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강
참된 행복 : 하느님 나라를 사는 생활 규범, 하느님 나라에 사는 행복한 사람들
5.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히브리어로 하느님의 자비rahamim와 자궁rehem은 어원이 같다. 자비와 자궁이 어원이 같다는 말은 깊은 묵상 거리를 제공한다. 자비를 실천하는 일은, 곧 우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일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세상의 근원을 찾아 떠났던 모든 뛰어난 성인들에게서 보게 되듯이, 근원에 서면 우주의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면서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자비를 베푸는 일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 생명 그리고 정의와 연관된 놀라운 신비가 드러나곤 한다.
자비를 통해 누군가는 불의의 시대에 삶의 희망을 다시 찾고, 누군가는 좌절의 시대에 삶의 의지를 재확인하며, 누군가는 폭력과 불공정의 시대에 의로운 세상을 꿈꾼다. 한자로도 ‘자비’(慈悲)란 타인을 깊이 사랑하고 연민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남의 고통과 아픔에 함께 아파하며 슬픈 마음을 갖는 사람, 측은지심을 지닌 사람이다. 자비 역시 하느님 나라의 진정한 구성요소이다. 자비에는 실제적 차원에서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인간을 향하는 친절한 마음이 깔려있다. 다른 사람을 향하는 감정이입, 즉 공감은 그렇게 타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자비심이 없는 사람, 타인과 더불어 아파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를 얻을 수 없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보내시기까지 먼저 우리 인간의 고통과 아픔에 함께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예수님의 고통,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 사랑의 깊이를 드러내는 표징이다. 고통의 심연은 신비의 차원이다. 인간의 고통과 아픔은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통로로 이끈다. 그래서 고통은 무엇인가 아주 신비로운 것, 그것 없이는 사랑이 사랑일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통은 우리에게 하느님 사랑의 깊이를 계시해 준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 자비심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처럼 세상의 주변부를 향한다. 그곳에서 작은 자, 약한 자, 가난한 자, 아픈 자, 고독한 자, 모욕을 당하는 자, 폭력을 당하는 자, 불의에 희생되는 자, 괴로워하는 자, 불안한 자에게 다가가 함께한다. 바로 예수님이 세상의 주변부, 세상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함께 하셨던, 바로 그 타인의 감정을 느끼고 함께하는 공감compassio의 방식이다.
이집트 땅에서 노예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외침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응답하셨다. 하느님의 자비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해방하셨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 백성의 아픔에 공감하는 섬세한 심성을 지녔고, 고통 받는 백성을 대신해 하느님께 부르짖었다. 예수님의 연민은 세상에서 밀려나 주변에 선 이들을 치유해주셨다. 그것은 고통과 슬픔에 잠긴 이들에게는 해방이요 구원이었다. 자비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의 핵심을 이룬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율법의 완성에 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자비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구체적으로 타인을 위해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고 봉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용서하고 이해하며 관용을 베푸는 자비의 두 측면을 언급한다(GE 80 참조). 이것은 마태오복음에서 말하는 황금률,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마태 7,12)로 요약된다. 이는 특히 도덕적으로 명확하게 판단 내리기 어려운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다(<가톨릭교리서>, 1787항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비는 용서와 깊은 연관이 있으며, “일흔일곱 번”의 용서(마태 18,,22)를 통해 얻는 참 행복의 진리를 다시 일깨워준다(GE 82항).
자비는 실제 생활에서 옮겨지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가엾게 여기신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자비를 실행해 옮기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를 입는다는 말이다. 평생을 자비를 베풀며 사는 것이 삶의 신조였던 구약의 토빗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자비를 베풀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는 눈이 먼 뒤, 자신의 아내를 의심했던 것을 후회하면서 유언장을 작성하는데, 자비의 모범이기도 한 경건하고 아름다운 토빗이 전해주는 말은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도 깊은 울림을 준다(토빗 4장).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을 거둔다. 의로운 일을 하는 모든 이에게 네가 가진 것에서 자선을 베풀어라. 그리고 자선을 베풀 때에는 아까워하지 마라.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라. 그래야 하느님께서도 너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으실 것이다. 네가 가진 만큼, 많으면 많은 대로 자선을 베풀어라. 네가 가진 것이 적으면 적은 대로 자선을 베풀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곤궁에 빠지게 되는 날을 위하여 좋은 보물을 쌓아 두는 것이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암흑에 빠져들지 않게 해 준다. 사실 자선을 베푸는 모든 이에게는 그 자선이 지극히 높으신 분 앞에 바치는 훌륭한 예물이 된다(토빗 4,6-11).
6.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하느님을 볼 수 있다! 정말 그렇다면 엄청난 사건이다. 모세도 보지 못한 하느님을 어떻게 우리가 본다는 말인가. 하느님의 얼굴을 본다는 일은 영원의 세계와 마주하는 일이다. 시간에 매여 사는 유한한 인간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느님을 볼 수 있다고 분명히 선언하신다. 게다가 예수님은 당신을 본 사람은 이미 하느님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하셨다(요한 14,9). 하느님을 본다는 이 놀랍고 엄청난 사건이 예수님 안에서 벌어진다.
유다인들이 정결례를 지키며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흠이 없도록 했던 것은, 결국 내 안에 하느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려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깨끗함을 나타내는 말로 그리스어 카타로스katharos를 선택했다. 이 말은 ‘오점이 없는, 순수한, 정결한, 죄가 없는’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깨끗한 마음을 지녔다는 것은, 마음인 올곧은 사람, 진실한 사람, 성실한 사람으로 참된 것을 소유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거짓과 탐욕을 멀리하고 진리 안에서 하느님과 세상을 보려는 사람이다.
히틀러 시대 나치에 저항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위대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으로도, 자기가 행한 선한 일로도 마음을 더럽히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형제적 사랑으로 무장하여 세상의 편견과 증오, 그리고 두려움을 넘어선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렇게 소박하고, 때 묻지 않은 사람은 사랑으로 인해 자유로운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의 선행은 요란하지 않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음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때(마태 22,36-40), 이러한 사랑이 공허한 말이 아닌 진전한 원의일 때, 그 마음은 깨끗한 것이며 하느님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GE 86항).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의 찬가’라는 이름으로 너무도 잘 알려진 코린토 1서 13장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펼치는 사랑 예찬이다. 사랑의 목적 또는 사랑의 완성은 결국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던 하느님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보듯 온전히 보는 일이다(1코린 13,12). 지금 하느님에 관한 모든 것이 흐릿할 수 있다. 하지만 서로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며, 탐욕을 버리고 단순하게 살아간다면, 그리하여 깨끗하고 소박한 마음을 간직한다면 거울의 비친 어렴풋한 모습들은 조금씩 지워질 것이다.
돌같이 굳은 마음에는 하느님의 얼굴, 예수님의 얼굴을 새길 수 없다. 성녀 베로니카의 순박하고 사랑과 진실이 가득한 깨끗한 마음, 자비로운 마음 안에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졌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의 현실이지만 그 안에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졌다. 돌같이 굳은 마음으로는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도 새길 수도 없다.
깨끗함은 단순함이다. 가식과 위선으로 덧칠한 세상에서는 깨끗함은 전혀 존재할 수 없다. 나의 참된 얼굴을 드러날 때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깨끗하지 못한 마음으로 어떻게 참되고 고결한 것을 볼 수 있을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고통받는 이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또 고통받는 이들에게 연대와 사랑과 도움을 보이면서 세상에 그리스도의 얼굴을 선포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30차 청소년 주일을 맞아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라는 성경 구절을 제목으로 담화를 발표하였다(2015년 5월 31일). 그중 일부를 발췌해서 옮겨본다. 청년들에게 ‘행복해질 용기를 내라’는 교황의 메시지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위로이자 어떤 지침을 전해준다.
그렇다면 깨끗한 마음에서 나오는 행복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을 더럽히는 악의 목록을 살펴보면 우리는 특히 우리의 관계가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마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식별하고 올바르고 사려 깊은 양심을 함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로마 12,2) 됩니다. 우리는 피조물, 공기와 물과 양식의 깨끗함에 대하여 건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 우리 마음과 관계의 깨끗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인간 생태계는 우리가 아름다움, 참사랑, 거룩함에서 오는 깨끗한 공기를 호흡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일상의 구체적인 실천 안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다고 일러준다. 즉 성경의 하느님 말씀에서, 그리고 세상의 주변부에서 소외되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고 권고한다.
저는 다시 한 번 여러분이 성경을 자주 읽으면서 주님을 만날 것을 권유합니다. 여러분이 아직 성경 읽기에 습관을 들이지 않았다면 복음서에서 시작하기 바랍니다. 매일 한 두 줄을 읽으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 마음에 말씀을 하시고 여러분의 길을 밝혀 주시도록 하십시오(시편 119[118],105 참조).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 형제자매의 얼굴에도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특히 가장 잊힌 이들, 곧 가난한 이들, 굶주린 이들, 목마른 이들, 이방인들, 병든 이들, 감옥에 있는 이들의 얼굴에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마태 25,31-46 참조). 이러한 체험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하느님 나라의 논리에 따르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가난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깨끗한 마음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마음으로 자신을 굽히고 자신의 삶을 가장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과 나눌 줄 압니다.
기도 안에서, 성경을 읽는 가운데, 그리고 형제자매로 사랑하는 삶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면 여러분은 주님과 여러분 자신을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주님의 목소리가 여러분 마음을 불타오르게 할 것입니다(루카 24,14-35 참조).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눈을 열어 여러분이 당신의 현존을 인식하고 여러분 삶을 위하여 마련하신 사랑의 계획을 깨닫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7.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평화는 하느님 사랑과 정의의 결실로 전쟁의 시련과 유배의 고통을 겪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최고의 축복이요 은총이었다. 오죽하면 그들은 ‘샬롬shalom’이라 인사하며 서로 평화를 빌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느 곳에 가든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5)라고 말하도록 했고, 당신도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던진 첫 말씀이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요한 20,19)였다. 예수님의 평화의 인사를 받은 제자들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어야 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화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의 삶과 역사 안에서 오늘도 끊임없이 지속하는 반목과 질시, 그리고 폭력과 전쟁 상황 속에서 평화는 참으로 소중한 가치임은 틀림없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반복되는 수많은 전쟁을 보면서 참 행복의 내용으로서 평화를 묵상한다(GE 87항). 예수님 시대, 당대를 호령하던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였다. 참된 의미의 평화가 아니었다. 언제든 해체될 수 있는 평화의 은폐, 거짓 평화였다.
성경의 평화관은 관계의 개념과 연결된다. 하느님과의 관계,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평화이다. 이러한 평화는 하느님께 뿌리를 두고, 사람들 전체의 안녕과 구원을 지향하며, 정의에 기초한 참된 친교의 평화이다. 게다가 이 평화는 인간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에 기초하기 때문에 초월적이고 내세적인 평화 개념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라는 찬미가 울려 퍼졌다. 이는 지상의 평화가 하느님과 맺는 관계와 결코 떨어져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께서 지상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 인간으로 오셨다는 말이다.
하느님과 평화로운 관계 속에 있으려는 노력은 지상의 평화를 위한 본질적인 노력이다. 하느님과 맺는 관계로부터 땅 위에 평화를 건설하기 위한 용기와 힘이 생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선포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지상의 평화란 이 땅 위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는 것이다. 지상의 평화는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모든 인종, 계급, 성의 차별과 배제가 없고, 서로 화해를 이룬 지상의 공동체가 하느님의 평화를 실현한다. 또 예수님의 평화는 단지 폭력의 부재와 같은 피상적이고 현상적인 평화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평화와는 ‘다른 평화’를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예수님이 주시는 ‘다른 평화’는 구원과 연결된 평화이다. 평화의 사람은 구원된 사람이다. 사실 “악인들에게는 평화가 없다”(이사 57,21). 세상이 주는 평화는 여러 조건이 붙는다. 하지만 불의와 폭력에 바탕을 둔 거짓 평화를 대신해, 예수님의 평화는 정의에 기초한 무조건적이고, 하느님 구원의 선물이자 성령의 특별한 은총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참 평화는 복음적 평화로, 이러한 평화를 위하여 일하기는 결코 쉽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복된 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구체적 현실 참여로서의 이 ‘복음적 평화’를 잘 풀어준다.
복음적 평화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활짝 열린 정신과 마음을 요구합니다. “배부른 소수를 위한 잠시뿐인 평화나 허울뿐인 서면 합의”(「복음의 기쁨」, 218항)를 이루는 것, 또는 “일부를 위한 일부의 계획”(「복음의 기쁨」, 239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적 평화는 갈등을 무시하거나 숨기려는 시도가 아니라, 반대로 “갈등을 기꺼이 받아들여 해결하고, 이를 새로운 전진의 연결 고리로 만드는 것”(「복음의 기쁨」, 227항)이어야 합니다(GE 89항).
이렇게 이 땅 위에서 우리가 세울 평화는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상태이다. 여기서는 공정과 정의, 평등이 제대로 서 있어, 빈부격차와 남녀차별, 인종과 계급을 넘어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친교를 이룬 공동체의 평화가 있다. 이것은 하느님 백성으로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는 것이고, 그 상태를 가리켜 우리는 평화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평화로운 삶은 하느님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표지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하느님의 이름은 평화”(2016.9.20. 아시시, 평화기원을 위한 세계기도의 날 연설)라고 한 것은, 특히나 인종, 종교, 문화, 계급의 차별을 통한 폭력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너무도 적절한 말이다. 평화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 살아가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