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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6강

참된 행복 : 하느님 나라를 사는 생활 규범, 하느님 나라에 사는 행복한 사람들

8. 그리스도를 위하여 박해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구약의 율법이 정한 대로 성전에 봉헌되셨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신 날,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경건한 예언자 시메온은 오랫동안 갈망하던 그리스도를 보았다. 하지만 시메온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께,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라며 의로운 사람의 슬픈 운명을 예고했다(루카 2,34-35). 시메온의 예언은 틀리지 않았고, ‘반대받는 표징’으로서의 예수님의 삶은 눈부시도록 의롭고 아름다웠으나, 가슴 시리도록 슬펐다.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예수님의 고난은 너무도 가혹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고난과 박해는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할 수 있는 것’에 기뻐했다(사도 5,41). 선교 여행 중 심한 고난을 겪어야 했던 사도 바오로도 자신이 가장 아끼고 허물없이 지내던 필리피 공동체 신자들이 “적대자들을 겁내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그리고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심지어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마저도 하나의 특권이라며 ‘믿음을 위한 투쟁’을 독려했다(필리 1,27-30).

사도 바오로와 베드로는 물론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복음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견디어야 하는 고난과 박해의 시간을 은총의 시간으로 생각했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특권으로까지 여겼다. 우선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사도 5,41)고 전한다. 앞서 말한 필리피 교회공동체를 향해 바오로는,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 1,29)라며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과 박해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본질임을 밝힌다. 사도 바오로 자신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신도들을 위하여 고난과 박해를 받고 있지만, 이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기쁨이라고 말한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 1,24). “그러한 까닭에 나는 이 고난을 겪고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2티모 1,12).

 

천국의 열쇠를 전달받은 베드로 사도에게도 정의와 선을 위한 고난은 하느님의 은총이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닥치는 박해와 고난은 오히려 하느님을 위한 찬양이기도 했다.

 

잘못을 저질러 매를 맞을 때에는, 견디어 낸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명예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1베드 2,20).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영광의 성령 곧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살인자나 도둑이나 악한이나 모략꾼으로서 고난을 겪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겪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 이름으로 하느님을 찬양하십시오(1베드 4,14-16).

 

로마제국이 지배하던 초대교회에서 박해는 불가피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타협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며 행복을 찾았다. 그들은 하늘 나라의 요구와 도전에 대해 진정한 증거인 죽음으로 응답하며, 하느님 나라 완성을 꿈꾸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한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사람, 성인으로 불렸다. ‘거룩하다’는 하기오스hagios의 어원적 의미에는 ‘다르다’ ‘구별된다’라는 뜻이 들어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획일화와 타협에 맞서 다른 삶을 살았던 ‘다른 이들’, 곧 거룩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도 박해는 과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성인이 “피를 흘림으로써 박해를 당하든, 다른 교묘한 수단으로 곧 비방과 거짓말로써 박해를 당하든” 여전히 박해는 존재하고, 그 박해를 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행복을 전한다(GE 94항).

오늘날의 박해를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성전에 바쳐지셨을 때, 시메온의 말을 다시 떠올려 보자.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의 생각을 거스르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하며, 넘어뜨려서 반대 받는 표징이 될 것이고, 박해를 받아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말이다.

프랑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예수님의 박해에 대해 “겸손의 모습으로 자신을 표명하는 진리, 박해받는 진리라는 기념만이 초월성이 드러날 수 있는 방식에 합당하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박해받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초월적 신성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자기 비움과 겸손으로 자신을 주변부의 선 사람들 즉 사회적 약자, 가난한 사람들, 추방된 사람들의 벗으로 당신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기득권 세력의 질서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을 낮추는 예수님의 겸손한 삶의 방식은 가진 자들의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로부터 프랑수아 바리용 신부는 “그리스도교 정신이란 행복과 십자가의 굳은 결합”이라며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방향성을 말해준다.

 

만일 당신이 그 어떤 형태로도 박해받지 않았다면 매우 조심해야 한다. 당신은 그리스도교인인 체 완전히 가장하고 있거나, 피상적으로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두 건반, 곧 예수님 지혜의 건반과 세상 지혜의 건반을 동시에 연주하려 한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당신이 만일 예수님의 지혜의 건반을 연주하려 한다면, 당신은 내쫓길 것이다. 사람들이 원무를 추며 돌아가는 것을 방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흔들리지 않는 신앙>, 110쪽 이하).

 

 

 

9. ‘참된 행복’ 종합적 이해

 

예수님의 참된 행복의 선언은 세상의 참된 보물, 즉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절대적 가치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알려주신 데 있다. 그 가치는 하늘의 보화를 쌓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정립하고, ‘새 하늘 새 땅’으로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라는 요청이다. 하느님께서 정의롭고 자비로우시듯이 지상의 사람도 그러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인간의 지상적 삶은 ‘하느님 닮기’와 연결되어 있다.

진복팔단을 포함해서 마태오 복음 5장의 산상설교 전체를 살펴본다면, 어떤 규정이나 한계, 조건을 정해놓고 특정한 대상이나 사람을 향하지 말고, ‘항상’ 열린 마음으로 세상으로 나아가라는 가르침이다. 그 이유는 마태오 5장 마지막 48절에 나와 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완전한 행복은 결국 자신의 불완전함을 놓아버리고 하느님의 완전함에 도달하려는 데 있다. 인간의 완전함은 역설적으로 자신을 비우는 데 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낮추시고 자기를 덜어냄으로써 반대 받는 표징이 되셨지만, 그것은 결국 인간이 행복해지는 길이었고, 하느님의 완전성을 닮는 길이였다. 예수님이 앞서 걸으신 길은 오늘 우리도 걸어가야 할 참된 행복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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