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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9

7장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지 않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내놓으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9-14).

 

바리사이와 같은 사람들의 비극은 역설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려는 데에서 시작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에게 의존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열심히’가 아니라, 어떤 부담을 갖고 억지고생을 하면서 공을 쌓으려는 방식으로 하느님 뜻을 이행하려 했다.

인간은 도저히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만들 수 없다. 그러니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인생길을 끌고 가면 끝이 막혀 버리고 도저히 출구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 막다른 길에 달해서 발견한 탈출구는 두 개밖에 없다. 첫 번째는 그 많은 율법 전체를 지키지도 않으면서 마치 다 지키는 것 같은 위선적인 신앙생활에 빠지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 많은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으니 몇몇 율법으로 축소해서 극히 적은 부분만 지키고 마치 전체를 다 지킨 것 같은 자족적인 신앙생활에 빠지는 것인데, 이 역시도 위선적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강한 힘과 의지를 가진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아주 소심한 종교관에 빠져 버리고 만다. 모든 규칙을 철저히 다 지켜 나가려고 하다 보니 항상 근심과 걱정을 하게 됨으로써, 매사에 소극적이고 보수적인 종교관을 지니게 된다. 또 다른 경우에는 완전히 위선자의 탈을 쓰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에 외면적인 여러 의례 행위로 자기방어막을 치면서 위선적인 삶을 살아간다.

자신의 노력으로만 인간 구원의 기초를 세우면, 이러한 식으로밖에 되지 않는다. 그 어느 쪽에도 구원은 없다. 그러한 종교에는 장래를 향한 어떤 희망도 없고, 기쁨도 없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남는다.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결국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이웃도 잃어버린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행동은 자신을 위한 행동이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를 위한, 하느님 나라로 가는 사람들의 행동은 남을, 즉 이웃을 위한 행동이다. 여기에 큰 차이가 있다.

예수님께서 특히 책망하는 것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로 인해서 가장 작은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마저도 하늘나라의 문 앞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이고, 그것이 바로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바리사이파 같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소위 엘리트 신앙의식으로 무장한 그들은 신앙의 경건함이나 우월함을 뽐내며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는 작은 사람들을 질타한다. 그들의 위선 또는 강력한 신앙에 지레 겁을 먹은 작은 신앙인들은 결국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접고 마음의 문을 닫아걸며, 점점 현 시대에 집착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마태 23,1-5).

 

예수님의 첫째가는 원수, 즉 적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라는 것이 마태오 복음 전체의 흐름이다. 어느 신학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 교회의 가장 큰 위험 역시 이러한 바리사이즘에 빠지는 것이다. 바리사이즘이란 우리 각자 또는 우리 공동체, 우리 교회에 아직도 뿌리깊이 남아 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자신에게 돌아올 대한 비판이나 판단을 남들에게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가 더 율법을 잘 지키고 옳다는 우월의식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남들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바리사이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이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 재산을 방종한 생활로 탕진하여 버렸다. 자기 생활에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그제야 제 정신이든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아버지가 돌아온 작은 아들을 환대하고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큰아들이 이를 보고 화가 나서 아버지께 따졌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은 저에게 해 준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아버지는 그에게 일렀다. “얘야, 저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좋은 것을 좋고 보고 받아들여라”(루카 15,11-32).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내 삶에 휴식이 되는 이야기’ 중에서 나오는 ‘거울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과도 같다.

 

늘 이웃에게 불만투성이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난 이 마을 사람들처럼 비열하고 치사한 사람들은 본 적이 없어. 그들은 저질이고 자기 욕심만 채우는 이기적인 사람들이지. 모두가 자기가 무얼 잘못하는지 모르거든. 그들은 영원히 다른 사람들의 결점만을 떠들어 대고 있을 거야.” 우연하게 그 곁을 걷던 천사가 물었습니다. “아니, 정말 그렇단 말입니까?” “물론이지요. 우리를 향해 오고 있는 저 사람 좀 보라고요. 비록 그의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난 그의 얼굴을 잘 기억하고 있지요. 저 탐욕스럽고 잔혹한 눈을 보세요. 자신이 무슨 사립 탐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저기 쏘아보고 있잖아요.” 천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너무도 잘 봤군요. 너무도 잘 알고 있고요. 하지만 당신은 아직도 한 가지만은 파악을 못하는군요. 그것은 당신이 지금 거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헐뜯고, 분석하고, 비난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자신을 뒤돌아볼 수 있는 마음은 고장 나 있습니다. 타인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갖다 대고 비난하면서 자신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한 모습.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 살고 있는 당신. 가끔은 고요의 시간으로 돌아와 자신을 거울 앞에 세워 보아야 합니다. 자신은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정말 똑바로 걷고 있는지, 가끔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 일은 당신의 삶을 더욱더 아름다운 풍경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천사의 지적대로 다른 사람을 헐뜯고 분석하고 비난하는 것에는 익숙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의 모습임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던진 비난의 화살은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그들은 자신의 거울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일뿐이다.

어느 분이 일본인이 잘사는 이유를 이렇게 지적했다. 한국인은 자기를 높이고 과시하며 상대방을 깔보려 하는데, 일본인은 자기는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려 한다. 남들이 잘되는 꼴을 못 보며 끌어내려 못되게 하는 것이 자기가 올라서는 줄로 아는 것이 한국인이다. 일본인은 남들이 잘되는 것을 본받아 자기 자신들도 더 잘 되려고 한다. 한국인은 타인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갖다 대고 비난하면서도 자신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하다.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헐뜯고 분석하고 비난한다. 그들은 말만 하고는 그대로 실행하지 않는 이중인격자들이며 위선자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야고보 서간이 지적하는 대로, 실천 없는 믿음은 공허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야고 2,18).

 

실천하는 사람들은 남을 비판하거나 헐뜯고 분석하며 비난만을 일삼지 않는다. 자신이 실천할 것을 남들이 실천하지 않는다고 헐뜯기 보다는 자기 실천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남들 속에서 참된 나를 보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한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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