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강
5장 하느님 나라를 사는 능력
탈렌트는 카리타스! 사랑을 나누라!
신약성경 ‘탈렌트의 비유’(마태 25,14-30)에는 이런 경고가 있다.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교황으로 칭송받는 그레고리오 1세(590-604년 재위)는 이 탈렌트를 ‘사랑’으로 해석하여, 사랑하지 않은 이들은 그들이 받은 사랑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했다. 또 한 탈렌트를 땅에 숨기는 행위는, 자신의 마음을 세속적인 생각에서 들어 올리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을 영적인 이익을 구하는 데가 아니라 세상일에 쓰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땅 위가 영적인 세계, 땅 속이 세속적인 세계를 의미한다고 볼 때, 세속적인 세계에 전력을 다하여 마음을 쏟아도 전혀 수확을 얻지 못할 어리석음을 지적한 것이다. 사랑을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사랑의 결실을 더 맺을 수 있게 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랑의 법이다.
저명한 성서학자이자 뛰어난 영성가로 존경을 받았던 밀라노의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추기경은 한 탈렌트를 땅에 묻었던 사람은 모험하기를 두려워했다고 보았다. 그래서 한 탈렌트를 손에 쥐고 땅에 묻었던 셋째 종의 행동은 참신하지 못한 타성의 늪에 빠져 있는 삶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마태 25,27)라는 예수님의 질타는 다른 사람과의 진정한 관계를 단절하고, 주인을 심각하게 오해하여 자신의 안위만 챙기며 살아가는 사람을 향한 호통이다. 우리는 안전하고 싶고, 손해보고 싶지 않고, 다른 사람한테 내가 더 적게 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자신의 탈렌트를 아예 묻어 버리기도 한다. 그것은 열등감일 수도 있다. 그렇게 탈렌트를 고수하는 순간,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잊어버리고 나의 안전만을 추구하며 살게 된다. 내 마음 깊은 곳에 묻어 두고 아무에게도, 심지어 주님에게조차 드러내기 싫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나의 ‘한 탈렌트’일 것이다. 내 눈에 그 탈렌트는 해결해야 할 어떤 과제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본래 나에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종들이 본래 탈렌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인에게서 받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을 탈렌트라 볼 수 있다. 탈렌트는 나의 능력, 나의 생명, 존재, 나 자신 전체를 의미할 수도 있다.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주님께 받은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받지 않은 것처럼 살지 말아야 한다. 내가 적게 받았다고 해서 부끄러워하거나 질투할 필요가 없다. 각자의 탈렌트는 서로를 위해 봉사하라고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내 놓아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착하고 성실한 종이 되는 것이며 한 탈렌트를 받아 땅속에 파묻어 그대로 돌려주는 쓸모없는 종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지 않아서, 있으나 마나한 존재의 삶을 살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이 깊은 어떤 신자가 죽었다. 사람들은 그가 임종하자마자 즉시 천당에 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곧바로 천당에 가지 못했고, 하느님께 한 탈렌트를 땅에 묻었다가 다시 돌려드리는 자와 같은 불평을 했다. 하느님이 그에게 말했다. “너는 일생 동안 내가 너에게 준 탈렌트 하나의 사랑을 땅에 묻어 놓고 하느님도 사람들도 사랑하지 않았고 나를 지독한 자로 여기며 살았구나. 네가 가진 것을 나누지 않은 너는 세상에서 아무런 쓸모없는 존재였구나. 나는 네게 준 탈렌트(사랑)를 빼앗아야겠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듯이, 죄악도 하느님과 인간에게 함께 관련되어 있다. 자기정체성의 파괴, 즉 자아상실이 죄인 것이다. 죄란 인간성의 상실이며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한다. 또 공동체 차원에서 볼 때, 죄란 사회성의 상실과 거부이자 창조사업의 역행이며, 이로써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거역하는 것이다.
어쩌면 현대인들의 무죄선언 그 자체야 말로 가장 큰 죄악일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질송도 “사랑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죄악이다”이라고 했다. 우리들의 죄의식은 이 사랑에 좌우되고 비례된다.
펠릭스 쿨파! 아, 복된 죄여!
20세기 위대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장 다니엘루는 “무신론적 인문주의의 드라마에서 오늘날 대중은 믿기를 포기했다. 그들이 지은 죄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라면서 우리 시대의 불신을 고발했다. 언제부터인가 인간에게 하느님은 채무자가 되었고,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하느님, 그리고 그분의 나라와 사랑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게 되었다. 탐욕과 경쟁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 나아가는 것이 어느덧 정의와 자비의 하느님 나라를 살아나갈 인간의 여력을 제압하고 말았다.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을 받으면서도,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하느님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당신의 사랑인 탈렌트를 주셨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사랑을 갖지 않은 자로 살아가며, 또 사랑을 받았다 하더라도 더 많은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하니, 가진 것마저 빼앗길 신세가 된 셈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유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조시마(큰 수도자)는 이런 말을 남긴다.
아무것도 무서워 말게나, 절대 무서워하지도 괴로워하지도 말게. 자네의 내부에서 뉘우치는 마음이 식지 않는 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용서하실 것이네. 진실로 뉘우친다면 주님께 용서받지 못할 만큼 큰 죄는 이 세상에 없고 있을 수도 없다네. 아니, 무릇 인간이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소진시킬 정도로 큰 죄는 절대 범할 수도 없지. 아니, 하느님의 사랑을 능가할만한 죄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저 끊임없이 뉘우치는 데만 마음을 쓰게나. […] 사랑하고 있다면 자네는 이미 하느님의 사람이라네. 사랑으로 모든 것이 상쇄되고 모든 것이 구원된다네. 자네와 다름없이 죄를 지은 사람인 나도 자네에게 감동하고 안쓰러워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오죽하시겠나. 사랑은 너무나도 귀중한 보물이라서 그것으로 전 세계를 살 수도 있으며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타인의 죄도 대속할 수 있는 법이라네. 어서 가 보게, 그리고 무서워하지 말게나.
인간의 직관력을 일깨우는 감동적이고 열정으로 가득한 문장이다. 자신이 죄를 지었음을 자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하느님의 사랑을 배신한 죄를 깨달아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갔던 아우구스티누스 성인도 ‘오! 복된 죄여Felix Culpa!’라고 했다. 대부분의 성인들은 자신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배신한 죄인으로 고백하고 회개하여 성인이 되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데오 그라시아스!
누구든지 탈렌트 다섯 개, 곧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성실한 종처럼 그 사랑 안에 머물면서 사랑을 이 세상에 구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우리의 고백에는 하느님 나라에 살아갈 능력은 오직 사랑뿐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예수님의 헌신은 지상에서 실현해야 할 하느님 나라의 속성으로 그대로 보여주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양 옆에 서로 다른 모습의 두 죄수가 매달려 있었다. 한 죄수는 비아냥거리며 예수님을 모독하였고, 또 다른 죄수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과 함께 할 ‘낙원’을 약속했다. 지옥과 낙원은 선택과 결단의 문제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회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를 사는 참된 행복은 지속적으로 회개하는 생활로 하느님 나라를 사느냐, 살지 않느냐는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고 그것을 완성시킨 사람을 우리는 ‘성인’이라고 일컬으며 공경하고 본받으려 한다. 성인들은 의식적으로 하느님 나라에서 사는 것을 선택하고 지속적으로 회개하는 생활을 하였다. 매일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우리는 죽음의 사촌인 잠에서 부활한다. 성인들에게 있어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면서 회개의 다짐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하루는 언제나 부활의 연속이고 하느님 나라의 삶이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 갈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은 나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매일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그날 하루를 불행을 선택하여서 생지옥을 살아가기에는 인생이 너무나도 비참하고 짧고 덧없지 않은가?
이미 고인이 되신 청주교구 이한구 신부님은 운명 직전에 ‘데오 그라치아스Deo Gratias!’(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돌아가셨다고 임종을 지켰던 수녀님이 전해주었다.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사는 참된 행복, 그리고 그 하느님 나라의 삶의 완성을 이루어줄 자신의 죽음에 직면하여 하느님께 감사하며 눈을 감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오늘 하루도 하느님 나라를 새롭게 사는 기쁨을 청하자.
프랑스의 사상가 폴 부르제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나중에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기 시작하면서, 그 나라의 도래를 진행시키고 완성시키려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자신의 죽음 앞에서 ‘데오 그라치아스’ 하면서 눈을 감을 수 있는 사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