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진정한 정체성과 행복의 비밀
- didimausi
- 2024년 6월 7일
- 5분 분량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인간 행복의 비밀을 간직한 듯 하다. 우선 지금, 이 순간의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의 작가 에크하르트 톨레는 이렇게 말한다.
나란 에고는 오랫동안 조건들이 지어진 마음의 방식일 뿐이다. 그것은 진정한 내가 아니다. 그 나란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나의 진정한 정체성 나란 에고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알아차림과 나란 에고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알아차림은 현재 순간 속에 숨어 있는 힘이다. 우리가 그것을 현존이라 부르는 이유가 그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것은 당신의 목적이기도 한데, ‘현존’의 힘을 세상 속으로 가져오는 일이다. 이것은 또한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 미래에 이루어야 할 목표가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순간에 존재함’만이 당신을 에고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으며, 당신은 어제도 내일도 아닌 현재의 ‘지금’에만 존재할 수 있다. ‘현존’만이 당신 안의 과거를 해체시키고 당신의 의식상태를 변화시킨다.
영적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영혼을 지닌 존재라는 믿음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생각이다. 출생증명서에서 적혀 있는 것이 곧 자신이라고 믿는 생각보다는 진실에 조금 더 가깝진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하나의 생각임에는 변함이 없다. 영적인 깨달음은 내가 지각하고 경험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내가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지나가 버리는 그 모든 것들 속에서는 나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하게 본 최초의 인간은 아마도 붓다일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 중의 하나는 나타(무아)였다. 또한 예수가 “너 자신을 부정하라”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라는 환상을 부정하고, 그럼으로써 해체하라는 의미였다. 만약 그 자신, 즉 에고가 진정한 나라면 그것을 ‘부정하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 ‘환상의 나’를 버렸을 때 남는 것은 그 안에서 지각과 경험과 생각과 감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의식의 빛이다. 그것이 바로 더 깊은 곳에 있는 나, 진정한 나, ‘순수한 있음’이다.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하여 거짓 자아를 환상의 자아를 버려야 한다. 필요한 것은 오직 이것이다. 내 삶의 배후에 항상 있는 나의 본질적 ‘순수존재Being’, 그 ‘나의 있음I Am’을 감지할 수 있는가?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 이 순간 ‘나는 나의 있음이다I Am that I Am’를 감지할 수 있는가? 의식 그 자체로서의 나의 진정한 정체성을 감지할 수 있는가? 혹은, 일어나는 일들에 자신을 빼앗기고 마음 속에, 세상 속에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가?
당신이 지금 현재 무엇을 하는가에서 무엇을 하지 못한 것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당신 자신을 그 무엇을 하는가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삶의 진정한 목적에 깨어나기
그리고 자신의 행복에 스스로 책임지기
한 마리의 생, 한 그루의 나무,
한 사람의 인간 존재를 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심연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밀이나 분류표로 세상을 덮지 않을 때
잃어버린 감각이 돌아온다.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무엇이 내가 아닌가’를 아는 순간
‘나는 누구인가’가 나타난다.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는가가
당신의 운명을 실현하는가 아닌가를 결정한다.
그리고 당신이 하는 일을 어떻게 하는가는
당신의 의식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자신의 의식 상태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은
삶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에고는 나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지닌 에고가 아니다. 자기 에고의 한계성을 뛰어넘음으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한 자가 되었을 때만이, 진정한 나의 에고를 인식하게 된다. 지금 현재 존재하는 나-에고는 미성년같이 장차 성장하고 완성되어야 할 진정한 나-에고를 향하는 과정에 있는 미완성의 에고이다. 이러한 과정 안에서, 깨어 바라보는 것과 더불어 함께 앞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할 힘이 생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예’라 응답하고, 바로 지금을 천국으로 만드는 데에서 진정한 자아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지금 현재의 의식상태에 달려 있다. 이로써 현재의 상태에서 깨어나 행동과 생각이 변하고, 그 의식상태가 삶과 완전히 하나 되는 과정을 겪는다.
깨어남의 은총에는 삶의 진정한 목적으로 깨어나기, 그리고 자신의 행복에 스스로 책임지기에 이른다. 진정한 행복은 밖에선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 의식 자체로 오는 것이다. 따라서 내면의 의식은 자신과 본래 하나이다.
아인슈타인은 신의 마음을 알고 싶다면서, 그 나머지는 작고 세부적이라 했다. 이때 신의 마음은 무엇인가 하는 의식이 중요하다. 그것은 나 자신과 같은 의식이다. 신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작고 세부적인 것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외부, 바깥 세계에서 어떤 목적을 갖고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내 삶의 의미와 목적, 책임이란 완전한 나, 에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서 하느님같이 완전함에 이르게 되는 인간완성이다. 너 자신을 알라고 설파한 소크라테스의 말은, 자신을 알아야만 자신을 완성시켜서 자신의 행복한 인간의 삶을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 자신을 알아야만 인생의 모든 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어떻게 하면 지금 평화로울 수 있는가? 현재의 순간과 화해하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은 삶의 놀이가 일어나고 있는 장이다. 삶의 놀이는 다른 곳에서 펼쳐질 수 없다. 현재의 순간과 화해하면 무엇이 일어나는지 보라. 자신에게 무엇이 가능한지, 어떤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지를.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삶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하는지를, 삶의 예술에 대한 비밀, 모든 성공과 행복의 비밀을 전하는 세 단어가 있다. ‘삶과 하나가 되기’이다. 삶과 하나가 되는 것은 현재의 순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자신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당신을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삶은 춤추는 자이고, 당신은 그 춤이다(에크하르트 톨레,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지난달에는 무슨 걱정을 했지? 지난해에는? 그것 봐라, 기억조차 하지 못하잖니. 그러니까 오늘하고 있는 걱정도 사실은 별로 걱정할 일이 아니다. 내일을 향하여가는거야”(아이아코가).
모든 문제의 핵심은 나의 진정한 정체성인 나-에고를 찾아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나아가는 응답을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즉 문제 자체인 인간이 그 답을 찾아 나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의 진정한 정체성인 참된 자아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의 사랑을 받아서 그 사랑으로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나아갈 수 있는 사랑의 인간이다는 것이다. 이런 나의 정체성, 나-에고의 알아차림은 더 이상 당신의 정체성의 기초가 아니라 당신의 현존의 빛이 되고 생각과 감정보다는 더 깊은 사랑의 위력을 알아차리게 된다.
당신의 자아의식,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식에 하나의 전환이 일어난다. 그 전까지 당신은 생각이고 감정이고 자동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 그 알아차림이며, 그런 상태들을 지켜보는 깨어 있는 의식의 ‘현존’이다.
“나는 언젠가 에고롭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에고이다. 에고로부터의 자유는 사실 큰일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이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생각과 감정이 일어날 때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것이 전부이다. 그것은 정말로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깨어 있는 ‘바라봄’이다.
그 깨어남에서 바라보는 진정한 정체성에 나-에고는 항상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같은 인간상인 것이다. 모든 성인성녀는 성서 말씀과 묵상 기도생활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고 진정한 나-에고를 찾았다. 그러한 성인들은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여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아 하느님의 백성으로 영원히 살아간다.
우리가 아는 거지 왕자 이야기가 있다. 이웃 나라의 침입으로 피난 간 왕가의 일가족이 죽임을 당했는데, 어린 왕자만 살아남아 숲속 농가에서 거지 같은 생활을 하면서 자라났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신분을 모른 채 비천한 몸으로 지냈다. 아무튼, 다 자란 청년은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확인하고 왕국을 물려받아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렇다. 우리도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 나-에고를 찾아서 하느님 나라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하느님 자녀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일평생 진정한 나-에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평생 거지 왕자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살아나갈 수가 없다.
자기 부인을 왕비처럼 사랑하면 자기는 왕처럼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들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분명히 가르쳐주셨다.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다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나와 같이 이 세상을 하느님 사랑으로서 살아나갈 수 있다’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우리가 사랑한 사람 안에 사랑이신 하느님이 함께 계셔서, 그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하느님 백성으로서 상속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이 벌어진 산, 그러나 산 위에 머물 수는 없다. 진정한 나-에고의 정체성은 산 밑에 내려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그 길을 따라가야 그 길 끝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다. 예수님 변모의 본질은 진정한 자아 찾기, 산 밑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삶 속에서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는 실천 속에서 참된 자아, 인간의 본래적 정체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랑만이 나를 완성하며 모든 것을 이룬다. 나에게 사랑만을! 그밖에 모든 것은 치워라! 사도 바오로는 지금 당장은 어슴푸레 하고 희미하게 거울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지만, 장차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확실하게 있는 그대로 볼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은 그분을 따르는 길이면서 동시에 나의 진정한 자아, 에고를 찾아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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