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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4강

참된 행복 : 하느님 나라를 사는 생활 규범, 하느님 나라에 사는 행복한 사람들

3.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5,5)

 

산상설교의 행복론에 비추어 보았을 때 우리의 일상용어로 온유라는 단어는 그 의미를 다 품어내지 못하는 듯하다. 일단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온유를 “성격, 태도 따위가 온화하고 부드러움”으로 풀고 있다. 일상 생활에서 온유한 사람은 양보를 잘하고, 자기주장이 약하며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받아들이는 우유부단한 인물로 인식하기 쉽다. 이러한 사람은 유약해서 불의에 맞서 달라는 청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예수님은 왜 이런 온유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했을까. 성경에서 ‘온유’는 ‘가난’과 한 짝인 듯 매우 가까운 뜻을 지니고 있다. 온유함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의 ‘아나브anab’는 온유와 가난을 동시에 의미한다. 즉 아나브에는 온유, 겸손, 가난, 순명 그리고 약함 등의 뜻이 들어있다. 모두 하느님을 향하는 인간의 자세와 연결된다. 아나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프라우스praus’는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람됨의 자세를 말한다. 그리스어 관점에서 본다면, 온유한 사람은 조화롭고 이성적으로 화냄을 조정할 줄 아는 내유외강의 사람이라 하겠다.

구약성경은 모세를 두고 ‘땅 위에서 가장 겸손[온유]한 사람’이라 했다(민수 12,3 참조). 하지만 모세는 나이 40세에 자신의 동족을 위해 이집트인을 쳐 죽였던 과격한 인물이었고,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과 해방을 이끈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왜 그를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말할까. 일단 히브리어로 온유함, 즉 아나브는 ‘듣고 응답하다’는 뜻의 ‘아나’에서 왔다는 것에 주목하자.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새겨 들으려 했고, 그 말씀에 응답했다. 곧 모세는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 말씀에 철저히 순명한 사람이다. 이렇게 온유함은 자신을 비우는 겸허, 그리고 타인의 말, 특히 하느님 말씀에로의 경청, 순명과 연결된다.

온유한 사람은 항상 하느님 말씀들 듣고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온유의 영성은 바로 순명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이 온유를 통해 역사하신다. 탈출기에 나오는 위대한 기적들은 하나같이 ‘모세의 온유’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모세에게 하느님 말씀에 순명하는 온유함이 없었다면, 이집트에서의 탈출도 광야에서의 삶도 모두 불가능했을 것이다. 온유는 부드러움을 통해서 강함을 드러낸다. 가장 온유한 사람은 가장 힘 있는 사람이다. 모세의 위대함은 그의 온유함에서 왔다.

가난한 사람, 온유한 사람, 아나브는 마음이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다. 하느님께서는 “가련한 이와 넋이 꺾인 이, 내[당신] 말을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이”(이사 66,2)를 굽어보시고, 이 가련한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든 곤경에서 구하신다(시편 34,7 참조).

자신의 가진 것을 모두 비우고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이 온유한 사람은 하느님의 뜻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기 때문에, 불의에 물러서지 않는 올곧은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는 ‘야훼의 종’에게서 이 온유한 이의 모습을 본다(이사 42,1-3; 52,13-53,12 참조). 야훼의 종은 가진 것 없고 학대받고 천대받은 자였지만, 겸손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온유한 사람이 가장 위대한 일을 한다. 예수님을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에게서 그 온유함의 실제적인 모범을 본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정녕 마리아께서는 당신의 온유와 겸손으로 하늘과 땅의 잇는 사다리가 되어주시는 위대한 일을 하셨다. 예수님도 ‘아나브’였고, 그 온유함의 절정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온유한 사람이라 소개하시는 데에 한 치의 주저함이 없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는 무엇보다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온유였다.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존중하고 따르는 온유, 자기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먼저 내세우는 온유였다. 이런 온유함의 표징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 잘 드러난다. “보라, 너의 임금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마태 21,5; 즈카 9,9). 또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의 그 고독, 그 고통스런 시간에 당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기는 온유함을 보여주셨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온유한 예수님은 마침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어 자신을 한없이 내려놓으셨다. 결국 예수님은 종의 모습을 취해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다(필리 2,2,1-11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은, 온유한 자가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만과 허영의 세상, 갈등과 투쟁과 증오의 세상에 던지는 강력한 언사로 보았다(GE 71항 참조). 자신만을 생각하면 성을 내다가 심지어는 무자비한 폭력을 사용한다. 개인뿐만 아니라 민족 또는 국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온유는 하느님을 알기 위해 다가섰던 사람들, “하느님께만 신뢰를 두는 사람들의 내적 청빈의 또 다른 표현”(GE 74항)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성경에서 아나윔anawim은 가난한 이들, 온유한 이들에게 붙이는 이름이라 하면서, 너무 유약하다, 바보 같다는 욕을 먹어도 온유하게 살아가기를 권한다(GE 74항 참조). 온유한 사람은 늘 평정심을 유지한다.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며, 나와 생각이 다르거나 대립할지라도 타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온유하기는커녕 화를 잘 내고, 나만 생각하는 자신을 쉽게 발견하기도 한다. 태생적으로 이미 온유하기는 틀렸다며 자기 조절을 포기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바오로 사도의 말을 빌려 말하듯이, 온유는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다(갈라 5,23 참조). 온유는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성품이다. 자신이 온유를 타고나지는 못했어도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온유해질 수 있다. 우리가 온유의 은사를 청한다면 성령의 선물로 받을 수 있다.

하느님 나라는 종교적으로 완고한 이들의 강요와 강제를 통해 오지 않는다. 하느님 나라는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온유한 이들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대로 진정 온유한 이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시편도 온유한 이들, 가난한 이들의 축복을 노래한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땅을 차지하고 큰 평화로 즐거움을 누리리라”(시편 37,11).

“가난한 이들이 이를 보고 즐거워하리라. 하느님을 찾는 이들아, 너희 마음 기운 차려라”(시편 69,33).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으로 꾸미신다”(시편 149,4).

“가련한 이들이 올바른 길을 걷게 하시고 가련한 이들에게 당신 길을 가르치신다”(시편 25,9).

“가난한 이들은 배불리 먹고 그분을 찾는 이들은 주님을 찬양하리라. 너희 마음 길이 살리라!”(시편 22,27).

 

 

4. 정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5,6)

 

정의에로의 갈망이 허기와 갈증으로 나타났다. 무슨 말일까.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처럼 굶주림과 목마름은 인간의 기본 욕구와 생존 본능에 관계한 것이라, 참으로 강렬한 체험이다. 이처럼 정의에 목말라하는 절절한 갈망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교황은 정의를 구하는 이들의 갈망은 이루어질 것이고, 그리스도인은 여기에 협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GE 77항 참조).

정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 이것은 교황의 지적대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에 관련한다. 따라서 사람이 정의로워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회적 정의는 여기서 이차적인 문제다. 정의는 인간 삶의 근원적인 형태이다. 인간을 창조하신 성경의 하느님도 정의의 하느님이시다. 인간의 삶에서 정의가 무너졌으면 다시 세워야 하는 것은 필연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언제나 정의의 부재로 고민스럽다. 누군가에게 지금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에 살고 있는지 물으면, ‘그렇다’라는 답을 얻기가 어렵다. 정의가 절절한 갈망이긴 하나, 현실에서 정의를 실현하기는 쉽지 않다. 정의와 공정보다는 불의와 부정이 더 우세해 보이는 세상이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정의 실현의 역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에게 있어 자유만큼이나 소중한 것이 정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와 정의를 끊임없이 ‘찾아라, 구하라’ 말씀하신다. 정의는 한 번에 실현될 그 어떤 사안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마태 7,7).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실현하는 의인은 누구인가. 의로운 사람이란 앞에서 언급한 온유한 사람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다. 즉 의인이란 악한 것을 피하고 선을 행하여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정의는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 뜻에 충실함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뜻이 의로움에 있기에,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하늘 나라의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주시면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게 선행을 베푼 이들을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하시고 그들에게 하늘 나라를 약속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마태 25,46)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우리가 승자와 가진 자의 편에 줄을 대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편에 서고자 하는 것도 정의를 향한 주림과 목마름에 관련한다.

우리 사회의 커다란 불만이자 불안 요소는, 우리 사회에 불공평, 불공정, 불의가 판을 친다는 데 있다. 오죽하면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던졌던 “기회는 평등할 것이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메시지는 커다란 울림이 되었고, 그 메시지의 주인공은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대통령의 일성으로 정의로워지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가진 사람은 갈수록 더 많이 갖게 되고, 가난한 사람은 갈수록 더 가난해지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이다. 고대 그리스 사회나 토마스 아퀴나스에 있어 정의란 ‘각자의 몫을 각자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명쾌하게 정의하였다. 정의는 서로의 유익과 사회적 질서를 위해 각자에게 배분된 요청이다. 따라서 각자에게 배당된 권리와 책임이 다 성취된 상태가 정의로운 사회라는 것이다.

독일의 저명한 신약성서학자 클라우스 베르거는 세상에는 정의가 반드시 존재한다면서, 정의는 인격적 얼굴을 하고 있는데, 그 얼굴이 바로 하느님 얼굴이라고 말한다. 또 하느님은 당신이 만드신 이 땅 위에 정의가 바로 서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정의를 알려주셨다. 베르거 교수의 말을 우리의 묵상과 연결하면, 결국 의로운 사람들,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얼굴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되겠다.

인간 삶의 목적은 어쩌면 의인이 되는 데 있다고 하겠다. 의로운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고,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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