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강
무능과 실패의 체험 중의 신앙생활
라. 무능과 실패의 체험
앙드레 루프(André Louf)는 언제나 자신의 무능을 체험하는 것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찾았다. 이제 내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모든 것이 나의 작용 범위를 벗어나 떠나가 버렸을 때, 이제 내가 나의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직면했을 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유일하게 나 자신을 되어가는 대로 놔주는 것, 나를 하느님께 완전히 내어드리는 것, 나의 빈손을 열어 하느님을 붙잡는 것뿐이다.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은 나 자신의 노력으로 얻는 하나의 보상이 결코 아니고, 나 자신의 무능에 대한 응답이다. 자신을 하느님께 건네드리는 것이 영적 삶의 목표이다. 앙드레 루프는 약함의 자기수련 (Askese der Schwachheit)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형태의 참된 Askese(자기수련)는 수도자로 하여금 자신의 완전한 무력함을 체험하게 한다. 그는 자신을 수련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지닌 힘들이 완전히 부서져 주저앉는 것을 체험하며, 자신의 극단적인 연약함에 직면하게 된다. 그는 그러한 수련을 통해서 조금도 더 나아지지 않은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완전히 부서지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와 함께 자신이 완벽하게 설계한 이상적인 계획들이 무너지는 것을 체험한다. 이렇게 완전히 부서져 내려앉아 완전한 무력감 속에 놓여진 그 안에 하느님께서 들어오셔서 모든 것을 넘겨받으시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수련은 완전히 부서진 그를 그 자신의 무능과 주님의 전능에로 인도하는 하나의 기적으로, 그것도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기적으로 변하게 된다(Louf 46f).
루프(Louf)는 모세 아바스의 말을 하나 소개하고 있다:
금식과 한밤중에 일어나 깨어 있는 것 등은 수도자를 낙심 하게 하여 그가 자신의 힘에 의존하는 것을 포기하고 겸손한 자세를 갖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 만약 그가 이러한 자세에 도달하면, 그는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46).
Askese는 우리를 강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약한 존재임을 알게 하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 수 없음을 체험하게 하며, 완전히 하느님의 은총에 내맡겨진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한다. 바로 그곳에서 나는 나 자신과 나의 모든 노력들을 접어두고 하느님의 품에 안기게 된다.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수도자들은 Askese를 수행해 나가고 자 한다. 본회퍼(Bonhoeffer)가 말한 바와 같이 수도자들은 Askese 없이 받는 은총은 "값싼 은총"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 자신을 개선하려는 모든 노력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은총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되고, 시골 본당신부 베르나노스(Bernanos)가 쓴 일기를 올바로 이해하게 된다: “모든 것이 은총이다.” 루프는 그가 약함의 자기수련이란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한 예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한 젊은 수도자가 찾아와 물었다: “아바스 아버님, 제가 내일 아침에 한 시간 일찍 일어나도 좋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아바스가 대답했다: “수사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더라도, 그것은 불필요한 행위입니다. 그러한 행위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만약 수사님이 그렇게 일찍 일어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느 편에 서는 것이겠습니까? 당신은 정의로운 자 편에 서는 것 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 수도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더라면 상황은 완전히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저의 약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저는 하느님께서 저의 약한 부분을 통해 저를 당신께로 부르시는 것을 느낍니다. 하느님은 저의 약함을 통해 당신의 기적을 행하시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이 Askese이다. 그리고 모든 이가 이러한 Askese로 불린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47).
Askese는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보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다시 자신의 한계선에 도달하는 것이며, 그 한계선에서 자신을 무한한 존재이신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것이다:
수도회에서 행하는 Askese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이 자신의 희망을 하느님의 은총에 두기 위해서 가지는 유일하고 고유한 자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교 밖의 Askese이다(47).
하느님께 남아 있는 가능성이 때로는 유일하게 사람의 약함을 통하여 인도하는 길뿐일 때가 있다. 그가 죄를 통하여 어떤 깨달음에 이르는 것보다는 그의 약함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니니웨의 이사악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하느님께서 돌아갈 수 있는 다른 어떤 길이 없을 경우에는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을 허용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체험하도록 그가 죄짓는 것을 허용하신다. 이것은 남아 있는 가능성 중에서 최후의 길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힘을 계시할 다른 길이 없을 경우, 때로는 인간의 피난처를 이러한 길을 통해서 찾으시기도 한다(Louf 50).
나의 죄 안에서 내가 그동안 나 자신과 나의 영적 길에 대하여 만들어놓은 모든 환상들이 먼지처럼 날아가버린다. 그러한 것에서 나의 Askese가 내가 죄를 피하는 작업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죄를 짓지 않을 확실한 보장은 없는 것을 알게 된다. 하느님께서 나를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나는 언제나 다시 죄를 지을 것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게 된다. 나 자신은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죄에 대항할 힘이 없다. 만약 나에게 이러한 실제의 모습이 마음에 분명히 떠오르면, 나는 나 자신을 완전히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것 외에 다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내 가 하느님과 나 사이에 쌓아올려 두었던 모든 벽들이 완전히 허물어지고 만다. 그러면 나는 모든 것을 잃고 빈손이 되고 만다. 나는 손을 들고 하느님께 완전히 항복하는 수밖에 없다. 죄가 나 에게 나 자신의 무능함을 보여줄 때, 그것은 복된 죄(felix culpa)가 된다. 나는 나 자신을 전혀 보장할 수 없다. 죄는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하느님께로 내 눈을 돌리게 한다.
나 자신의 체험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 체험들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언제나 중요한 문제이다. 나는 나의 죄를 실패로 보고 자신에게 실망하여 스스로에게 많은 비난을 던질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는 나를 내적으로 아래로 끌어내려서 자포자기 상태로 몰고 간다. 나는 나의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변명할 수도 있다. 그러면 나의 영적 삶은 건강한 시민생활의 범위를 벗어나게 된 다. 그리고 나의 죄를 압박할 수도 있다. 그러면 나는 바리사이 인들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우리가 죄 안에서 자신을 완전히 하느님께 단지내릴 수 있는 하나의 기회를 찾아내도록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의도적으로 죄를 지어야 한다 는 것은 아니다. 아래로부터의 영성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변화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 다시 죄를 짓게 된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사실과 화해한다면, 자신의 노력으로는 완전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자신을 완전히 하느님께 내어드릴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얼굴에 놓여 있는 모든 가면들을 벗기시고, 내가 완전한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쌓아올린 담들을 부수어버리신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완전히 벗은 알몸으로 참된 하느님 앞에 서게 되며,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게 된다.
앙드레 루프는 바울로 사도의 편지글에서 다음의 말을 자주 되풀이하여 인용하고 있다:
그분은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고 있다. 그 능력은 허약함 가운데서 완성되는 법이다” 하셨습니다.… 내가 약할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9f).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인지하는 것은 영적 길의 역설에 속한다. 우리는 Askese를 행하는 동안에 자주 우리 스스로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덕행을 많이 쌓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여기게 된다. 실패를 거듭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신을 더 낫게 할 수 없는 존재여서 완전히,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매달려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의 연약함 에 내려와 작용하며 우리의 무능함 속에서 영적 힘이 된다:
성령은 우리가 얻어맞아 완전히 부서질 때, 우리 스스로 쌓아올린 담들, 성채들, 업적들이 부서져 무너질 때,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Louf 29).
루프에게는 은총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감싸는 보자기 같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은총은 우리의 무의식 세계보다 더 깊이 파고들어가 작용한다. 은총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 있는 존재이며, 우리의 육신과 영혼 전체를 거쳐 작용해 성장해 나가야 하는 존재이다. 일반적으로 은총은 우리의 영혼을 파헤치고, 부수어버리며, 다시 한곳으로 모아 건설하고, 치유하고 바로잡는다(30).
은총은 자연(Natur) 위에 건설하며 자연을 드높일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은총은 우리를 우리의 가장 깊은 밑바닥으로, 완전히 아무것도 아닌 무능한 존재로 끌고 내려가는 것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작용할 수 있는 존재이다:
수도자의 삶에서 가장 혹독한 영적 시련은 그가 자신의 정 신적 이해력을 잃은 상대에 빠져들어 어떠한 일도 해낼 수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을 포기할 위험에 처하는 경우이다. 그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자신이 처해 있는 극도로 약 한 상태에서 구출되지 않는 한, 그는 이러한 상태에 빠지게 되고 그 상태는 지속된다. 그가 지금까지 겉으로 꾸며 거짓으로 취해온 겸손의 자세와 잘못 설정한 완전에 대한 추구가 완전히 무너진 다음에야 비로소 그에게 모든 영역 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31).
수도사가 지금까지 자신이 그렇게도 강하게 집착해 온 이상적인 요소들을 실현해 나감으로써 완전하게 되려는 의지가 부서지고 나 면, 남는 것은 자신을 하느님께 완전히 내어드리는 것밖에 없다.
조르즈 베르나노스는 「시골 본당신부의 일기」에서 거듭 되풀이 해 말하고 있는 실망, 자신 안에 있는 악의, 죄와 같은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은 최종적으로는 우리를 하느님 안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만약 삶이 나를 실망시킬 경우에 내가 취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단 하나뿐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복수를 할 것이고, 악은 악으로 갚을 것입니다”라는 공작 딸의 말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러한 순간에 당신은 하느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당신이 앞으로 전진하기를 원하시면,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하십시오.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 쌓아올린 벽이 허물어지고, 모든 길들이 막힐 것입니다. 그러한 순간에 하늘이 열릴 것입니다(Bernanos 261).
그 시골 본당신부가 자신이 계획했던 일과 맡아 돌보던 본당 공동체에서 실패함으로써 하느님과의 더 깊은 사랑의 관계로 나아간 것이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는 자신에 대한 불신과 일에 대한 실패가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나 자신에 대한 불신이 서서히 사라져 영원히 떠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들을 거슬러 가졌던 싸움은 이제 끝났다. 나는 나 자신, 즉 죽어가고 있는 불쌍한 육신과 화해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일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쉽게 그리고 더 자주 일어난다. 은총은 사람이 자신을 용서하는 데서 시작된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모든 교만이 죽어 없어진다면, 그것은 은총들의 은총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고통 받는 지체들 중에서 자신이 아무리 보잘것없는 한 부분을 이룬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그러한 지체로서 사랑하게 된다(같은 곳 302f).
우리 자신에 대한 실패는 우리 자신에 대한 절망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도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향해 마음을 열고 나가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베네딕도 성인의 수도회 규칙서 4장에서는 우리 자신을 가꾸어나 가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 해나가야 할 것들을 나열한 다음, 마지막 부분에서 영적 삶의 기술을 위해 가장 중요한 도구로 다음의 말을 들고 있다:
하느님의 자비에 대하여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는 자기수련은 우리를 쉽게 절망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는 사실 을 명백하게 인지했다. 왜냐하면 자기수련을 통해서는 우리가 원했던 것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잘못과 실패에 대하여 다르게 대한다. 잘못이나 실패를 했을 때 우리는 자신에게 몹시 실망하여 자신을 비난하거나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눈을 감아버린다. 자신의 삶에서 발생 한 부서진 조각들을 외면하지 않고 손에 쥐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한 것에서 새로운 것이 생겨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한창 열심히 살아가는 삶의 중반기 나이에 자신 들이 부서진 삶의 파편더미 위에 앉아 있는 것으로 느끼는 경우 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경우에 이들은 대부분 자포자기하기 일쑤다. 그러나 그 부서진 조각들은 다시 새롭게 정돈되고 맞추어질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들 삶에서 오래된 껍질이 너무 협소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차피 부서져야만 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실패와 좌절이 하나의 새로운 기회로 반전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성공을 통해서보다 실패를 통해 더 많이 배운다. 융은 성공이 많은 삶은 변화를 가지기가 매우 어렵다고 한다. 즉, 큰 성공은 변화의 가장 큰 적인 것이다. 실패와 좌절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만이 우리의 폐허로 변한 삶에 당신의 집을, 그것도 당신 영광의 집을 지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언제나 다시 체험하곤 했다:
그렇다. 야훼가 시온을 불쌍하게 보고
다 허물어진 그 모습을 가엾게 여기리라.
그리하여 그 황무지를 에덴처럼 만들고
그 벌판을 야훼의 동산처럼 만들어
흥겨움과 즐거움이 넘치고
감사의 노랫가락이 울려 퍼지게 하리라(이사 51,3).
만약 내가 정말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같은 잘못 에 빠져들 때, 또는 상당히 강하고 규칙적인 자기수련에도 불구하고 감당하기 힘든 심한 죄에 빠져들 때. 나는 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행했던 모든 이기적인 노력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럴 때 나 자신을 비난하기보다는 나의 빈손을 하느님께로 들어 높여야 한다. 그러면 나의 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보게 된다. 그렇게 할 때 나는 하느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선행이라든가 훌륭한 덕행 또는 그 밖의 어떤 예물을 반드시 가져와서 그것을 통해 그분의 마음을 사려고 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되며, 그동안 자기수련을 통해 내가 교만하게도 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는 의로운 존재로 성장했음을 증명해 보이려 했다는 사실을 인식할 것이다. 만약 나의 죄를 인식하면서 하느님 앞 에 설 때, 나의 모든 교만함은 부서져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면 나는 나의 영적 삶에서 지금까지 무겁게 지니고 왔던 어떤 좋은 일을 많이 쌓아올려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참으로 완전히 해방 되어 자유롭게 될 것이다. 나는 빈손을 들고 하느님께 나아가 나 자신을 완전히 내어드리면서 평화와 자유를 새롭게 체험하게 된다. 내가 어떤 업적을 쌓아올려야 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하느님은 나를 변화시키시는 분이고, 나의 실패와 죄, 나의 무능과 실망을 관통하여 나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은 그러한 것을 통해 마침내 내가 자신의 덕행을 하느님처럼 생각하면서 그분의 자리에 두었던 잘못을 이제 완전히 그만두게 하시며, 나를 당신께 완전히 전적으로 내어드리게 하신다. 바로 그러한 곳에서 내가 살아갈 수 있도록 나를 받아들이시는 참된 하느님을 만나게 되며, 내가 수도서원을 할 때 다음과 같이 노래 불렀던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오 주님, 당신의 말씀을 따라 저를 받아들여 주십시오. 그리고 저로 하여금 부끄러운 존재가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참조: 안셀름 그륀, 아래부텅의 영성, 117-128쪽)
[묵상]
어느 민주인사가 14년 동안 독방에서 벽을 마주 보며 신약성서 말씀을 묵상하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기 전 울부짖음에 가까운 기도를 들으며, 비로소 자기 삶의 힘과 희망을 찾았다는 고백을 나는 들었다. 십자가상 운명 직전 예수님의 음성이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느님께까지 버림받은 인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아니 하느님의 무능과 실패마저도 그대로 드러내셨다. 그럼에도 그 무능과 실패의 바닥에서 생명과 희망, 부활이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나약함과 무력 속에서 당신 영혼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셨다. 그리하여 약함의 바닥에서, 철저한 실패의 체험에서 하느님의 희망과 구원을 보여주셨다. 그렇게 아래로부터의 영성체험을 나는 보았다. 그 죄인 아닌 독방 죄인의 신앙고백 속에서도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느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