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강
아래로부터의 영성생활의 전개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우리가 하느님을 바로 우리의 고통, 각종 질병, 상처, 에움길, 무능력들 속에서 찾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세 가지 언어에 관한 이야기를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위한 표상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자신의 고통, 질병, 상처들에서도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대화를 나눌 때, 우리는 이들에 맞추어가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것들 안에서 우리에게 말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며, 하느님께서 이것들을 통해 우리 삶의 성탑 안에 들어 있는 보물들을 어떻게 찾게 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안의 성탑 아래로 내려갈 때 우리 안에 들어 있는 보물을 찾을 수 있다.
보물을 위에서 찾으면서 자신을 높은 곳에 올려놓은 사람들은 급격히 아래로 추락할 것이며 보물을 결코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외적으로 이상적인 요소들만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 자신의 참된 모습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그 이상적인 요소들을 그들의 명예를 얻기 위해 사용할 뿐이다. 그들은 종종 엄청나게 큰일들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준 참된 자아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하고 건성으로 자기방식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짖어대는 개들이 우리를 가장 밑바닥까지 끌고 내려가도록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우리에게 주도록 두어야한다. […]
칼 라너는 자신의 한계와 무능의 체험 속에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라너는 한계상황들에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할 때 성령을 체험하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우리가 세상 삶에서 아무 감동도 느끼지 못하거나 삶의 고통을 많이 느낄 때에 하느님을 사랑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는가? 그리고 죽음과 절대적인 허무에 사로잡혔을 때, 아무 응답도 없고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느끼거나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 같고 모든 것이 파악 불가능하고 의미 없어질 때 하느님을 사랑하려고 한 적이 있는가?(Rahner III, 106).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강한 어조로 주장하고 있다:
손으로 잡을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사용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가라앉거나 모든 것이 몰락과 죽음의 세계로 빠져든 것처럼 여겨질 때 그리고 모든 것이 특별한 색깔이나 특징도 의미도 없는 세계로 접어드는, 바로 그러한 때에 성령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때가 성령의 은총의 시간이다. 밑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심연을 가진 존재로 경험하는 우리의 실존은 바로 그러한 때에 하느님의 무한성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하느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 깊이를 다 알 수 없는 무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체험되는 것이다(Rahner III, 108).
[…]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해 나가는 일에 있어서 우리의 힘만으로는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게 된다. 믿음은 우리를 하느님의 팔에 완전히 내맡겨드리는 것이며, 하느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래로부터의 영성에서는 단순히 나 자신이 나의 생각과 느낌들을 통하여, 삶에서 가지게 되는 나의 상처들과 질병들을 통하여 인간적으로 성숙해 나가고 나의 보물을 찾아내는 것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가능성의 한계에 이르렀을 때 믿음에 대한 체험을 가지게 되는 것과 내가 완전히 혼자인 것과 같은 외로움을 느낄 때 하느님과의 관계가 성장해 나감을 체험하는 것에 대하여 다룬다.
가. 생각들, 느낌과 대화
- 생각과 느낌으로 신앙생활하기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우리의 생각과 느낌들, 욕구와 고통들 속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우리의 느낌과 고통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주의 깊게 듣는다면, 우리는 그 음성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본래 계획하셨던 우리의 정 체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정서와 고통들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고유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것들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고 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화, 짜증, 시기심 그리고 의욕 상실 등과 같은 자신 안에 일어나는 부정적인 느낌들에 대하여 당황하고 자신을 부정적으로 판단한다. 이들은 이러한 부정적인 느낌들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직접적으로 대항해 나간다. 이들은 그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자주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지하곤 한다.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나에게 다가오거나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들과 정서들과 화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이 나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나는 스스로 그러한 요소들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들이 나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봐야 한다. 이러한 고통들은 위로부터의 영성에게 있어서는 제압되고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평정, 이웃 사랑, 친절 등에 대한 이상적인 생각은 내가 나의 격정과 분노를 제압해 나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자주 하느님께서는 나의 격정과 분노 속에서 나의 말씀을 건네시고, 내 안에 묻혀 있는 보물로 나를 인도해 가신다. 만약 내가 나의 격정과 분노 안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면, 내가 지금까지 참된 정체를 거슬러 살아왔고 하느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방식대로 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걱정과 분노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의 영역을 많이 양보하여 그가 나에게 너무 많은 영향력을 지니도록 했다는 사실을 종종 알려주기도 한다. 나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기대를 채우는 일에 급급했고, 나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며, 나 자신이 참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소홀히 해온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삶을 나 스스로 살아오지 않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너무 지나치게 가까이 와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나의 경계선을 넘어왔으며 나를 다치게 한 것이다.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그 격정과 분노를 억압하기보다는 대화를 나누어서 내 안에 있는 보물을 찾아내며, 하느님께서 만드신 나의 참모습을 내 안에서 찾는 것이다. 격정과 분노는 나를 다치게 한 그 다른 사람을 나에게서 떼어내는 힘이며, 그래서 그와 적당하고 건전한 거리를 유지하도록 하는 힘이다. 나에게 상처를 줄 정도로 지나치게 가까이 있는 그를 떼어놓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나는 그와 화해할 수 있으며, 그에게서 참으로 자유로워지게 된다. 특히 어린아이였을 때 성적 상처를 입은 여인들은 그들에게 상처 을 준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그들을 자신들로부터 몰아내야 한다. 이것이 그 여인들이 그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기본 전제 요소이다.
[…]
아래로부터의 영성에는 언제나 세 종류의 길이 있다. 첫째 길은 생각과 느낌들과의 대화이다. 둘째 길은 밑바닥까지 아래로 내려가 더 이상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고통스러운 최종점에서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가지는 것 그리고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셋째 길은 하느님께 완전히 항복하는 것, 나의 힘으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하느님의 좋으신 섭리와 품에 나를 완전히 내맡기는 것, 홀레 부인 이야기에서 서술하는 것같이 우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다.
[…]
의식 세계의 행위를 분석하여 치료하는 치료법(Die kognitive Verhaltenstherapie)은 불안과 걱정은 우리가 잘못 설정한 삶의 방향을 드러내면서 그것이 잘못 설정된 것이란 사실을 알려준다. 삶의 방향을 잘못 설정한 예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나는 단 하나의 잘못이라도 해서는 안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무가치한 존재야. 나는 나의 부족한 면과 허물을 드러내서는 안돼.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모두가 나를 거부하여 외토리가 되고 말 거야.
우리가 가진 걱정이나 불안과 대화해 나갈 때 인간이 살아가는 데 기초가 되는 요소들을 받아들여 좀 더 인간적인 삶을 전개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나는 본래 주어진 나의 모습대로 살아가도 돼. 나는 실수 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실수할 수 있어. 나의 부족함과 허물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 없어. 나의 가치는 내 안에 들어 있는 거야. 그 가치는 허물 하나 때문에 나에게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야.
걱정과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이러한 나의 노력이 하나의 속임수인 것은 결코 아니다. 걱정과 불안은 나 자신을 좀 더 잘 다루어 나가게 하고, 내가 실재의 나에게 적합한 표상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의 걱정과 불안과 아무리 대화를 많이 시도해 보아도 결코 없어지지 않고 내 안에 항상 머물러 나에게 고통과 어려움을 줄 때도 있다. 그럴 때 그 걱정과 불안이 나로 하여금 하느님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때 내가 나 혼자 힘만으로 는 걱정과 불안을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무능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 외에 다른 것은 없다. 그렇다면 그 걱정과 불안은 내가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 용기를 내어 뛰어들어가야 하는 깊은 심연이다. 그렇다면 걱정과 불안은 나로 하여금 그 걱정과 불안을 영성적으로 다루도록 하고, 내가 그 걱정과 불안 속에서 하느님을 굳게 붙들고 있게 하며, 다음과 같은 성서의 구절을 말하게 한다: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시편 22,4). 주 함께 계시거늘 무서울 것 있을쏘냐, 인간이 나에게 무엇을 할까보냐(시편 117,6).
그렇다면 걱정과 불안은 하나의 영성적 도전일 수 있으며, 내가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하나의 시험이 될 수 있다. 하느님께서 내 곁 에 계시다는 것을 내가 참으로 믿을지라도 걱정과 불안이 사라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도 그것이 나에게 최소한 나의 걱정과 불안 속에서 내가 굳건히 붙잡고 의지할 수 있는 하나의 기둥을 가지는 셈이 될 수 있다. 나는 나의 걱정과 불안을 좀 더 손쉽게 해소해 나갈 수 있으며, 걱정과 불안에 의해 쉽게 어려움 속으로 휘말리지 않게 될 것이다. 또 하나 도움이 될 수 있는 생각은 걱정과 불안이 존재하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내 안에 걱정과 불안이 결코 침입할 수 없는 영역도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나의 감성들은 걱정과 불안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까지 걱정과 불안이 침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끔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폭력적인 본능을 억압해 왔기 때문에 그것이 언제 폭발할지 몰라서 두려워하고 있다. 한 부인은 자신이 그렇게도 사랑하는 자기 아이를 혹시 자기가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는 논리에 맞지 않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두려움을 고찰해 보면, 그 부인은 아이에 대한 사랑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폭력성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그 두려움이 보여주고 있다. 하루 24시간 아이를 돌보고 있는 어머니가 그 아이에 대한 폭력성을 느끼는 경우도 있는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다. 폭력성은 그 어 머니가 아이와 조금 거리를 둘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위로부터의 영성은 그 어머니가 아이에게 폭력성을 느끼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위로부터의 영성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어머니는 높은 이상적인 모성애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어머니로서 그녀는 언제나 자기 아이에게 사랑에 가득 찬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을 높이 가질수록 그것과 완전히 상반되는 요소인 폭력성도 더 강하게 생겨난다. 그러므로 자신이 가진 걱정과 불안 그리고 두려움과 대화해나가는 것은 자기 아이를 잘 보호하려는 그 어머니가 자신을 잘 다스려 나가도록 하는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다. […] 우리는 그 걱정과 불인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
걱정과 불안 그리고 두려움 중에는 인간의 존재 자체에 필연적으로 주어진 것도 있는데, 외로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불안이나 두려움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그 근원을 살펴보아야 한다. 나는 난의 깊은 내면에서는 고독한 존재이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나의 고유한 영역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영역들에서 나는 철저히 혼자인 것을 느낀다. 헤르만 헤세는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고독하게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삶은 고독한 것이다. 고독하지 않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각자는 모두 외로운 것이다.
틸리히는 사람이 고독함으로써 종교인이 된다고 보고 있다. 내가 만약 나의 고독과 두려움을 받아들여 잘 소화해 나간다면 나는 나의 존재의 비밀을 밝혀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종적인 고독을 아는 사람은 최종적인 사물들을 알게 된다(F. Nietzsche).
고독, 혼자 있는 것은 나로 하여금 내가 존재하는 모든 것과 하나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할 수 있다. 나의 고독은 최종적으로는 나를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한다. 가톨릭 철학자인 페터 부스트는 죽음 앞의 철저한 고독 속에서 그러한 것을 체험했다:
사람들이 느끼는 모든 종류의 고독의 저 깊은 근본 바탕에는 하느님을 향한 향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Ges. Werke IX, 155).
죽어가는 순간에는 누구나 다 고독하다:
죽는다는 사실은 최종적이고도 완전한 고독을 의미한다. 죽음은 죽어가는 사람을 고독하게 만들고 그 사람을 완전한 고독안으로 들어가게 한다(Shütz 277).
그러므로 고독은 내가 나 자신을 완전하고도 전적으로 하느님께 내맡기도록 하는 하나의 도전이 될 수 있다. 이러할 때 고독은 내 영성의 원천을 만나게 하는 좋은 열매를 맺게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부활에 대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항상 남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두려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그래. 나는 죽을 것이다. 나는 돌발적인 사고나 암 또는 심장마비로 죽을 것이다. 나는 결국 이러한 식의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