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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0

9장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역사적 인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밝히신 바와 같이, 즉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청원을 이루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참 인간이요, 참 하느님’이시다.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이 청원 기도의 내용을 헤아리는 것이 강생, 곧 육화 영성 이해의 바탕이 된다고 하겠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도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예수 그리스도 같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도록 청한다.

다시 말해 주님의 기도의 두 번째 청원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도록 청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려는 간절한 기도이다. 하느님의 강생, 하느님 육화의 의미는 하늘과 땅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청원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에 온 하느님의 나라처럼, 우리 신앙인도 하늘의 뜻과 다르지 않게 이 땅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다짐과도 같다. 다시 말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기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도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청원이다.

바리사이이자 유다 최고 의회 의원이었던 니고데모가 어느 날 한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임을 고백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새로운 태어남과 같다고 말씀하셨다(요한 3,1-21 참조). 하느님 나라는 새롭고 예기치 못했던, 그러나 새로운 탄생이며,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하느님 나라는 고정불변이 아니라 언제나 살아 있고 움직이고 변화한다. 하느님 나라는 기본적으로 똑같은 삶이 영위되는 것이겠지만, 그 나라는 언제나 새롭게 찾아지고 성장한다. 하느님 나라는 언제나 하나의 발견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음의 발견으로, 어떤 빛으로부터 새로운 빛으로 계속되고, 언제나 그 자체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새로운 체험을 맛보게 한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교육되고 그런 연후 옹호되는 경배나 도덕성의 형태가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살아지는 삶이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우리는 삶의 계속적인 새로움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찾고 구하게 되는 새로움이다. 하느님 나라에의 초대는 어떤 조직이나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끊임없이 찾고 구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서 성장하며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은 참된 하느님 자녀의 길이며, 그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 바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다. 성령은 그렇게 하느님의 자녀로 하느님 나라 살기를 이끄신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삶 속에서 성령으로 살아계시며, 숨 쉬고 계시는 하느님 사랑의 메시지이다. 사도 바오로가 지적한 것처럼, 성령의 위로와 격려를 받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다

마태오가 전하는 최후 심판의 말씀은 우리가 살아야 할 하느님 나라의 본질을 잘 전해준다(마태 25,1-46 참조). 하느님 나라의 본질에 관한 예수님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의 수용 여부를 준엄하게 묻는다.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된 그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의로운 삶을 살아온 이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의인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5 이하).

 

의인들은 세상에서 버림받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이들, “가장 작은 이들”과 함께 했다. 그들과 함께 한 의인들의 삶이 하느님 나라의 삶이었다고 예수님께서 선언하신다(마태 25,40).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의인들의 삶은 그리스도인 삶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하느님 나라의 시민은 가장 힘없고 약한 이들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그것이 예수님, 하느님의 선택 기준이다.

하느님 나라 시민의 기준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어떤 정교한 이론을 요구하거나, 심지어 심오한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하느님 나라는 단지 이 세상에서의 애덕 실천을 요구한다. 이러한 실천 요구는 무신론자이든 신앙인이든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요구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자신의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법이 새겨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이 사랑의 법을 비추고 일깨워 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이 세상의 삶 안에서 당연히 드러나야 할 이 사랑의 법을 잊고, 감추려는 인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온전히 내어 바치는 희생과 헌신을 통해 사람의 길을 알려주셨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를 실제로 하느님 나라에 속하게 만드는 것은, 가장 가난하고 약한 우리 형제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상의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요구하셨던 것은, 바로 우리의 형제를 나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바와 같이, 참된 사랑의 끝은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과 헌신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성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주심으로써, 헌신의 의미를 일러주셨다. 이러한 헌신과 희생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가능하다. 이 사랑은 하느님 사랑 안에 이루어지는 참여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1요한 4,7).

 

가장 약한 이웃을 향하는 사랑은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 사랑은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가치이자,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절대적 가치이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는 청원의 기도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결단을 요구하는 다짐이라 할 수 있다.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는 하느님 나라의 오심을 청원하고, 바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달라는 청원으로 이어진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하늘에서든 땅에서든 ‘아버지의 뜻’이 결정적이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그 뜻에 헌신하라는 철저한 결단을 요청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마르 3,34)라고 했다. 하느님의 뜻 아래 모인 새로운 가정공동체, 곧 그리스도교 공동체이다. 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 새로운 공동체에 하느님 나라가 마련되어 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회피하지 않았다.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 26,42: 루카 22,42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따르고 실현하는가에 달려 있는지 보여주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인간 행동의 최종 규범’을 설정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가파르나움 근처의 언덕에 올라 ‘참 행복’(진복팔단)을 선포하신 뒤, 이어서 계속 하느님의 뜻을 철저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자는 목표를 두고 산상설교를 하셨다(마태 5-7장, 루카 6장 참조). 이 설교는 하느님 나라의 윤리적 요청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요청은 이전의 그 어떤 것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결코 결의론적 요청이나 율법주의적 강제로 고정할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법의 울타리에 갇히는 것이 아닌, 인간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총체적 변화, 쇄신을 포함한다.

예수님의 요구는 어찌 보면 무리한 가르침처럼 들린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대어주고, 속옷을 달라면 겉옷마저 내어주고, 천 걸음을 가자면 이천 걸음이라도 가주라 하신다(마태 5,39-41 참조). 게다가 예수님은 십계명 이상의 것을 요구하신다. 이를테면 마음에 품은 음란한 생각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고 하신다(마태 5,21-37 참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길은 외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내면 곧 마음도 중요하다는 말이다. 즉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라는 예수님의 산상 가르침은 마음과 행동이 일치된 철저한 순종을 요구한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행복!

 

그렇다면 진정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 또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세상 안에서의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던 신학자 한스 큉 신부는 하느님의 뜻을 예수님의 행복선언과 특히 병자와 마귀 들린 이들의 치유에서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고 보았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를 포함한 인간 실존의 모든 차원을 포함한다. 특히 사회에서 힘없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은 더욱 각별하다. 하느님 나라를 향하는 하느님의 뜻은 ‘모든 인간의 행복’이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하느님의 뜻은 ‘돕고 치유하고 해방시키는 하느님의 구원의지’이다. “하느님은 사람의 생명, 기쁨, 자유, 평화, 구원, 인간 각자와 인류 전체의 궁극적인 행복을 원하신다”(한스 큉). 하느님의 뜻은 모든 차원에서 발생하는 모든 인간의 구원을 겨냥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겠다는 의지는 인간을 창조하신 그 의지와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창조 때부터 마련된 하느님 나라에 인간을 초대하신다.

지상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와 행복선언, 그리고 예수님의 행위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다. 예수님의 선포와 행위로 인해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행복 그리고 구원과 연결되면서, 하느님의 일은 인간의 일과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하느님의 일과 인간의 일이 동일시 되면서 예수님은 기존의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시키셨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와 하느님의 뜻을 인간의 궁극적 행복에 둔 철저한 투신은 당대 유다교 주류 세력들에게는 불온하고 위험스러워 보였다. 예수님은 수구적 체제와 질서에 갇힌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과는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 연대와 형제애로의 부르심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율법의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연결되어 있다. 하느님 나라는 사랑의 연대에로의 부르심이다. 하느님 나라에로의 초대는 연대에로의 초대이다. 이 초대와 부르심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잘 드러난다(루카 10,25-37 참조). 이 비유는 예수님을 시험하려든 율법 교사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율법 교사는 이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큰 계명에 동의했다. 그는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이냐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또는 더 강조하여 ‘필요를 느끼는 누구나’라고 대답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예화를 들려주셨다. 예화의 핵심은 자신의 불찰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초주검이 될 정도로 고통에 처한 사람마저도 ‘나의 이웃’이지만, 내가 그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한 나는 그의 이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곤경에 처한 이의 문제에 연루되지 않는 한 나는 그의 이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제와 레위인, 즉 제관과 성직자는 민족적 동질감이 짙은 같은 유다인이지만, 자신의 안위와 입장을 더 중시하여 고난에 처한 사람에게 연루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다인과는 적대적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은 그 곤경에 연루되었다. 고통을 당한 이를 돕는 위험을 택했다. 동정compassion, 연민, 측은지심이 발동하였다. 타인의 ‘고통passion’을 나의 것으로 ‘함께com’느꼈다. 사마리아인은 상처를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었다. 고통 받는 이를 위해 마음뿐만 아니라, 시간과 돈도 내어주었다. 그는 여행 중이었지만 철저히 그 상황에 연루되었다.

이 세상을 여행하면서 받게 되는 하느님 나라의 초대장은 사랑의 연대이지만, 위험까지도 감수해야만 하는 사랑의 연루이기도 하다. 하느님 나라를 향하는 여행은 이 세상을 거쳐 가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세상은 여전히 고통과 슬픔, 탐욕과 불의, 죄와 악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통 받고 슬퍼하며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봉사하기를, 연루되기를 요청받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은 철저히 하느님의 일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 5,19).

 

이 말씀은 예수님의 연대성에 관한 놀라운 통찰을 안겨준다. 이 세상은 아버지 하느님이 끊임없이 일하시는 공간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언제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주의 깊게 관찰하셨다.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정확히 파악한 다음 그 일에 동참하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대한다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하느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아버지 하느님과 연대성일 것이다. 하느님의 일에 예수님과 함께 사랑으로 연루되는 것은 때론 위험한 일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연대성, 하느님과 온전한 연대성에로 인도한다. 우리가 사랑으로 그렇게 연루될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시민에 속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하느님 나라는 본질적으로, 사람 가운데 활동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께서, 사람들을 사랑의 새로운 일치로 이끄는 데에 있다. 그 하느님 나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은 사람의 마음을 깊게 어루만지고 변형시킨다. 하느님 나라는 개인의 성화와 복락을 위한 개별적인 터전을 마련하지 않는다. 하느님 나라는 사랑 안에서 일치된 백성들의 모임이다. 우리는 이를 두고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로서 ‘교회’라 부른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 그 하느님 나라는 부활하신 후 제자공동체에 의해 성도들의 모임, 곧 교회의 모습으로 지속되고 꼴을 갖추어 갔다.

하지만 교회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제도를 갖게 되었다. 하느님의 나라가 교회의 모습으로 꼴을 갖추면서 세상에 뿌리내렸다. 언제나 명심해야 할 것은, 교회가 비록 세상에 뿌리 내렸지만, 하느님께 속해 있다는 것이다. 또 하느님은 교회에 속해 있지 않은 곳에도 당신의 씨를 뿌리신다. 교회는 이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교회뿐만 아니라, 이 세상도 하느님께 속해 있는 역동적인 존재이다. 교회는 사람과 세상,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열려 있고 생명력이 있는 존재이다.

<내가 믿지 못하는 하느님The God I don’t believe in>이라는 책을 쓴 후안 아리아스Juan Arias가 서술했던 것처럼, “교회는 다름과 같은 표현들 안에 그것의 메시지, 말고 생명이 있는 존재이다. 즉 ‘아니오, 기다리다, 정체하다, 조심하라, 돌아가라, 배격하라, 충분하다’라는 표현보다 오리려 ‘예, 뜻대로 하소서, 계속하라, 일어나 걸어라, 찾아라, 한 번 더 그물을 던져라’는 표현 안에서의 존재이다. 교회는 주님 말씀대로 세상 어디에서든지 그물을 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인간의 진정한 삶과 희망의 구체화이다. 하느님의 세상에서 삶은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희망은 결코 퇴색되지 않는다. 이것이 주의 기도에서 아버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희망하고 청원하는 이유이다.

 

주님의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암송하는 ‘주님의 기도’는 복음 전체의 요약이라 할 수 있다. 마태오는 산상수훈의 윤리적 요청 가운데에 주님의 기도를 배치한다(마태 6,9-13; 루카 11,2-4 참조).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이 기도문을 요약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실현되어가는 종말론을 지시한다. 주님의 기도는 구원의 시간을 앞당겨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낸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당신의 아드님을 생명의 빵으로 주셨다. 놀라운 선물이고 은총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마르 14,36)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호칭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독특하고 직접적인 관계 체험에 근거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도 이러한 호칭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은, 실존적 차원에서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당겨 선물로 다가온 행복의 완성, 그리고 구원의 현실이 나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복된 은총의 결과이다. 앞당겨진 종말론적 현실 속에서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 세상에서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아버지께 청하는 자녀들의 모습을 상상하면 좋을 것이다.

주님의 기도를 우리가 깊이 묵상하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 살기와 연결해 본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살아갈 의지를 다지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간절히 바라는 청원의 기도이다. 즉 이 땅과 하느님 나라를 연결하려는 간절한 의지의 표현이라 하겠다.

하늘과 땅, 다시 말한다면 초월과 내재, 무한과 유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벽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 벽은 단절의 벽이 아니다. 공장의 노동자로 살며 ‘불꽃의 여인’이라 불렸던 철학자이자 명상가였던 시몬느 베이유는 통방(通房)하는 죄수의 모습에서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를 읽는다. “감방 벽을 사이에 두고 노크 소리로 서로 소통하는 두 죄수가 있다. 벽은 그 둘을 갈라놓지만 서로 소통하는 걸 허락한다. 우리와 하느님도 마찬가지다. 모든 분리는 연결이다.” 그렇다. 지상의 삶은 천상의 그것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지 못한다면, 하느님과의 소통은 요원하다.

 

 

그리스도인 희망의 본보기, 성모 마리아

 

우리 그리스도인은 실제로 육체를 지니신 그리스도를 더 이상 만날 수 없이 살아 나가야만 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란 일종에 기다림의 생활(대림절)을 하는 그리스도교는 마라나타Maranatha! 주 예수여! 오소서! 하느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라고 말하며 기다리는 기다림을 신앙의 바탕에 깔고 있는 희망의 종교이다.

인간의 삶은 희망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삶도 희망 없이는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갈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보다 분명한 희망의 징표가 필요하다.

희망은 성령의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요, 성부 하느님의 ‘참’ 자녀라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지를 분명히 확인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희망은 보다 확고해 질 수 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희망의 표지가 될 인물을 발견한다.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교의 현저한 희망의 표지를 본다.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의 활동은 우리 희망의 흔들릴 수 없는 기초이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의 기초가 종종 흔들린다. 나를 둘러싼 주변의 유혹 앞에서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희망을 놓쳐버린다. 의심과 불안이 만든 희망의 상실, 절망의 시절에 팔레스티나 작은 마을에 살던 한 여인의 믿음은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본보기가 된다. 주변의 모든 의혹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뜻을 믿고 따랐던 그 단순하지만 위대한 신앙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 희망의 표지가 된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그의 사촌 엘리사벳의 찬사대로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이시다. 우리 교회가 성모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바탕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길 바랐던 사도 바오로의 권고(필리 2,1-5 참조)를 통해 성모 마리아를 추억한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고 따르기를 바라면서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남겨주었던 ‘그리스도 찬가’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필리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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