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강
4장 성체성사, 사랑의 공동체 생활로 하느님 나라를 살아나가자
생활공동체, 운명공동체로서 교회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는 강생육화의 표징인 성체성사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만 그 생명력을 지탱해 나갈 수 있다. 레오나르도 보프는 교회의 설립과 지속적인 교회의 개혁 과제를 이렇게 진단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것이지 교계제도를 선포하신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대신하며 신학적으로 볼 때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도구이며 아직은 불완전하지만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표지로 규정되어야 한다. 또한 교회는 종말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존재한다. 만일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었다면, 교회는 더 이상 필요 없었을 것이다. 제도로서의 교회는 말씀의 강생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도들의 권위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온 것이다. […] 이와 같이 교회는 성령의 감화를 받은 사도들의 역사적 결정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결단을 통해 태어난 교회는 부활한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령을 믿는 모든 신앙인들이 자신의 결단을 새로이 하고 교회를 항상 새롭게 구현할 때에만 지속될 수 있다. 교회는 완전히 규정되고 확립된 실재가 아니다. 교회는 항상 새로운 상황과 문화적 만남에 열려 있다”(<교회의 권력과 은총>, 235-236쪽).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론 역시 주님 안에 거듭 새로 태어나는 교회를 말하고 있다. 공의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교회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를 사는 데 있다. 교회의 활성화 역시 교회공동체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데에 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세우시고자 했던 이상적 공동체는 바로 사도들의 제자단 공동체같이 하느님 나라를 사는 새로운 가정공동체가 아니었을까? 지금은 남미나 우리 교회가 실천해 온 기초교회공동체의 활성화 방안을 강구해야 할 때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룬 생활공동체는 운명공동체였다.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똑같은 고난과 죽음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경지까지도 포함한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예수님께서 세우시고자 했던 공동체는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고 이를 완성시키는 제자단 공동체였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기를 요구했지만, 그들더러 외로이 따로 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형제자매와 새 가정을 이루어 그들 자신이 하느님 나라의 징표가 되도록 부르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가족 앞에서 새로운 가정을 선언하신다.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입니까?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그런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마르 3,20-35).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지난날의 가족을 해체하고 새로운 가정으로 편입되신다. “여기 이 사람들이 내 형제들이다!”라고.
누가 새 가족인가? 제자란 말인가?
아래는 게르하르트 로핑크의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분도출판사, 1985)를 참조한다. 하느님의 뜻을 행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율사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토라, 즉 시나이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런 의미일 리가 만무하다. 여기서 하느님의 뜻을 수행한다는 것은 신약성서의 여러 다른 대목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수행하시는 구원계획에 자기의 삶을 바꾸겠다는 최종적인 각오를 가지고 가담하는 일을 가리킨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란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믿고 하느님 백성으로 모이는 사람들이다. 바야흐로 이스라엘 안에서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식하고 하느님 나라로 몰려드는 모든 사람들이다.
이스라엘 안에서 예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 비교적 소수만이 자기 고향을 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팔레스티나를 두루 다니며 정처 없는 편력을 한다. 대다수는 자기네 가정에 머문다. 그럼에도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가정이 달라진다.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고 더 개방적인 가정이 된다. 자기네 친족끼리만 유유상종하지 않고 기꺼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환대한다. 가정들 서로가 관계를 맺는다. 수많은 개인들이 옛 형식들과 이별하고 새 가정과 결합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이를 보고 내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성체성사의 사랑의 구체화, 어떻게?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과 피’라고 하시며 성체성사의 사랑 자체인 나를 기억하고 이를 행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따라서 사랑의 실천 없이 미사 성찬례를 단순히 그저 예식으로만 거행하거나 감실 안에 성체를 모셔 두고 흠숭과 경배만 드려서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미사 전례 후에 사제는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ite missa est 복음을 전하십시오”라며 사랑의 실천을 당부하며 신자들을 파견한다. 벗을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보다 이 세상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는 성체성사의 사랑을 ‘기억하고 행하여’ 사랑의 계명을 따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와 같은 성체성사 사랑 실천을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단 말인가?
초대교회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며, 아무도 자기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 가진 것을 내 놓아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가졌다 한다(사도 4,32-35). 그야말로 초대교회는 성체성사의 사랑을 실천한 이상적 공동체 생활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성당에서는 매 주일미사 전례 때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인 성체성사를 거행한다며 신자들끼리만 빵조각을 나누어 먹고 만다. 우리나라의 큰 절에서 매일 점심때마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부처님께 공양 보시하는 마음으로 점심대접을 하는 것을 보며 이야말로 성체성사의 사랑 실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얼마 전 평소에 알고 지내는 박 집사라는 분에게서 자신이 다니는 C교회의 재정 사용에 대한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C교회는 최근 수년 동안 해마다 80억 정도를 1년 예산으로 책정하는데 아무런 차질 없이 그 계획대로 정확하게 예산을 집행한다는 것이다. 그 비결이란 1년 예산 80억 중에서 절반인 40억을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복지사업비로 책정하고 봉헌자들의 뜻에 따라 예산을 목적에 따라 사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성체성사의 사랑 실천을 기쁘고 즐겁게 한다는 것이다. 그 교회는 부목사만도 50여 명이나 되는데 반목과 갈등 없이 사랑의 실천을 함께 한다고 한다. 초대교회 공동체 생활을 닮은 하느님 나라 사는 체험을 실천하고 있는 참다운 교회 공동체라 할 수 있겠다. 한신대의 신학생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목사가 바로 이 교회 담임목사라고 하니 그 사랑실천이 우연이 아님도 알 수 있겠다.
또 서울 수락산 기슭에 있는 광염교회에서도 성체성사 사랑의 기적을 볼 수 있다. 그 교회 신도들에게 “요즈음 어떠세요?”라고 물으면 “너무 행복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재미있는 곳인 줄을 미처 몰랐습니다”라는 고백을 매일 같이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주일 예배에서 이 세상을 살아 갈 힘을 얻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다하자는 뜻으로 광염교회라고 이름을 지은 것만 봐도 사랑 중심의 교회영성을 알 수 있겠다. 광염교회는 같은 건물 1층 감자탕 식당의 간판에 가려져 있어 일명 ‘감자탕교회’라는 애칭도 얻었는데 그 조그만 교회가 그야말로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일으켜 성체성사 사랑의 실천으로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양병무씨는 <감자탕교회 이야기>라는 책에서 “이 교회 안에서 천국을 경험하고 천국을 확장하는 희망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또 “성경 속에서 잠자는 안타까운 예수가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성체성사 사랑의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감자탕교회는 100만 원만 남기고 100% 교회재정을 공개하는 원칙을 실천한다고 한다. 교회의 재정을 최소화한 교회 운영비만을 제외하고 90% 이상을 성체성사 사랑의 실천에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광염교회의 신도들이 그처럼 행복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사랑의 실천에서 하느님 나라를 산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봉헌자들의 지향대로 헌금을 다시 가난한 이웃들에게 돌려주는 교회, 믿음과 사랑으로 성체성사 사랑의 기적을 일궈낸 큰 감동을 주는 교회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교회의 모습일 것이다.
본당 활성화 - 애덕의 실천, 나눔의 실천
한편 우리 천주교회에서는 미사 때마다 주님께서 세우신 성찬례를 거행하며 그 의미를 재현하고 있지만, 성체성사의 사랑 실천보다는 예절로서의 성체성사로 그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개인적으로 안타까울 때가 많다. 물론 천주교회 안에도 나눔의 실천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기도 하고 몇몇 본당에서는 나름대로 성체성사 사랑 실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 예로 든 교회나 사찰의 보시 등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개인적으로 지울 수가 없다. 지난 2016년 8월 서울주보에 발표된 당기 2015년 1월 1일부터 2015년 12월 31일까지의 서울교구 수지계산서를 보면 219개 본당에서 납부한 교구납부액에서 복지비 명목은 단 53억 5천만 원 정도이며, 각 본당의 복지비 책정도 본당 전체예산에서 20% 내외에 머무는 정도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천주교회의 실정이다. 적어도 자신들의 전체예산 수입에서 40% 정도 수준의 성체성사의 사랑 실천에 앞장서지 않고서는 서울교구와 본당의 활성화는 그 생명력을 날로 잃어 갈 수밖에 없다고 본다.
성당에 발길을 끊는 신자가 날로 늘고 있다. 소위 냉담교우 증감 척도인 미사참여율도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 2010년에 27.2%, 2015년에는 20.7%로 줄었다. 사목자들 사이에선 “한국 교회가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가톨릭사목연구소의 전원 신부는 “한국 교회의 가장 심각한 부분은 젊은이들이 종교에 무관심한 현상”이라며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는 40대 이하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이 신앙체험을 통해 굳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도록 사목자들부터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대로 가면 2020년 미사 참여율이 13%대로 곤두박질 현실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평화신문 2016.10.9. 참조). 이 난관을 풀기 위해서, 나는 한국교회의 각 교구와 전국 본당들이 전체 예산 수입에서 40% 수준의 성체성사 사랑의 실천인 나눔에 앞장서는 길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너희를 위한 내 몸과 피’라며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신 예수처럼 교회가 죽어야 성체성사 사랑의 예수가 부활하실 수가 있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고 그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도록 선교하는 것이 그 존재이유와 목표와 내용의 전부여야 한다. 위에서 실례로 든 교회처럼 하느님 나라를 선교하고 지금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는 성체성사의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성경에서 지탄받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교회가 되고 말 것이다.
분도회 최종근 신부는 ‘성체성사, 파스카 신비의 원천이자 정점’(「경향잡지」 2019년 4월호, 65쪽)에서 나눔과 파스카의 본보기로서 성체성사를 생명에로의 참여라는 관점에서 살핀다. 의미 있는 내용이라 그 일부를 옮겨본다.
생명의 잔치 밥
‘성찬례에서 축성된 빵도 분명히 그리스도의 참된 몸이고, 거룩한 성찬의 희생 제사에서 실제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진다.’(전례현장, 2항 참조)라는 말은 맞다. 하지만 공동체와 함께 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만찬이 아니라며, 그것은 요즘말로 나 홀로 먹는 ‘혼밥’과 같다. 주님의 몸을 남들 모실 때 함께 모시지 않고 오랫동안 조배한 뒤 따로 혼자서 모시면, 그 밥은 ‘찬밥’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성찬례를 거행하는 ‘지금’ 나누어 먹으며, 우리가 모시는 성체는 천상의 양식이 아니라 ‘여기’ 지상에서 가난한 이들이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먹는 ‘더운밥’이 되고, 함께 먹는 모두를 살리는 ‘생명의 잔치 밥’이 된다.
참여하는 만큼 보인다, 파스카 신비!
성찬례는 신자들의 “의식적이고 능동적이고 완전한 참여”(전례 헌장, 14장)를 요구한다. 형제들과 모여 서로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며 평화를 빌어 주는 참여 속에서만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파스카 신비의 현재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능동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는 가운데에 성체성사는 파스카 신비의 원천이자 정점이요, 나아가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교회 헌장, 11항)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동안 “십자가에서 바치셨던 희생 제사를 지금 사제들의 집전으로 봉헌하고 계시는 바로 그분께서 집전자의 인격 안에 현존하시고, 또한 특히 성체의 형상들 아래 현존하시기”(전례 헌장, 7항) 때문이다.
순교영성에서 보는 한국 교회의 원천과 미래
신앙생활이 단지 이 세상에서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데 그친다면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지적하신 대로 이기적인 신앙이 될 것이고, 그 목표가 달성되지 못하면 실망하여 신앙생활이 즐겁지 않게 될 것이다. 성경의 말씀이 전해주듯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억하여, 세상을 살아 나아가는 가치관과 삶의 양식 그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성체성사 사랑의 실천이 우리 현실 생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한국 교회가 아무 쓸모없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짓밟히고,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처박아 버려둔 듯 어두움으로 가득하다면 한국 사회 안에서 교회의 존재는 의미가 없다. 한국 교회는 더 늦기 전에 성령강림의 은총을 빌며 지속적인 회개 생활로 주님 안에 거듭 태어나는 환골탈태의 자세가 필요하다. 교회가 우리 시대의 징표를 읽고, 세상 안에서 교회의 역사적 사명과 소명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황권에 맞서 프랑스 교회의 권리를 변호했던 신학자이자 대중설교가 보쉬에(Jacques-Bénigne Bossuet, 1627-1704년) 주교는 하느님 나라를 사는 공동체를 교회라 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살라고 선포하셨다. 하느님 나라를 사는 공동체를 나중에 교회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교회란 하느님 나라를 사는 공동체다.
우리 선조 순교자들은 ‘교우촌’이라는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여 그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기 시작했고, 그 신앙의 여정을 순교로 마쳤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이렇게 지상의 하느님 나라에서 하늘에 있는 하느님 나라로 무사히 건너가는 파스카 여정, 곧 부활의 신앙을 보여주었다. 교우촌의 신앙 선조들은 비록 가진 것은 턱없이 부족하였지만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함께 나누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을 따르고, 형제적 우애를 이루며,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박해시대에다가 흉년과 심한 기근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는데도 교우촌 공동체 안에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굶어 죽는 자들이 적었다고 한다. 성체성사의 사랑으로 서로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우리 선조들의 교우촌은 마치 수도원처럼 사랑과 헌신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현한 공동체였다.
사랑은 하느님의 유전자다. 사람이 하느님을 가장 닮는 순간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하느님 사랑의 유전자를 가진 존재는 모두 한 몸이고 한 공동체다. 이것이 ‘공동체의 세계관’ 또는 ‘공동체의 영성’이다. 순교자들은 이 같은 공동체의 영성으로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기 시작했다. 백정 출신 황일광(시몬) 복자는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합니다”라는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 이 말처럼 우리 순교자들은 신앙으로 지상에서부터 천국을 맛보았고, 그것을 천상의 영원한 삶으로 이어 나갔다. 우리 한국 천주교회 신앙의 선조들은 아무리 못 배우고 가진 것이 없고 신분이 낮아도,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맛, 복음의 절대 가치를 위해 치열하게 사는 것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것이 한국 순교영성의 뿌리이다.
그런데 이런 위대한 선조를 가진 한국 교회가 신앙의 정체성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정체성을 되살리는 길은 원천, 뿌리로 돌아가는 길뿐이다. 한국 교회는 신앙의 뿌리인 선조들의 순교 영성에서 이 문제의 해답을 찾아야 한다. 그분들의 순교영성에서 교회의 활력을 얻어야 한다. 결국 한국 천주교회의 본당활성화는 박해시대에 우리 선조 순교자들이 보여준 교우촌, 사랑의 공동체 또 그분들의 순교영성과 성체성사의 사랑 나눔을 실천하는 데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