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제 60강

왜 교회는 세상의 누룩과 소금, 그리고 빛이 되어야 하는가

60강.jpg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1939년), 조르주-앙리 루오(1871-1958년)

‘종교가 얼마나 많은 범죄를 부추겼던가’라고 말했던 루크레티우스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범죄로서 종교전쟁을 끝장내기를 꿈꾸어 왔다. 사람이 종교적 문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선악 대립이 그들을 묶어놓기 때문이다. 시몬 베이유는 <쿠튀리에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156-170쪽)에서 중세 유럽의 이단인 알비파(카타리파)의 전승에 악마가 피조물들을 유혹하는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해준다.

 

“신과 함께라면 당신들은 자유롭지 못해요. 선만을 행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저를 따르세요. 그러면 당신들은 마음대로 선과 악을 행할 힘을 가질 수 있어요.” 경험은 이 전승의 편입니다. 순수함은 항상 타락하기 때문입니다. 쾌락의 매혹 때문이 아니라 인식과 경험의 매혹으로 인해서 말입니다.

사람은 악마를 따릅니다. 그래서 악마가 약속했던 걸 받습니다. 하지만 선악의 대립 쌍을 소유하고선, 불타는 숯을 손에 든 아이처럼 제멋대로 움직입니다. 그들은 불타는 숯을 내던지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음을 깨닫지요.

불타는 숯을 내던지기 위한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방법은 비종교적입니다. 선악 대립의 현실을 부정하는 게 그것입니다. 우리의 세기는 그걸 시도했지요. “충족되지 못한 욕망을 가슴속에 지니는 것보단 요람 속 아이를 질식시키는 게 더 낫다”는 블레이크의 얘기가 동시대인들에게 큰 반향을 가졌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인가를 위해 노력하는 건 욕망이 아니라 목표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를 향한 노력은 사람의 본질 자체이지요. 마음의 생각들과 몸의 움직임들은 그런 노력의 형태들이고요. 목표를 향한 지향성이 사라지면 사람은 미쳐 버립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 그리고 의학적인 의미에서 말입니다. 즉 모든 게 별 차이가 없다는 원칙에 입각한 이 방법은 사람을 미치게 만듭니다. 이 방법은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고서도 사람을 권태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이 권태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게 제일 큰 고통인, 감옥의 독방에 갇힌 불행한 사람들의 권태를 닮았습니다.

유럽은 1차 대전 이후 그런 권태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집단 수용소들에 반대하는 노력을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요.

풍족함 속에서 넘쳐 나는 자원을 갖춘 사람들은 권태에 눈을 감으려 놀이를 합니다. 진지하게 임하는 아이들의 놀이가 아니라 갇혀 있는 성인들의 놀이 말입니다.

그러나 불행 속에선 힘들도 욕구를 채워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들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질문도 더 이상 제기되지 않습니다. 이제 사람이 견지할 수 있는 건 희망밖에 없습니다. 불행한 사람들의 희망은 놀이의 도구가 아니지요. 그리하여 공허는 견딜 수 없는 게 됩니다. 사람들은 모든 게 별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시스템을 진저리치며 내다 버립니다.

바로 이런 일이 유럽에서 벌어졌었습니다. 나라들은 번갈아 가면서 그 끔찍한 행태들을 드러냈었습니다.

둘째 방법은 우상 숭배입니다. 이 방법은 종교적입니다. 종교라는 단어를 프랑스 사회학자들이 사용하듯이, 다양한 신의 이름 아래 사회적 현실을 찬양하는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유럽은 비극의 중심에 머물러 있습니다. 어쩌면 프로메테우스의 불과 똑같은 것일 그리스도가 지상에 가져다준 불 가운데 몇몇 숯불이 영국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었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저 잠시 휴식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대륙에서 타들어 갔던 그 숯불들과 불똥들이 유럽을 비출 불꽃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 길을 잃을 것입니다.

이 자유가 미국의 돈과 공장들에 의해서만 얻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건 다시 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굴종과 맞먹는 또 다른 형태의 굴종 속으로. 잊어선 안 됩니다. 유럽이 다른 대륙이나 화성에서 온 무리에게 종속된 게 아니라는 것을. 만일 그랬다면 그들을 단지 쫓아내면 됩니다. 하지만 유럽은 내적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유럽은 치료받아야 합니다.

유럽이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이것입니다. 즉 자신의 많은 부분으로부터 해방돼야 한다는 것. 다행히도 유럽은 정복자들의 우상 숭배에 맞서서 또 다른 우상 숭배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피정복 민족들은 우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종속된 나라들이 정복자들에게 맞세울 수 있는 건 어떤 종교밖에 없습니다.

안전을 위해선, 영혼을 다른 데 숨겨야 합니다. 그 일을 하는 기술이 바로 셋째 방법입니다. 신비신학la mystique의 방법이 그것이지요. 신비신학은 선악 대립의 영역 너머에 이르는 통로입니다. 그 통로는 영혼과 절대적 선의 합일로 생겨나는 것이지요. 절대적 선은, 악에 대립하면서도 상관적인 선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런 선이 절대적 선을 모델이나 원칙으로 삼더라도 말입니다.

합일은 실제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젊은 처녀가 남편이나 연인이 생긴 뒤 더 이상 처녀가 아니듯, 영혼은 그런 합일을 거친 뒤 영원히 다른 것이 됩니다.

이때 벌어지는 것은 피조물이 악마를 따를 때와 정반대의 변모입니다. 물론 그건 에너지를 빼앗기는 법칙과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히틀러는 악을 위해 움직입니다. 그의 재료는 대중과 밀가루 덩어리입니다. 우리는 선을 위해 움직입니다. 우리의 재료는 효모입니다. 이 방법들은 서로 다른 결실을 맺을 겁니다.

 

성서는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 그 어떤 어둠에도 자리를 내어 준 적 없는 빛, 그리고 세상 악을 이기려 누룩처럼 부풀러 올라오는 선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제 세상을 만난 듯 악이 득세하는 것은 선의 누룩, 소금과 빛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진리의 성령과 함께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 당싱 유대인 6백만 명을 학살하고, 러시아의 푸틴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50만 명 죽음으로 내몰았다. 하마스가 억류한 민간인 포로 500명에 대해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민간인 10만 명을 넘게 학살하였다. 이 모습을 보면서 누가 더 큰 악이고 어떤 큰 악을 제거해야 하는지에 대해 반문하게 된다.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 이익만을 위하여 타인과 타인공동체의 공동선을 침해하는 전쟁은 명확히 악이다. 정글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와 무엇이 다르다 할까. 다시 시몬 베이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선악에 대한 무관심이 그랬던 것처럼, 우상 숭배의 방법도 일종의 광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이 두 광기는 서로 다릅니다. 독일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심하게 첫째 광기를 않았습니다. 결과는 꼭 그만큼 폭력적이었지요. 하지만 절망으로 인해 다시 둘째 광기에 빠져들면서도, 독일은 첫째 광기의 많은 부분을 유지했습니다. 그 두 광기의 조합이 만들어 낸 것이 몇 년 전부터 세계를 공포와 경악으로 몰아넣었지요.

하지만 우리는 꼭 알아야 합니다. 독일은 20세기 사람들인 우리 모두의 거울임을. 우리가 독일에서 그토록 참담하게 여기는 것들은 우리 자신의 속성들이 확대된 것일 뿐임을.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성찰이 거꾸로 전투의 동력을 앗아 가선 안 되겠지요.

우상 숭배는 타락을 시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상숭배는 일시적입니다. 소멸하는 것이니까요. 로마는 결국 침략을 당했고 굴종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민간 전승은 영혼을 알 속에 숨겼기 때문에 누구도 해칠 수 없었던 거인들의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습니다. 그 알은 물고기 안에 있었고, 물고기는 아주 멀리 떨어진 연못에 살고 있었고, 그 연못은 용의 보호 아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젊은 청년이 비밀을 알아챘고, 알을 훔친 뒤 거인을 죽입니다. 거인은 이 세계 안, 땅 위의 어떤 곳에 자신의 영혼을 숨기는 경솔한 실수를 한 것이지요. 젊은 나치 친위대원도 똑같은 경솔함을 범하고 있습니다. 안전을 위해선, 영혼을 다른 데 숨겨야 합니다.

그 일을 하는 기술이 바로 셋째 방법입니다. 신비신학la mystique의 방법이 그것이지요. 신비신학은 선악 대립의 영역 너머에 이르는 통로입니다. 그 통로는 영혼과 절대적 선의 합일로 생겨나는 것이지요. 절대적 선은, 악에 대립하면서도 상관적인 선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런 선이 절대적 선을 모델이나 원칙으로 삼더라도 말입니다.

합일은 실제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젊은 처녀가 남편이나 연인이 생긴 뒤 더 이상 처녀가 아니듯, 영혼은 그런 합일을 거친 뒤 영원히 다른 것이 됩니다.

이때 벌어지는 것은 피조물이 악마를 따를 때와 정반대의 변모입니다. 물론 그건 에너지를 빼앗기는 법칙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열이 운동으로 전화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불가능합니다.

선악 대립을 벗어나는 이 세 가지 방법 가운데 어떤 것도 노예들이나 피정복 민족들은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고통과 모멸은 매일 그들 안에 외적인 악을 집어넣어, 두려움과 증오의 형태를 한 내적인 악을 일깨웁니다. 그들은 악을 잊을 수도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상에서 지옥과 제일 비슷하게 닮은 곳에서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 세 방법을 사용할 수 없는 건 똑같은 뜻에서가 아닙니다. 둘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초자연적인 방법은 단지 어려울 뿐입니다. 즉 그 방법은 영적 가난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영적 가난의 미덕은 부자들이 부의 얼룩을 지우려면 꼭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꼭 필요합니다. 그들이 가난 속에서 무너지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하지만 부자건 가난하건 영적 가난을 실천하는 건 똑같이 어려운 일입니다. 정복당하고 억압받는 유럽이 해방의 순간에 최선의 날들을 맞으려면, 그사이에 영적 가난의 미덕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이 전쟁이 종교적 드라마일 것임을 일찍이 이해했었다면, 우리는 몇 년 전부터 예견할 수 있었을 겁니다. 어떤 민족들이 능동적 행위자고 어떤 민족들이 수동적 희생자일 것인지를. 종교적 삶을 살지 않는 민족들은 단지 수동적 희생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유럽의 거의 전체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하지만 독일은 우상 숭배의 삶을 살았습니다. 러시아는 또 다른 우상 숭배를 살았고, 아마도 그런 우상 숭배 배후엔 부인된 과거의 어떤 유산들이 아직 꿈틀거릴 것입니다. 영국은 비록 세기의 질병들로 곪고 있지만, 그 나라의 역사엔 연속성이 있고, 전통 속엔 삶의 역능이 존재해서, 몇몇 뿌리는 신비신학의 빛이 스며든 과거로부터 수액을 끌어올립니다.

한때 프랑스의 모든 벽이 “우리는 이길 것이다. 우리는 제일 강하니까”라는 벽보로 뒤덮인 적이 있습니다. 그건 이 전쟁에서 제일 어리석은 표어였지요. 결정적 시점은 우리 군대가 거의 괴멸되었던 그 시점이었습니다. 적군이 멈춘 건, 신적이지 않은 힘이 한계를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다른 대륙들로까지 확장됐습니다. 일본을 이끈 우상 숭배는 다른 민족들의 우상 숭배보다 훨씬 격렬합니다. 미국엔 민주주의적 믿음이 아직 살아 있습니다. 프랑스에선 이미 전쟁 전에, 심지어 뮌헨 전에 그런 믿음이 거의 사라졌지요. 결국 우리의 시대는 단순한 믿음의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의 시대는 우상 숭배와 신앙의 시대입니다. 미국에서 전쟁은 최근의 것이고, 거리로 인해 실감이 덜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충격으로 인해, 전쟁이 더 지속된다면 중요한 전환들을 맞으리라는 건 거의 확실합니다.

유럽은 비극의 중심에 머물러 있습니다. 어쩌면 프로메테우스의 불과 똑같은 것일 그리스도가 지상에 가져다준 불 가운데 몇몇 숯불이 영국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었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저 잠시 휴식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대륙에서 타들어 갔던 그 숯불들과 불똥들이 유럽을 비출 불꽃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 길을 잃을 것입니다.

이 자유가 미국의 돈과 공장들에 의해서만 얻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건 다시 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굴종과 맞먹는 또 다른 형태의 굴종 속으로. 잊어선 안 됩니다. 유럽이 다른 대륙이나 화성에서 온 무리에게 종속된 게 아니라는 것을. 만일 그랬다면 그들을 단지 쫓아내면 됩니다. 하지만 유럽은 내적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유럽은 치료받아야 합니다.

유럽이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이것입니다. 즉 자신의 많은 부분으로부터 해방돼야 한다는 것. 다행히도 유럽은 정복자들의 우상 숭배에 맞서서 또 다른 우상 숭배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피정복 민족들은 우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종속된 나라들이 정복자들에게 맞세울 수 있는 건 어떤 종교밖에 없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대도무문이고, 정도(正道)로 가는 것이 문제해결의 가장 첩경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3-16).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 13,33; 루카 13,20-21).

 

예수님 말씀대로 하늘나라는 이 세상에서 아주 적은 누룩과 같다. 하지만 그 누룩은 밀가루와 결합하여 크게 부풀러 오른다. 마치 세상 악이 온통 지배하는 것 같으나, 마침내 미소하게 보이던 진리와 선이 세상의 악을 이기듯, 그리스도의 빛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 세상 악이 약해 보이는 선을 짓밟아도 다시 일어선다. 마치 김수영 시인의 ‘풀’처럼 말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이 세상 모진 풍파, 거친 폭우 속에서 쉽게 눕혀지는 풀. 그러나 곧 웃으며 일어나 살아있음을 알린다. 악을 향한 선의 승리를 보는 듯하다.

 

오늘 우리 사회를 ‘위험사회’로 진단한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자기만의 신>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한다.

 

이단 교리와 정통교리: 종교적 자유의 역사적 비개연성, 개인화(울리히 벡, 자기만의 신-우리에게 아직 신은 존재할 수 있는가, 146-151쪽)

 

자기만의 신을 ‘발명’하다: 마르틴 루터

 

루터가 ‘서 있는’(“나는 여기에 서 있다. 나는 다른 걸 … 할 수가 없다”) 자리를 보여주는 종교개혁이라는 ‘이단’ - 개인화의 혁명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 역시 기독교의 기본적 모순과 연결되어 있다. 기독교에는 한편에서는 신앙 개인화, 다른 한편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종교전통 및 교회전통 사이에서 기본적인 모순이 존재한다. 루터는 그 모순을 재설정하였으나 결코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는 거기에 새로운 긴장을 부여했을 뿐이다. 이와 같이 ‘개인화 제1단계’는 종교 내부에서 일어난 현상이다. 개신교의 경계정치를 보면, 폭력이 수반되는 신자와 불신자 간의 경계를 루터가 ‘단지’ 약간 이동시켰을 뿐 아주 없애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종교개혁 역시 그들 나름의 이단을 만들어내었고 유럽을 거의 무제한적인 종교전쟁으로 몰아갔다. 물론 ‘종교개혁을 일으킨 이단자’들 역시 구교의 적대논리 속에서는 완전히 적대세력으로 취급되었다(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006년 개신교에 대해 판결한 내용을 보면 오늘날까지 이런 추세가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루터 혁명의 골자는 아마도 자기만의 신을 ‘발명’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는 신과 개인 간의 무매개성이라는 개념을 구성함으로써 ‘유일한’ 신과 ‘자기만의’ 신을 결합했다. 또 그렇게 해서 교회의 정통 교리에 대항해 주관적 신앙의 자유를 설파하는 ‘무모함’ ‘무지막지함’ ‘이단’을 성공적으로 관철했다. 그런데 21세기가 시작되는 현재에 이르러서 ‘자기만의 신’은 오히려 교회를 벗어나고 있다. 이것은 신종교운동이 일으키는 제2의 지구적 종교개혁으로서 유일신이자 자기만의 신이기도 한 루터의 신에 내재한 모순적 형상이 뒤늦게야 반향을 일으킨 현상이다.

한스-게오르크 죄프너는 신앙의 집단성에서 개인화된 개신교 형태로 가는 과정을 루터를 통해 묘사한다. 그러면서 그는 단지 루터의 일대기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천착’의 한 형태를 지식사회학적으로 재구성했다. 요즈음에는 ‘스스로에 대한 천착’이 집단적으로 진행되면서 당연한 현상이 되었는데, 그것은 자기관찰의 기술을 완전히 습득한 형태 또는 스스로를 관찰하는 ‘자아’를 분리하는 것을 의미한다(Soefiner). 루터는 ‘종교적’이라는 형용사를 ‘종교’라는 명사로부터 분리한다. 종교에는 이항대립(‘이거냐 저거냐’)과 교회의 권위가 내재하는 반면, 종교적인 것에는 반드시 그런 것들이 수반될 필요가 없다. 종교적인 것은 신에 대한 개인의 관념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주관적 신앙이 교회의 권위로부터 이탈하고 ‘자기만의 신’과 대면함으로써, 즉 자기대면을 통해서 신앙이 확신을 얻는다. 이렇게 해서 (베버가 연구하고자 했던) 사회적 행위의 ‘주관적 의미’가 종교이론과 종교사회학에서도 마찬가지로 핵심적이면서 동시에 해명하기 어려운 주제로 등장한다(Graf). 매사에 “내 생각에는…”이라는 주관적 근거로부터 확실성이 도출된다. 그러니 만일 누가 ‘자기만의 신’을 알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이 이해받을 수나 있겠는가? 아니 이 말을 살짝 세계시민적으로 바꾸어 표현하면 우리는 종교적 타자의 ‘마음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 것인가?

신앙에 확실성을 제공하는 근원을 교회의 위계질서 대신 자아에서 찾는 사람은 관점의 변화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변화’까지도 가져온다. 루터에게 세계라는 거시적 우주는 자신의 경험, 양심, 이해관계 및 필요성에 의한 싸움이라는 미시적 우주에 자리를 내주었다.

“신의 군대와 사탄의 군대가 맞서는 살육장은 더 이상 키비타스(Civitas, 고대 도시국가 의미하는 라틴어-옮긴이)가 아니다. 이제는 개별 인간이 전쟁터가 되었다. 그리하여 ‘사탄’에 대한 논란이 더 이상 폴리스(polis, 고대 도시국가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옮긴이)나 공동체적 단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개인 내부에서 ‘광란’을 일으킨다. 인간에 대한 싸움이 인간 내면에서 일어난다. 또 동시에 이와 같이 냉혹한 현상의 - 대개의 경우 유일한 - 증인은 인간이다”(Soefiner).

‘자기만의’ 신에서 ‘자기만의’는 무엇을 말하는가? 첫째로, 그것은 개인이 전통 교회의 연고와 권위로부터 떨어져 나왔음을 의미한다. 루터는 교회라는 ‘어머니’의 보호로부터 떠나라고 개인들에게 요구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대신 신과 개인을 매개하고 보호해줄 대체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전통은 별 의미가 없거나 아무것도 아니다. ‘계시의 말씀’의 직접성, 신의 직접성이 전부이다.”

그 결과 “신자는 신앙, 회개, 은총에 집중한다. 개인이 신과 직접적으로 만나기 위해 집중한다”(Soefiner). 이렇게 해서 내면과 외면으로부터, 세계와 신앙으로부터 새로운 가치평가가 이루어진다. 세계라는 외면적 우주에 앞서 자기만의 신이라는 내면적 우주가 모든 행복의 근원이 된다.

“신과의 직접적 대면에 집중함으로써 시간의 순환적이고 의식(儀式)적인 질서가 무너지고 시간은 선택과 증명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순간들로 바뀐다. 세대 간의 순환적 질서 역시 신 앞에 홀로 선 개인으로 바뀌었다. 무매개성의 가설을 통해 사회성을 이루는 최소한의 단위 – 개인 - 가 점차 유일성의 자리까지 넘보는 것이다. 최상위의 바로 그 자리를 개인이 차지한다”(Soefiner).

이처럼 우선순위가 뒤바뀐 현상은 루터가 보름스 제국의회에 소환되면서부터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 그 사건은 새로운 종교생활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상징 이상이다. 그것은 우리가 ‘개혁’이라고 말하는 종교생활이 집단적으로 영위되고 있음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그 종교의 방향이 개인의 내면을 향한다는 사실까지 만천하에 드러냈기 때문이다. 거기서 - ‘자기만의 신’의 힘을 빌려서 - 루터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양심을 집합적 권위에 대립시키는 주관적 유형(“주관성 유형”)의 종교를 보여주었다. 그렇게 해서 그것의 핵심이 ‘개인화’라는 ‘스캔들’과 ‘이단’임이 강조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번복할 수 없고 번복하지도 않을 것이다. 양심을 거스르며 행동한다는 것은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유익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신이여 나를 도우소서”(Soefiner).

그러나 이것은 사실의 일면일 뿐이다. 그 이면에서 루터는 경계를 다시 긋는다. 신앙권위를 주관에 맡게 개인화하는 탈경계의 과정에서 다시 울타리를 쳤다. 그리하여 바로 그다음 순서에서 신의 직접성은 성경의 말씀의 직접성과 융합된다. 루터가 말하는 자기만의 신은 결코 21세기의 ‘짜집기 신’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성경 구절에 의존하는 성경의 신으로서, 문자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자기만의 신이자 동시에 유일신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루터는 ‘자기만의 신’은 성경에 유일신과 일치한다. 루터는 신을 주관화하고 개인화하는 동시에 그 과정에 신에 대한 유일신의 독점 역시 끼워 넣는 모순을 보여준다. 종교적 보편주의에서는 자기만의 신이면서 또 유일의 신이 필수적이다. 그 신은 절대성을 주장하며 종교적 ‘정신’의 개인화라는 근본적이고 기초적 경험을 항상 통제하고 재생산한다.

“스스로를 성찰하고 스스로를 먹여 살리는 자율적이고 ‘해방된’ 주체, 이러한 루터식 변종이, 즉 그때그때 도달한 ‘내면적 자유’의 정도에 따라 해방이나 ‘자유로워짐’을 측정하는 그런 변종 주체가 새로운 ‘신’이 되고 영웅이 되었다. 계몽사상 시대부터 세계정의를 위해 싸우는 시민 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 그런 신과 영웅들이 세계 속에서 새로운 올림포스를 가꾸는 주민들이다.”

“그리하여 개신교의 관점에서 볼 때 ‘교회’라는 신성한 제도는 더 이상 정당화되지 않고 권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 더 결정적인 사실은 - 일상생활에서까지 영향력을 잃었다. 과거에 교회는 영혼을 구제하는 사제의 보호와 조언을 통해 일상생활에 결합되어 있었다. 반면에 개신교 교구는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공동체와 전혀 딴판이다. 한편으로는 교구 안에서 개개인 모두가 신과 자신만의 독특한 관계를 형성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구라는 전체 공동체를 통해 개별 구성원들이 서로를 통제하는 경향이 있다. 의례적이고 의례화되었으며, 또 제도적으로 구석구석 조직되어 기본적으로 사제에 의해 영혼이 구원되는 ‘합리적-체계적 형태’(Max Weber)를 띤 가톨릭 교회 단체와 이런 개신교 교구는 완전히 딴판이다”(Soefiner).

종교공동체 내부에서 이처럼 개인화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확실히 모순적이다. 개인화에 의해 개인화의 모태가 된 고도의 사회적 결속이 은폐되지 않는가? 개혁 교회로 ‘재결합’되는 과정이 바로 개인화의 동력이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해서 장기간 모순이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만성적 저항분자이자 집단 속에서 큰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개신교도’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자기만의 신에 몰두하는 개인에게는 무엇보다도 그와 같은 사회적·정치적 의미지평이 사라질 위험이 상존한다. 사회와 정치의 위기는 내면적 위기로 전환되어 개인과 신의 관계가 교란된 탓으로 돌려진다. 그래서 세계를 뒤흔드는 혼란은 이제 인간이 “신 안에서 평안”을 찾지 못하고 “신에 대한” 복종심을 잃은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Soefiner). 그렇게 해서 신과의 대화로 둔갑한 자전적인 독백이 시작되었다고 관찰자 입장에서는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신의 개인화는 멈추지 않고 진행되어 결국 개인을 괴롭히는 실존문제에 대한 답을 초월적 존재가 아닌 개인 자신으로부터 얻고자 한다.

개인은 - 신과의 유사성과 신의 직접성으로 인해 - 스스로의 내면에서 ‘자기충족’ ‘진정성’ ‘창의성’의 근원을 발견한다. 우리가 쉽게 눈치챌 수 있듯이 이 모든 특징들은 루터 당시까지도 중세 기독교 신앙에서 오직 하나뿐인 유일한 주체였던 신한테서나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대체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에 의해 신적인 창조주의 특징이 내면세계를 확보한 주체의 개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하여 그와 같은 자리바꿈, 또 그와 결합된 전지전능함에 대한 환상, 그런 것에 대한 옹호와 허상-또 실망이 자기만의 신이 갖는 특징이 되었다. 개인화된 세계관, 인간관을 준거로 삼는 자기만의 신이 갖는 특징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결국 이 세상이 모든 전쟁의 악은 자기 자신만의 신은 선이고 상대방의 신은 이단이며 제거할 악이라는 데서 기인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근본 뿌리에서 맺는 결실이 악이다. 성서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고 한다. 자신만의 신, 그 우상숭배의 타파만이 더 큰 악을 물리칠 수 계기를 마련한다.

 

내 지인이 보내온 문자 메시지에 이런 글이 있었다.

 

중국의 사상가 맹자는 딱한 처지에 놓인 어린아이가 있으면 가련한 마음으로 서슴없이 아이를 도울 것이라며 성선설을 주장했고, 전국시대의 순자는 본성이 착하다면 질서나 법이 무슨 필요가 있겠냐며 성악설을 내세웠습니다. 히포의 주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은 실체가 없는 선의 부족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잘못을 감추려고 거짓을 꾸며 상대를 되치는 집단이 악이고 그 악에 대응하여 피가 터지도록 그런 악과 싸우는 자가 선이라고 말합니다. 선의 근원은 정의입니다. 불의를 보고서 참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 불의를 정의로, 악을 선으로 이기는 싸움은 사랑과 정의의 실천임을 성서는 지적한다.

© 2023 by Train of Thoughts. Proudly created with Wix.co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