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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강

공동체 신앙생활

마. 아래로부터의 영성과 공동체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공동체와의 관계에서도 하나의 다른 길을 요청한다. 본당 공동체 안에서뿐 아니라 일반 신심 단체와 각종 수도회 안에서조차 사람들이 많이 불평하는 것은 이 공동체들이 지닌 이상적 목표들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인간적인 부정적 요소들과 미움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불평이 나올 경우에 대부분 그 구성원들은 어떻게 하면 그들이 도달해야 하는 이상적 요소들에 일치하는 삶을 좀 더 잘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인지 많이 생각하고 고심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 공동체들이 도저히 실현할 수 없는 표상들을 자신들에게 덮어씌우게 되는 잘못을 쉽게 범하게 된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공동체 안에서 사납게 짖어 대는 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불평하는 곳, 함께 사는 형제가 불만족해하는 곳, 서로 비난하는 곳,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보물을 찾으려고 노력해 나가야 한다. 사납게 짖어 대는 개들은 우리가 설정한 이상적 표상들에서 벗어나 현실로 내려올 것을 종용한다. 바로 이곳에서 우리는 어떤 장애물들과 어떤 힘들과 가능성들이 공동체 안에 들어 있는지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바로 그곳에서 공동체를 변화시키려고 시도해야 한다.

 

우리 일반사회에서는 잘못을 범한 사람은 물러나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만약 한 정치인이 잘못을 범했을 경우에, 사방에서 그가 물러나야 한다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러한 것은 정치인들을 움츠러들게 한다. 그들은 혹시나 잘못을 범할까 하는 염려 때문에 일을 적극적으로 진행해 나가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그렇게 될 때 그 정치인들은 창의력을 잃게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참으로 어떤 새롭고 의미 있는 일을 실행하고자 한다면, 그는 잘못을 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과감히 감당해 나가기도 해야 한다. 우리 사회 안에 만연해 있는 완벽주의는 정치인들이 참으로 사람들에게로 나아가 서로를 위한 새로운 길들을 찾아나 가는 데 지장을 초래한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혹시 자기 잘못과 약점들이 공개되어 어려운 일을 당할세라 결백을 지켜나가기 위해 전전긍긍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그들이 과감히 새로운 일을 해나가는 데 방해하며. 현재의 상태를 고수하는 데만 급급하면서 체제에 잘 순응하여 안주하는 사람이 되게 한다. 리하르트 로르(Richard Rohr)는 이러한 사람을 마르코 3장 1-6절에 나오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과 같은 부류로 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태우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의 손을 오므려버렸다. 그래서 그의 손이 오그라들게 되었다. 그런 상태로는 아무 일도 생겨나지 않았고, 아무런 위험 부담도 없었다. 예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손을 펴시오!”(마르 3,5) 너의 삶을 너의 손에 쥐어라! 용기를 내어 도전해 나가라! 위험 부담을 무릅써라!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역사가 번창해 가는 좋은 결과가 있는 역사로 전개되어 가지 않은 사실을 마음 쓰리게 알게 되었다. 그들은 몰락을 통하여 그들 스스로를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언제나 다시 일으켜 세우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나 가족의 역사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난 것과 유사한 몰락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보통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침묵을 지킨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가족에게 일어난 부정적인 요소들을 감추거나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의 가족사를 아주 다른 시각으로 서술해 나갔다. 예수의 가계는 순수하게 맑고 아무런 흠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잘못들로 점철되어 있다. 세 번이나 반복되는 십사 세대에 관한 보도는 하느님께서 “그렇게 불규칙적이고 죄로 점철된 가족사” (Grundmann 62) 에서도 미래를 미리 내다보시는 당신의 섭리로 작용하시어 당신 계획대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계사에 대해서도 실재의 사실 을 왜곡하고 과장하여 마치 흠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서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잘못들을 넘어 언제나 새로운 것을 건설하시고, “지난 세대의 폐허 위에”(이사 51,4) 새로운 것을 일으켜 세우신다. 그러므로 가계사와 교회사에서 있었던 잘못들을 인정하는 것은 자유를 가져오는 용기 있는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왜곡시켜 한쪽으로 밀쳐두는 것은 우리를 과거에 얽매이게 하며. 같은 잘못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되풀이하게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범한 잘못들을 인정하는 것만이 우리가 건강하고 행복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길이다.

 

Arche(노아의 방주)란 공동체를 설립한 장 바니에(Jean Vanier)는 「공동체 - 화해와 축제의 장소」(Gemeinschaft-Ort der Versöhnung und des Festes)란 책에서 공동체는 위로부터의 영성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밝혔다. 한 공동체 안에 함께 존재하는 병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어떻게 대접하는가에 따라 그 공동체가 참으로 그리스도교적 공동체인가 아닌가가 정해진다. 바니에는 공동체 안에서 소외된 자들의 역할에 대하여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많이 가진 소외된 자들은 공동체 안에서 예언자적 역할을 수행해 나가고 있다. 그들은 진실성을 요구함으로써 공동체를 흔들어 자극한다. 많고 많은 공동체들이 이상들과 좋은 말들을 실현할 것을 목표로 하여 건립되었다. 그러한 공동체들에 소속된 사람들은 언제나 반복하여 사랑, 진리 그리고 평화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한다. 그러나 소외된 자들은 이들이 발설하는 많은 좋은 말 늘 중 상당 부분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느낀다. 그들은 사람들의 말과 실재로 살아가는 것 사이에는 상당히 먼 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Vanier 193f).

 

병자들 역시 공동체의 상태를 반영하는 거울 같은 존재다. 만약 한 공동체가 이 거울을 들여다보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거짓 위에 설립된 공동체이다. 어떤 생명체든 그 안에 어려움이 생길 경우에 으레 가장 약한 기관이 병들어간다. 그러나 병든 그 기관은 그가 속한 생명체 전체의 상태를 말해준다.

이러한 것은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병자들, 소외된 자들, 불편함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자들 그리고 불평을 늘어놓는 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관심을 보이 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것이 아래로부터의 영성이다.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회 회칙을 저술했을 때,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아바스가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는 영혼들을 다스리고 많은 사람들의 기질을 맞추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유순하게 대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책벌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권고해 주어야 한다. 각자의 성질과 지능에 따라 모든 이에게 알맞게 대해 줌으로써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손해가 없도록 할 뿐 아니라, 오히려 착한 양들의 수효가 늘어나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RB 2,31-32).

 

수도회에서 아바스로서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은 회원 각자가 있는 자리에로 내려가서 그의 상태를 인정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바스는 회원들에게 높은 이상을 실현해 나갈 것을 요구하여 부담을 주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치유는 관심을 가지고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상대편에게 자신을 맞추어감으로써 이루어진다. 재미있는 것은 베네딕도 성인이 잘못한 수도자에게 어떤 벌을 주며 어떻게 교정하는지 서술한 장에서 형제라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한 형제가 위기상황에 빠졌거나 실패의 상황에 놓였을 때, 오히려 그 형제에게 더 관심을 가져야 하며 더 존중하고 그 형제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을 더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바스는 잘못을 저지른 형제들을 온갖 염려를 다해 돌보 아야 한다. 왜냐하면 "의사는 건강한 사람들에게 필요하지 않고 병든 사람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RB 27.1).

 

수도회 안에서 아프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한 형제들에 대하여 더 큰 사랑으로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돌보는 것은 그리스 도교적 공동체가 마땅히 취해야 하는 기본적인 자세이다. 일반 회사들에서는 아픈 사람이 설 자리가 전혀 없다. 회사에서 직위가 높은 관리자들도 육체적·정신적 어려움을 가지게 되어 그들이 지금까지 감당해 온 일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는 상태에 접어들게 되면 그만두고 물러나야만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이치이다. 이러한 것에서 우리는 한 회사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근무하면서 받는 스트레스 등에 의해 점점 상태가 나빠질 것이란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픈 사람을 통해서 반영되는 자신과 공동체의 상태를 점검하면서 “그를 잃지 않도록 큰 염려를 기울이며, 온갖 지혜와 열성을 다하여 쫓아다니며 돌보아야 하는 것”(RB 27,5)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그리스도교적 공동체라는 사실을 증거하며, 더 인간적이고도 더 건강한 공동의 삶이 지속적으로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된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개별적으로 구원하시지 않고서 하느님의 백성 공동체로서 구약에 이스라엘 선택된 민족 공동체로서 구원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꼐서도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 살아 나아가기인 하느님 백성 공동체가 하느님의 교회에서 공동체로서 신앙생활로 구원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영성과 공동체로서 신앙생활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기인 것이다.

 

(참조: 안셀름 그륀, 아래로부터의 영성, 129-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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