 예수님께서도 ‘너희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와서 온갖 악을 맺는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공광규 시닝의 ‘속빈 것들’이란 시다(시집 《담장을 허물다》, 창비, 2013).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들은 다 속이 비어 있다

     

줄기에서 슬픈 숨소리가 흘러나와

피리를 만들어 불게 되었다는 갈대도 그렇고

시골 뒤란에 총총히 서 있는 대나무도 그렇고

가수 김태곤이 힐링 프로그램에 들고 나와 켜는

해금과 대금도 그렇고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회의 마치고 나오다가

정동 길거리에서 산 오카리나도 그렇고

     

나도 속 빈 놈이 되어야겠다

속 빈 것들과 놀아야겠다

     

그래야 내 안에서 가득한 성령의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 나오리라.

‘해금에 기대어’라는 고두현 시도 있다.

     

그리움 깊은 밤엔

해금을 듣습니다.

바다 먼 물소리에

천근의 추를 달아

끝없이 출렁이는 슬픔의 깊이

재고 또 잽니다.

     

유난히 풍랑 많고 한류 찬 물밑 길

상처에 소금 적시며 걸어온 그대

물살 센 한 생애가

이토록 쿵쾅이며

물굽이 쳐 아픕니다

     

40세로 단명한 실존문학의 선구자 프란츠 카프카의 말이다.

     

죽음이란, 날마다 밤이 오고 해마다 겨울이 찾아오는 이치와 같이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밤이나 겨울이 다가오면 우리는 준비를 한다. 그렇듯 죽음에 대한 준비는 단 하나밖에 없다. 훌륭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우리들이 훌륭한 인생을 살면 살수록 죽음은 더욱더 무의미한 것이 되며, 그에 대한 공포도 없어진다. 그러므로 성자에게 죽음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한 세상에서 훌륭히 잘 살아 하늘나라로 오르는 선종 준비를 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훌륭한 인생이란 역사적 인물 예수님 같이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기를 시작하고 진행시키다가 마침내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삶이다. 그것은 인간 완성의 삶이다. 우리에게 남은 삶이 얼마인지 모르나,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깨어나지 않을 잠인 죽음 전에 그래도 언젠가 깨어날 수 있는 생을 살라는 은총의 시간을 허락하신다. 이 그 마지막 기회인 은총의 삶을 살기에는 우리 인생이 지내놓고 보면 너무나도 짧고, 구약 코헬렛의 말씀대로 ‘허무로다. 헛되고 헛되도다’일뿐이다. (마태 26,47-56; 마르 14,43-50; 요한 18,1-11)

     

그토록 짧은 인생, 마지막 기회의 은총으로 주신 여생에 다시 깨어날 수 있는 마지막 준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예수님의 제자 유다가 주님께 입맞춤을 신호로 스승을 팔아넘기는 배신의 행위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성주간 예절 중에 나오는 ‘복된 죄’(Felix culpa)란, 주님의 은총으로 회개의 가능성을 전제하고 그것이 인류 구원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 구원을 가져온 오 복된 죄여! 인류 구원이 당신께 맡기나이다. 주님의 복된 선종을 맞이하자!

     

어떤 대군도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한 송이의 포도,

하나의 무화과까지도 그렇지 못하다.

     

지금 그대가 나에게 ‘무화과를 먹고싶다’고 말한다면 나는 대답할 것이다.

‘시간이 필요하다.

     

우선 꽃이 피게하라.

다음에 열매를 맺게하라.

익어서 여물게하라’고.

무화과의 열매까지도 금방,

즉 한 시간내에 되지않는데,

     

그대는 인간의 마음의 과실을,

그렇게 신속하게 또 손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설사 그대가 그렇게 할 수 있어도,

결코 이를 기대해서는 안된다(에픽테토스 ‘마음의 과실’).

     

인간의 마음의 과실인 선종을 원한다면 시간이 필요하다. 마치 등잔에 기름을 준비한 지혜롭고 슬기로운 다섯 정녀가 언제 올지 모를 신랑이 깨어 기다리고 맞이하는 것 같이 말이다. 그렇게 준비하며, 그렇게 기다리는 사람은 죽음의 사촌인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깨어나 자기 영혼을 구하는 구원의 과실을 거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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