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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2

12장 사랑의 묘약

 도니제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은 19세기 이탈리아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청춘의 사랑 이야기다. 젊고 순진한 농부 네모리노는 아름다운 지주의 딸 아디나를 짝사랑한다. 하지만 아디나는 그 누구의 사랑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아디나에게 사랑을 얻기 위해 네모리노는 떠돌이 약장수에게 사랑의 묘약을 사들인다. 그런데 그 사랑의 묘약은 싸구려 포도주로 만든 가짜 약이었다. 아무런 효력이 없는 약이지만, 그 약을 마신 네모리노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그저 술에 취해 기분이 좋아져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뿐이다. 한편 아디나는 마을을 찾은 군인 벨코레의 청혼에 응하지만, 막상 결혼계약서를 앞에 두고는 망설인다.

네모리노는 새로운 사랑의 묘약을 얻기 위해 군인이 되기로 한다. 이후 네모리노의 삼촌이 죽으면서 네모리노에게 막대한 유산이 상속되었다는 소문이 퍼지고, 그의 주변에는 많은 여자가 모여든다. 네모리노는 새로 산 약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라 믿었다.

한편 아디나는 네모리노가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군대까지 들어갈 생각까지 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깊이 감동한다. 그래서 아디나는 벨코레에게서 네모리노의 입대계약서를 도로 산 뒤 네모리노에게 그것을 내민다. 마음을 연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의 진정성을 확인하면서, 행복한 결말로 끝난다. 오페라 2막에 나오는 네모리노의 그 유명한 아리아가 아디나의 진심을 깨달으면서 부르는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다.

 사랑의 묘약은 사실 떠돌이 약장수에게서 구입한 약이 아니라, 입대까지 결심한 네모리노의 진심이었다. 나는 이 오페라 ‘사랑의 묘약’의 줄거리를 보면서, 자신을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하는 성체성사야말로 참으로 사랑의 묘약이라 생각하였다. 다시 말해 성체성사는 영원한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는 사랑의 묘약이라 하겠다.

프랑수아 바리용 신부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에서 ‘성체성사의 진정한 의미’(476-507쪽)를 탐구한다. 바리용 신부의 명석한 성체성사 해설을 이 자리를 빌려 정리해본다.

바리용 신부의 지적대로 성체성사의 신비는 너무나 심오하다. 그가 성체성사의 신비를 풀어가는 개념은 ‘결합’, ‘하나 됨’이다. 성체가 모든 것을 수렴하기 때문이다. 즉 성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 인간의 결합이고, 과거·현재·미래의 결합이며, 자연과 역사의 결합, 받아들임과 베풂의 결합, 죽음과 생명의 결합”이다. 성체성사는 사람들을 당신 자신으로 변화시켜 교회라는 신비로운 몸을 만드시려고, 스스로 양식이 되어 오시는 그리스도의 성사이다. 이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근본 계획’을 알아차려야 한다. “하느님의 근본 계획이란, 사랑 안에서 모든 사람과 결합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당신 자신의 사랑을 나누게 하시”려는 것이다(476쪽).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신성(神性)을 지니게 하시기 위해, 우리의 인간성(人間性)을 나누어지셨다. 그래서 “우리의 인간성은 신화(神化)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창조는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계약(곧 결합)을 위한 것”이다(477쪽). 노아의 계약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계약에 이르기까지, 계약은 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용어이다. 이 계약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의 연합”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러한 계약을 표현하기 위해 결혼의 상징을 자주 사용한다. 교회 전통 역시 혼인성사와 성체성사의 신비를 긴밀히 연결해 왔다.

 

하느님은 결혼하시기 위해서 인류를 창조하시며 강생하심으로써 인류와 결혼하신다. 이는 가장 강력한 의미로서의 결혼, 다시 말해 인류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인류 전체와 한 몸이 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핵심이다(477쪽).

 

 강생의 신비는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분명히 드러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기에 당신 자신의 몸을 세상을 위한 양식으로 내어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 거룩한 몸이 되셨고, 그 성체 안에서 하느님은 인간과 진정한 결합을 이루신다. 성체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참된 결혼을 주선한다.

 성체의 신비 근원을 이해하기 위해서 ‘양식’(糧食) 개념이 본질적이다. 양식은 우선 생명을 지탱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 양식으로 함께 나눈 식사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맺어준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내어주신 양식으로 차려진 성찬은 신앙인에게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일치하도록 만든다. 그리스도의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와 결합한 사람들은 서로 하나가 된다.

이렇게 하느님의 강생은 스스로 인간이 되신 것에만 머물지 않고, 인류 전체를 향한 사랑으로 확대된다. 바리용 신부가 강조한 바와 같이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 전체와 결합 또는 결혼하신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결정적 이유는 결국 모든 인간의 신화(神化)에 있다. 그렇게 “성체는 그리스도가 이루신 바를 모두가 이루도록 한다”(480쪽).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과 우리를 보다 완전하게 결합시키기 위해 당신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당신처럼 거룩하게 되길 바라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인간도 그렇게 완전해지길 바라셨다(마태 5,48). 이제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거룩함, 완전함의 길이 열렸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의 몸을 이룰 때에 비로소 완전한 인간으로서 완성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간이시고 동시에 완전한 하느님이시라면, “인간이 완전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가 신화(神化)되었을 때이다.” “인간화되고 동시에 신화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485쪽).

 “성체는 우선 결합이고, 결합이 현존을 끌어들인다”(481쪽). 표징 또는 상징이 실제적으로 현존한다는 것이 성체성사이다. 예수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요한 6,54)라고 하셨다. 이 말씀으로 성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이 우리 인간의 전체 역사로 들어온다. 하나밖에 없는 당신 생명을 내어주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과 한 몸을 이루시고, 하느님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와 만난다.

 성체성사에서 축성된 빵과 포도주는 실제로 그대로 빵이지만, 그 실체는 그 의미와 내용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거룩한 변화를 이루었다. 인간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

 최후만찬 후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고 명령하셨다(요한 13,43). 여기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신 바로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리스도처럼 우리 인간도 하늘에게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심 같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인간이 사랑의 하느님을 위해 사랑으로서 존재할 때만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된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철학자, 또 사회주의자이자 그리스도인이었고, 드레퓌스의 무죄 석방을 위한 싸움에 주저 없이 뛰어들었던 샤를 페기(1873-1914년)는 “삶이란 오직 주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자기희생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준 사랑 자체이다. 성체는 그리스도의 희생이요, 오직 사랑뿐인 사랑, 따라서 죽기까지 가는 사랑이며, 새로운 탄생, 부활이 솟아오르게 하는 사랑이다.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파스카의 신비는 보여준다. 하느님에게 건너가는 통로를 가진 삶, 자기희생의 삶이 아니고서는 진정한 삶을 누릴 수 없다. 성체성사의 표징은 바로 이 희생의 삶으로서 파스카를 보여준다.

성체는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사랑의 표징이며 은총이다. 은총은 진정한 베풂으로 보상을 바라지 않는 무상성이며, 가장 숭고한 베풂은 용서이다. 감사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은총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 모든 것이 은총이라면, 그것은 하느님께 감사로 되돌려져야 한다.

 성체로서 빵은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양식의 형태로 드리는 감사행위다. 사도 바오로는 숨을 쉬듯 늘 감사한다고 했다. 바오로의 호흡은 감사행위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바오로는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바오로 서간문은 감사의 인사로 시작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모두 기억하며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1테살 1,2). “나는 여러분을 기억할 때마다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필리 1,3).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며, 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1코린 1,4).

 사도 바오로에게 있어 하느님 은총의 작용은 언제나 감사와 믿음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감사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한다. 성찬식을 의미하는 ‘에우카리스티아Eucharistia’는 본디 감사의 뜻이 있다. 성체를 통해 하늘과 땅이 결합하고, 사람과 사람이 연대하는 은총에는 무한한 감사만 있을 뿐이다.

 

우리에겐 드릴 것이 없고, 다시 드릴 것, 돌려드릴 것만이 있을 뿐임을 명심하라.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것은 이미 선물로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준다는 것은 소유자의 행위다. 사람은 자기가 소유한 것을 준다. 그래서 “하느님, 당신에게 모든 것을 드립니다”라는 파스칼의 문장은 결코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문장은 성 이냐시오가 <영신수련>의 끝에 쓴 문장이어야 한다. “나의 하느님, 당신에게 모든 것을 돌려드립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소유자가 아니다. 우리는 관리자다. 감사 없는 자비는 진정으로 그리스도교적인 자비일 수 없다. 그것은 가진 자의 선심일 뿐이다(499쪽 이하).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양식으로 나눈 사람들은 참된 삶의 의미를 찾고 그에 걸맞게 살아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로운 계약의 표징인 성체성사적 삶의 형태는 형제애적 결합을 이룬 공동체의 삶이다. 이 책에서 누누이 강조했던 예수님의 말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예수님께서 새로운 계약의 징표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고, 성체성사적 삶의 좌우명이다. “하느님에게 결합하는 조건은 인간들 사이의 형제애적 결합, 즉 인간적인 공동체의 건설이다. 인간들 사이의 연합이 없다면, 하느님과의 연합도 없다”(501쪽). 서로 빵을 나누면서도 서로 헐뜯고 미워하며 도움을 거절하는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죄다. 여기서 바리용 신부는 17세기 설교가인 자크 보쉐의 말을 전한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은 채로 성체를 모시는 사람은 구세주의 몸에 폭력을 가하는 자다”(503쪽).

 사실, 우리가 의지와 행위로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느님도 사랑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은 우리의 형제애인 인간에 대한 사랑, 말뿐이거나 감정적인 것이 아닌 실제적 사랑이다. 우리는 모두 다음 구절을 알고 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이보다 더 진실인 것은 없다.

성체성사는 이제 함께 밥을 나누는 식구(食口), 즉 같은 입으로 밥, 생명을 나누는 가족애, 형제애의 공동체를 넘어 온 인류를 향한 사랑을 지향한다. 이것은 앞서 말한 참된 인간화, 참된 신화의 삶과 맥을 같이한다. 바리용 신부는 “그리스도의 몸을 먹을 때, 우리는 전 인류를 우리 몸에 받아들인다”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받아 모신 “축성된 빵 조각이, 그리스도에 의해 신화(神化)된 전 인류라는 거대한 빵의 일부임을 알고 나면”, 성체성사는 놀라운 사건, 풍요로운 축제가 될 것이라 말한다.

바리용 신부의 말처럼, “축성된 빵조각은 인간이 하느님에게 드리는 선물(즉 봉헌)이며, 동시에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즉 성사)이다.” 그래서 성체성사를 성사 중의 성사라 말할 수 있다.

 바리용 신부가 풀어준 참된 인간화, 참된 신화의 결정체로서 성체 이해를 옮겨본다. “성체는, 인간으로서는 온전히 하느님 쪽으로 당겨지시고, 하느님으로서는 온전히 인간 쪽으로 당겨지신, 희생된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이 두 도약의 압축, 감히 말하자면, 이 두 도약의 결정체이시다”(507쪽).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예수님께서 그토록 타올랐으면 간절히 애타게 원하셨던 그 불은 예수 성심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씨로 남겨두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주신 성체성사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이 성체야말로 영원한 사랑의 징표인 사랑의 묘약이다.

 어느 목사가 우스갯소리로 불로장생의 묘약으로 ‘신약과 구약’이 있다며 설교를 했다고 한다. 약을 판 셈이다. 비록 우스갯소리지만 의미는 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과 신약의 역사를 관통하는 하느님 사랑의 계약을 완성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자신을 영원한 사랑, 영원한 생명의 표징으로 성체성사를 세우셨다. 성체성사는 그야말로 구약과 신약을 아우르는 사랑의 묘약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기란, 이렇게 성체성사적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이 구약과 신약을 포함한 하느님 구세사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길이고,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실현하는 길이다. 우리 교우들이 성체 중심의 신심 생활에서 깊이 유념해야 할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즉 성체 신심의 방향이 감실 안에 성체로서 계신 주님을 흠숭하고 조배하여 주님과 일치하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주님이 주신 사랑의 묘약은 나만을 위한 마취약일 뿐이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님의 몸으로 내어주신 위대한 사랑의 묘약은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살과 피의 성체성사, 거룩한 사랑의 성사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서로 사랑해야 한다. 성체성사적 삶은 자기희생, 봉헌의 삶 그리고 연대와 환대의 삶이다. 그것은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셨던 그리스도의 삶이다. 성체성사의 신심은 바로 그러한 사랑의 실천에 기초한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빌려 말하면 이렇다. “성체성사의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성체성사의 사랑으로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울리는 징과 같은 소리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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