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강
참된 행복 : 하느님 나라를 사는 생활 규범, 하느님 나라에 사는 행복한 사람들
10. ‘행복한 한스’ - 비움의 미학
비우고 버리는 것에서 행복의 비결을 찾을 수 있다는 교훈을 전해주는 그림 형제의 동화 ‘행복한 한스’로 마무리 묵상을 해본다.
한스는 7년 동안 부지런히 일한 뒤 고향의 어머니에게로 가려고 마음먹었다. 한스는 그동안 대가로 주인으로부터 큼지막한 금덩어리를 받았다. 한스는 이 보물을 보자기에 싸고 등에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주 행복했다. 그러나 한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금덩어리가 너무 무겁고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마침 저편에서 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오고 있었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 말을 타면 내발로 걷지 않아도 집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한스는 금덩어리를 말과 바꾸었다. 한스는 매우 행복했다. 얼마 후 악마가 나타나 말을 공격했다. 놀란 말이 그만 한스를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한스는 화가 났다. 그런데 마침 농부가 암소를 끌며 지나갔다. 암소란 얼마나 근사한가! 암소 뒤만 따라가면서, 필요한 대로 우유나 먹으면 되겠지! 한스는 말과 늙은 암소를 바꾸었다. 한스는 매우 행복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참을 가자 날은 더워지고 목이 말랐다. 소를 나무에 매고 젖을 짜자 우유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늙은 암소는 젖이 나오지 않았을뿐더러, 몹시 성가시게 굴었고 한스를 뒷발로 차기까지 했다. 한스는 암소가 싫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푸줏간 주인이 돼지를 끌고 나타났다. 돼지란 얼마나 근사한가! 돼지고기가 소고기보다 맛있고, 소시지도 먹을 수 있지 않은가! 한스는 암소를 돼지와 바꿨다. 다시 한스는 매우 행복했다. 그러다 한스는 살이 잔뜩 진 거위를 데리고 가는 사나이를 만났다. 이런 거위라면 얼마나 신이 날까! 한스는 돼지에 만족할 수 없었다. 한스는 거위 통구이와 깃털로 만든 쿠션을 상상했다. 한스는 지저분한 돼지와 거위를 맞바꾸었다. 그리자 한스는 무척 행복했다. 그렇게 한스는 고향 앞마을까지 왔다. 거기에는 명랑한 가위장수가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한스는 가위 장사만큼 흥미로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한스는 거위를 가위 가는 숫돌과 바꿨다. 한스는 다시 행복해졌다. 그러나 길을 가면 갈수록 숫돌이 무거워졌다. 한스는 지쳤고 목이 몹시 말랐다. 간신히 우물을 찾은 한스는 숫돌을 옆에 놓고 물을 마시려 허리를 굽혔다. 그 바람에 그만 숫돌이 우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한스는 너무나 행복했다. 한스는 자기가 힘들 때마다 늘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스는 “하느님, 어려울 때마다 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한스는 모든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어 가벼운 마음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며 집으로 돌아왔다.
한스는 금 덩어리, 말, 소, 돼지, 거위 그리고 마침내 돌덩이까지, 바꿀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받고 행복했다. 하지만, 행복은 잠시 그것들은 한스를 점점 더 힘들게 만들었다. 마침내 한스는 소유한 마지막 그 돌을 물에 빠뜨렸을 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자, 한스는 자유로워졌고, 그래서 그는 행복했다. 한스는 자신의 것을 내려놓을 때마다 슬퍼하지 않았고, 언제나 그 순간순간을 즐겼다.
한스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행복을 배우는 여정이었다. 한스는 가진 것을 많을수록 행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가진 것을 비우면, 비우는 만큼 행복해지는 것을 서서히 배웠다. 소유와 행복은 비례하지 않았다. 마침내 가진 것이 모두 사라지고, 오직 나 자신만 존재할 때, 한스는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고, 마침내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동화 ‘행복한 한스’는 참된 자유와 행복의 길을 걸어가야 할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스의 행복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의 여정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갈 때 맞이할 행복이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에 이미 와 있다(루카 17,21). 이미 존재하는 그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다.
11. 다시 한 번 참 행복에 대하여
하느님 나라, 하늘의 행복을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으로 행복을 이루어야 할 사람들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자기 비움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즉, 사랑은 자기에게서 나와, 더 이상 자기를 생각하지 않으며, 일체 자기를 향해 기울어지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단지 감정적인 떨림이 아니다. 사랑은 자기를 주고, 내어주려는 의지의 행위이다. “누가 ‘하느님을 사랑한다’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기 때문이다(1요한 4,20).
‘행복한 한스’의 예화에서 보았듯이, 이 세상에서 이 행복을 배워 가는 여정은 자기 비움, 자기희생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비우고 헌신하는 위대한 모범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절정에 달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철저히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초월하여 이르게 될 위대한 행복을 제시한다. 희생과 헌신 없이는 행복이 있을 수 없다.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은 십자가를 멀리 두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소소한 일상 속에서도 자기희생과 행복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체험한다. 예수님의 참 행복 선언은 자기를 버리는 그 신앙의 여정에 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이다.
마태오 복음은 우리 삶 속에서 찾아야 할 참 행복의 여정을 예수님께서 수난의 길을 떠나기 전 ‘최후 심판’의 이야기 속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십자가의 길을 앞둔 이 말씀의 배치가 상당히 의도적이고 의미가 깊어 보인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행복 선언과 관련해서 볼 때, 오늘 내가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해야, 기쁘고 행복한지를 알려주는 분명한 가르침이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5-36).
우리 행복의 조건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난한 이들, 고통 받는 이들을 알아보는 데 있다. 우리가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으로 다가오는 예수님을 맞이할 때, 우리는 참된 행복의 길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의 얼굴”이라며 칙서 <자비의 얼굴Misericordiae Vultus>(2015)을 발표했다. 이 칙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복음의 뛰는 심장”이자 “교회 생활의 토대”라고 했다. 이 세상에서 자비의 실행은 하느님 나라를 사는 복된 삶의 방식이다.
12. ‘마지막 행복 선언’ - 보지 않고 믿는 이들은 복됩니다!(요한 20,29)
‘행복하여라’는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지복직관의 경지로서 복음서 전체를 지배한다. 복음으로 사는 삶은 하느님의 사람으로 사는 믿음의 삶이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마지막 요한 복음서의 끝부분에서도 ‘행복’이 주제어로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는 의심하는 사도 토마스에게 ‘마지막 행복 선언’을 하신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로 말씀하신 진복팔단은 ‘인간의 여덟 가지 유형’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살아가야 할 ‘여덟 가지 생활기준’이라는 성서학자들의 주장이 다수를 이룬다. 이제 제자들의 이 여덟 가지 생활기준에 하나가 더 추가된다. 아홉 번째 행복 선언, 곧 아홉 번째 생활기준이다.
이 요한 복음의 마지막 행복 선언은 어쩌면 앞선 마태오 복음의 진복팔단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보는 토마시 할리크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보지 못했고 오늘날까지 보지 못하기 때문에 따라서 가난하고, 슬프고, 정의에 목말라하는 것은 아닐까?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게만 지금까지 지복직관(visio beatifica)이 약속되었다. 그들 또한 아직 ‘본’ 것은 아니다. 예수는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게 하고 보는 이들은 소경이 되게 하려”(요한 9,39)고 이 세상에 왔다. ‘진리의 소유자’라는 바리사이들은 예수의 이 말을 듣고 놀라 물었다. “우리도 소경이란 말이오?” 예수가 대답한다. “당신들이 차라리 소경이었더라면 당신들에게 죄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지금 ‘우리는 본다’고 하니 당신들의 죄는 그대로 남습니다(요한 9,40-41)(<상처 입은 신앙>, 225쪽).
예수님의 행복 선언은 예언자의 관점에서 과거, 현재의 역사를 보게 해주면서, 하느님 나라라는 종말론적 미래를 향하게 해주었다. 그 미래의 시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뵐 것이고 배부르게 되고 기뻐할 것이며 자비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행복 선언은 어떤 약속이 없다. 사도들처럼 주님의 부활을 보지 않고서도 믿는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다. 예수님 부활 이후에 그분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은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믿음의 시간을 견디어 낸 사람들은 그 믿음 자체로 이미 보상을 받았을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히브 11,1)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는 세상’은 확실히 볼 수 있는 것에만 신뢰를 둔다. 물론 그것도 온전한 신뢰는 아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관련해서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믿음의 실체는 우리가 증인으로서 살면서 세상에 보여줄 그 무엇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Spe Salvi>에서 밝힌 대로 “신앙은 미래를 현재로” 이끈다(7항).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도대체 너희가 품은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언제나 해명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1베드 3,15 참조).
그런데 주님의 부활을 ‘보지 못한’ 우리가 어떻게 미래를 현재로 이끄는 이 희망의 증거를 진행할 수 있을까. 바로 앞 베드로 서간에서 언급했듯이, 이제 해명해야 할 것은, 어두운 세상일 비추는 “우리의 희망, 의리의 신앙, 우리의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짚어보자. 토마스는 부활한 주님을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다고 했다. 결국 토마스는 주님을 보았다. 그리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며 신앙고백을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하신 말씀은 ‘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였다.
토마스 사도 이후로 부활한 주님을 본 사람, 만져 본 사람은 없다. 주님이 보이지 않지만, 아니 주님을 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즉 “참된 신앙, 복된 신앙은 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또한 신앙’이라는 특성을 지닌다”(227쪽).
어부로서 잔뼈가 굵었던 베드로의 고백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이다. 밤새도록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다고 했다(루카 5,5 참조). 주님 말씀에 대한 신뢰는 희망으로 이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따르는 신앙은 우리를 말씀의 증거자로 만든다.
토마스 사도처럼, 또한 보지 않고 그럼에도 그분을 따르는 사람처럼 그분 말씀으로 사도들은 증거자가 된다. 여러 방법으로 불신앙과 불신으로 이끌 수 있는 ‘가시적 세계’에서 나와 ‘보이지 않는 세계’로, 이해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실재’의 숨겨진 신비의 품으로 뛰어들 믿음과 용기를 우리 신앙이 지닌다면, 우리도 ‘증인’이 된다. 세상의 부조리에 부딪힌 고통, 의심과 냉소 그리고 체념으로 우리 마음에서 독을 퍼뜨리는 불신과 불신앙의 상처들은 이제 변화되었다(<상처 입은 신앙>, 228쪽).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님의 삶처럼 하느님께 바쳐진 삶이다. 보다 근원적으로 말한다면, 하느님의 뜻, 곧 정의와 사랑에 바쳐진 삶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향한 삶은 구체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인간의 삶을 향한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고 하셨다. 주님의 뜻을 실행에 옮기는 곳은 이 세상이다.
복음으로 사는 삶은 숙성의 시간이 필요한 음식처럼, 오랜 시간을 거쳐 깊은 사랑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시간이란 지상에서의 삶이며 역사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도 결국 이 삶과 역사 안에서 숙성되어야 할 은총이다. 복음의 삶은 지상의 시간 안에서 하느님의 시간으로 숙성되는 과정이다. 인간의 역사가 은총이 되는 시간이다. 그 시간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행복의 순간을 맛보게 될 것이다.
* * * * *
천사 가브리엘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라며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다. 천사의 이 전언은,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성모 마리아께서 주님과 함께 계시고, 또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시니 참으로 복된 여인이시라는 말씀이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기라는 삶의 표양을 올바로 보여주셨다. 주님이 함께하시는 성모 마리아께서는 성가정을 이루셨고,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살아 나아가기를 증거하시며, 하느님 나라 사는 생활규범인 참된 행복을 사셨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당신 입으로 직접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기’를 간청하면서, 우리의 가정이 주님과 함께하는 성가정이 되도록 하자.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 살아 나아가기를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그 나라를 완성시키도록 하자. 성령께 격려되는 자는 하느님의 자녀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라는 예수님의 모범과 가르침대로, 그 완덕의 길로 나아가는 덕행을 닦아,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 살아 나아가기에 정진하자.
천사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하셨던 성모 마리아께서는모든 것이 은총이고, 모든 것이 사랑임을 알아차리시고,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며 응답하셨다. 그 성모 마리아의 응답송이 바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기인 것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