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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강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는 것의 기본 바탕인 겸손과 유머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초기교회의 수도자들이 글로 기록한 겸손의 길에 대한 개념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베네딕도 성인과 그의 뒤를 따른 교회 전통이 의미한 겸손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에 동의해서 겸손을 하나의 종교적인 기본자세로 본다면, 우리는 겸손에 대한 잘못된 부정적인 견해들, 즉 “무조건 머리 숙이기”, 무릎 꿇어 조아리기, 삶이 요청하는 일들을 피하기, 이기심이 숨겨진 거짓된 겸손 등을 잘 분별해 낼 수 있다. 겸손은 우리가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덕행이 아니라 자신의 실상에 대한 체험과 하느님 체험에 대한 표현이다. 그리고 겸손은 땅에 밀착해 있는 자신의 본래적인 모습에로 내려가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본래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신뢰하면 우리는 유머 감각을 가지게 된다. 여유를 가지고, 자신과 이 세상에 대해 유머를 가득 지니고 대하게 하는 것이 겸손의 본질적 측면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겸손은 또한 우리가 실패와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하고 빈털터리가 된 길을 걸어가서 하느님을 향해 자신을 열어드리지 않을 수 없는 상태를 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자신과 화해하여 겸손의 길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면, 본성을 거슬러 지속적으로 투쟁할 필요도 없고, 결국은 이루어지지도 않는 작업인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기 위 해 지속적으로 고생스러운 노력을 해나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영적 지도 과정에서 필자는 언제나 다시 되풀이하여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들을 접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들을 좀 더 잘 극복해야 했다고, 자신을 신뢰하는 것을 좀 더 증진시켜야만 했다고 생각하며, 그들이 좀 더 강해져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그러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일이 잘되어가지 않을 경우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쉽게 마음의 상처를 받아 절망하고 만다.

 

평정(Gelassenheit)과 안전(Sicherheit) 그리고 자신에 대한 믿음과 강함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 실패는 우리를 참된 하느님께로 인도해 갈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우리를 좀 더 인간적이 되도록 한다. 우리 자신이 마음의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는 아이들이란 사실을 참으로 인정한다면, 우리 자신이 매우 민감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으며, 사랑에 굶주려 있고, 칭찬과 꾸중에 영향을 크게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자신은 실수를 하지 않는 존재라고 믿음을 가질 수 있을 만큼 자신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경계심으로 무장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인간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할 경우에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 온 상처들을 정리하고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 방어 자세를 취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게 진정한 만남을 가질 능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지난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그렇게도 열심히 노력했던 이상적 요소들을 도달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하느님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겸손을 바탕으로 하는 영성은 우리를 인위적으로 작은 존재로 만들어서 자신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 자체에 대하여 용서를 청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다. 겸손은 그보다 훨씬 더 나아가서 우리를 내면의 진실로 인도하며, 평정과 유머로 인도한다. 유머 속에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있을 수 있고 있어도 된다는 사실을 아는 지각이 들어 있으며, 우리는 땅에서 생겨난 존재이고 그러므로 이 땅 위에서 일어나는 세속적인 것들에 놀라 물러날 필요가 없음을 아는 지각이 들어 있다. 유머는 우리가 지닌 인간성, 밤에 밀착해 있는 것(Erdhaftigkeit) 그리고 상치받기 쉬운 유약함과 무상함을 인정하고 그것과 화해하여 받아들이는 것이다. 유머 속에 지금 존재하는 나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들어 있다.

 

사회학자 베르그(P. L. Berger)는 유머를 “초월에 대한 하나의 표지”로 보았다. 유머 속에서 모순되는 상황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그것과 화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서 그것을 상대화시키고. 초월하면서 그 상황을 극복하여 영성적으로 정리하게 된다. 유머는 우리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고 그것과 화해하게 하는 반면, 이상주의는 우리의 실제적인 삶의 현장으로부터 도망쳐서 이상주의 안으로 숨어들게 한다. 우리가 기꺼이 되고 싶은 그러한 상태에 현재 도달해 있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높은 이상들에게로 도망을 치며, 영적 삶에 관한 높은 이론들을 만들어 나간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들은 우리가 매일 만나는 실재의 삶과는 매우 동떨어져서 무관할 뿐이다.

 

하인리히 뤼첼러(Heinrich Lüzeler)는 유머가 언제나 실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관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아리스토파네스(Arstophanes), 셰익스피어(Shakespeare), 세르반테스(Cervantes), 몰리어(Moliere) 등 대표적인 극작가들은 매우 현실적인 사람들이었고, 모든 인간적 요소들을 가까이하여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수천 종류의 은폐들과, 무대장치들 그리고 외쳐대는 말들 속에서 이들은 언제나 변함없이 매우 인간적인 것들을 짙게 드러내보였다(Lützeler 12).

 

유머는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의 실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고, 대단한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기본 욕구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유머 속에서 사람은 자신에게 알맞은 정도를 찾게 되며, 자기 자신을 부풀어 올려서 과장하고 자랑하며 허풍 치는 것을 즐기고자 하는 모든 욕구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다:

 

웃으면서 자신의 잘못을 보는 사람, 자신이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부정적인 요소들에도 연계되어 있는 것을 인식하면서 그것을 웃음으로 지켜보는 사람은 유머의 세계를 이해하고 유머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사람이다. 이 두 경우의 사람들은 세상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예리하게 인식하는 사람이며, 그러한 세상에 대하여 무시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차갑게 대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러한 모든 부정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지닌 신비에 감탄하며 사랑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불완전한 세상이 어떤 형태로든 하여간(irgendwie) 질서 속에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믿음을 가지고 있다(같은 곳23f).

유머는 이 현세상의 불완전성 안에서 성장해 왔으며 이 세상의 사랑 안에서 꽃을 피웠다. 유미는 작은 것에 대해서도 큰 것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유머는 작은 존재에 대하여도 화를 내거나 불만족해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자유롭다. 인간이 가진 혼란과 엉클어짐 그리고 불완전함이 이 세상의 큰 질서를 파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믿음이 매우 부족한 사람이다. 이 모든 현상에 대하여 그것들이 대단히 크고 위험한 것으로 여기거나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여 심각해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늘이 우리에게 보낸 것에 대하여 하늘 이 원하는 대로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그것은 바로 평정의 자세와 순수하고 밝은 마음을 가지는 것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신뢰하는 것 등이다(같은 곳 41).

 

유머는 최종적으로 유머를 구사하는 사람의 성격에 근거를 둔다기보다는 그의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

 

유머가 풍부한 사람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상황과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데, 그것을 그는 인간 존재의 무상함은 하느님의 뜻에 의한 것이고 하느님께서 그러한 인간을 지탱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에서, 이러한 모든 현상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언제나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 을 믿는 것에서 행한다(54).

 

유머의 기본 개념들은 자유, 절도와 중용, 전체, 놀이 등이고 이 들은 동시에 종교적인 인간이 내면에 갖추어야 할 요소들이기도 하다:

 

모든 사물에서 자유로운 사람들, 절도와 중용을 알고 각 개체들 속에 들어 있는 질서를 잘 아는 사람들이 참으로 하느님과 일치하여 충만되게 살아간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하느님께 기쁨이 되는 존재로 간주하여 이 세상 안에서 자신의 삶을 전개해 나간다(55).

 

동방과 서방 교회의 영성적 가르침 모두가 겸손을 중요하게 생각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인간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참된 인간이 되는 데 필요한 전제조건일 뿐 아니라, 하느님을 참으로 만나는 데 필요한 전제조건이기도 한 것이다. 겸손하지 않을 때 하느님을 우리가 필요로 하는 조건을 채워주는 분으로 보기 쉽다. 그러므로 신비가들은 겸손을 강조한다. 겸손 없이는 신비가들이 자신을 하느님과 동일시하는 위험에 쉽게 빠져든다. 겸손 없이는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과 우리 자신과의 차이를 쉽게 잊어버린다. 우리의 인간성(Menschlichkeit)과 땅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것(Erdhaftigkeit)이 우리 전체를 관통하면서 우리를 하느님의 성전으로 만드는 하느님 은총과 가지는 긴장관계가 우리의 영적 삶의 본질적인 부분에 속한다. 우리는 자신의 인간성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하느님 은총의 선물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므로 영성적으로 상당히 진보한 사람이 언제나 다시 겸손에 대해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된 행위가 아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겸손한 자세를 통해 가능함을 체험한 것이다.

 

겸손은 우리의 영적 길에 반드시 필요한 일반적인 지축(地軸) 중 하나이다. 하느님을 깊이 체험할수록 그만큼 더 지축의 다른 끝에 존재하는 인간성을 강조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우리 는 자신을 하느님과 동일시하고 하느님을 나의 필요성을 채워주기만 하는 분으로 전락시킬 위험에 있게 된다. 겸손은 하느님 체험의 과장, 자기자랑과 허풍, 하느님과 자신을 잘못 동일시하는 것에서 우리를 지켜준다. 내가 자신을 하나의 전형적인 표상(ein archetypisches Bild)과 동일시할수록 점점 더 자신의 실제적 현실을 바라보는 시야를 잃게 된다. 그렇게 될 때 나는 내적으로 점점 더 분열되고 파괴된다. 점점 더 나의 현실에 대하여 눈이 멀게 된다. 겸손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과장하거나 인간성을 뛰어넘어 가는 위험에서 우리를 보호해 준다. 겸손은 종교적인 사람에게 가장 큰 위험 요소인 과장에서 우리를 지켜준다.

 

겸손은 초기 수도회에서 낮은 것 그리고 땅에 밀착해 있는 것에 대한 상태를 나타낼 뿐 아니라 동시에 부드러움, 온순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겸손한(demütig)에 대한 그리스 말은 tapeinos 인데, 종종 그리스 말 prays도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 데 prays는 동시에 온유, 호의를 의미하는 말이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온유를 영적 지도자, 영적 아버지가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으로 보았다. 온유는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에 대한 부드러움을 의미하며, 자신과 타인의 잘못과 연약함을 자비함으로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한 사람이 가진 온유는 그 사람이 지닌 겸손한 자의식으로 자신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는 표지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온유 없이 절제와 금욕을 수행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절제와 금욕은 육체만을 내리누르지만, 온유는 지성을 개화시킨다(편지 27,4).

 

온유는 참된 관상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러므로 에바그리우스는 거듭 다시 자신의 수도회 형제들에게 모세를 본받을 것을 권했다:

 

모세는 실상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다. 땅 위에 사는 사람 가운데 그만큼 겸손한 사람은 없었다(민수 12,3: 편지 27,2).

 

우리는 모세의 온유를 배운 다음에야 비로소 그와 같이 하느님을 뵈올 수 있을 것이다. 온유함이 없는 자기수련은 우리의 정신을 단지 어둡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에바그리우스는 어느 한 수련자에게 다음과 같이 주의를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온유와 신중함을 잃지 않도록 하여라. 이들은 영혼을 정화시키고 관상에로 인도하여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 요소들이다(편지 34.21).

 

신약성서는 겸손을 하느님께 대해서만이 아니라 사람들에 대해서도 가져야 하는 태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겸손은 온유, 부드러움, 관용과 함께 고찰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느님에게 선택된 거룩하고 사랑받는 사람답게 자비로운 동정심, 친절, 겸손, 온유, 인내를 입으시오(골로 3,12).

 

성 아오스딩은 이런 강론을 하셨다. “저기 서 있는 거목 나무들을 보십시오. 그 나무들의 뿌리는 땅속 깊이 아래로 아래로 겸손하게 내리박혀서 그 거목 나무들을 하늘 높이 서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겸손의 아래로 영성생활은 여러분을 하늘로 들어 높이실 것입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개념으로 바울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자세와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된 새로운 인간이 가지는 태도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겸손한 사람은 형제와 자매를 멸시하지 않고 그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본다. 그러므로 겸손한 자세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지닌 신비에 대해 경전한 태도를 지니며, 마음 안에 다른 형제자매들을 위한 큰 여유 공간을 지니고 있다.

 

자기 자신의 인간성을 만나본 사람은 다른 모든 인간성에 대하여 친숙함을 느낀다. 겸손한 사람은 그가 만나게 되는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여 받아들이며, 특히 연약한 사람 과 아픈 사람, 불완전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싸 안는다. 그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자비심으로 둘러싸여 있고, 예수의 따뜻한 눈길 안에 들어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영혼 안에서 그리고 다른 이들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들을 자비심과 부드러움으로 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온유함은 온유한 사람의 성격에서 유래하는 자세가 아니고, 또한 공격성의 결핍에서 나오는 자세도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지상의 실제상황으로 내려 보내신 자비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자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것 모두를 받아들이셨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구원하셨다. 그는 자신의 인간성 안에 우리의 모든 유약함과 인간적인 것들을 가지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가 이 땅 아래로 깊숙히 내려오셨기 때문에, 다시 하늘로 높이 올라가신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는 우리에게 그러한 길을 보여주신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땅 아래로, 땅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것에로, 어둠 속으로, 모르는 것들이 가득 찬 곳으로, 우리의 인간적인 유약함으로 내려올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하늘로 올라갈 수도 없다. 베네딕도 성인이 겸손의 장 시작 부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은 영적 상승의 역설은 모든 영적 길의 역설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인간 존재로 내려옴으로써 하느님께로 올라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 길이자 사랑과 겸손, 온유 와 자비의 길이며, 예수의 길이고 또한 우리를 위한 길이다.

 

겸손의 목표는 모든 두려움을 추방하는 사랑이다. 겸손 안에서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분열의 지옥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다. 바로 우리 영혼에 존재하고 있는 지옥의 한복판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빛을 우리의 영혼 안으로 가져와서 그 영혼을 변화시켰다. 두려움은 영혼의 공간을 좁힌다. 그러나 반대로 겸손의 길을 통해 두려움을 추방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넓힌다. 그러므로 베네딕도 성인이 수도규칙 머리말의 마지막 부분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이 겸손의 마지막 단계에 적용된다: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甘味)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된다(RB 머리말 49).

 

(참조: 안셀름 그륀, 아래부터의 영성, 135-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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