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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6

2장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간다는 것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15).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 나아갈 수 있는 출발점은 지속적인 회개(悔改)의 삶에서 비롯한다.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 삶의 출발점인 회개의 생활이란 성경의 예언자들이 늘 요구했던 내용이다. 광야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은 물론 예수님께서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끊임없이 강조해 왔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보다 더 구체화시키셨고, 이 세상에서의 하느님 나라의 삶과 연결시키셨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기쁜 소식, 복음은 천상의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를 찾으라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 이하).

 

나자렛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처럼 이 세상에서, 사람들 가운데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셨다. 주님의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도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천사의 방문을 받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의 길을 걸었다. 우리는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하며 성모송을 바친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놀랍고 두려웠지만, 하느님이 함께하신다는 천사 가브리엘을 곰곰이 묵상을 한 뒤 그대로 믿었다.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한 성모 마리아는 유다 산골에 사는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했다. 늙은 나이에도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은 주님의 어머니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성모 마리아를 향해 엘리사벳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당신은 “행복하십니다”(루카 1,45)라며 찬사를 보냈다.

하느님은 가난하지만 믿음이 깊은 두 여인에게 오셨다.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은, 그렇게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아갔던 사람들이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루카 6,20-23).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참된 행복의 기준과 조건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하느님의 나라와 연결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이 있음에도 여전히 불행하게 살아간다. 반면에 여러 정황으로 보아 딱하고 불행할 것 같은데도 얼굴에 미소를 띠며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예컨대 부탄이나 쿠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데도 세계적으로도 아주 높은 행복지수를 갖고 있다. 그곳을 다녀온 많은 여행객은 그곳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마음이 거칠지 않았다는 소감을 전하곤 한다.

자신의 가치관, 곧 삶을 대하는 방식이나 사고에 따라서 ‘오늘 여기’의 삶이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내일 그곳’에서의 삶도 행복하기란 쉽지 않다. 오늘 여기에서,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면서 행복을 찾았던 이를 만났다. 그 사람은 그렇게 먼 곳에 있지 않았다.

25년간 주방에서 묵묵히 봉사해왔던 나의 식복사가 내게 한 말이다. “매일 아침 눈뜨고 일어날 때마다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마치 기계처럼 매일 똑같은 일을 하지만,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게 해주셔서 그저 기쁘고 행복할 뿐입니다. 하루 세끼니 식사를 준비하면서 이제는 은퇴하신 원로 사제와 함께 매일 똑같은 하루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이 매일 그날이 그날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 나아갈 수 있는 새날을 주시는 것이라 생각하니, 어찌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고, 또 기쁘고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적지 않은 세월을 내 옆에서 늘 도움을 주던 사람이라 무심하고 대수롭지 않게 지내곤 했는데, 그의 행복론을 들으면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 살아 나아가는 것에 대한 더 깊은 묵상을 하게 되었다. 그는 반복적이고 아주 소박한 일상에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 나아가고 있었다.

이런 경우도 있다. 나이가 지극하신 할아버지 한 분이 예비자교리 공부를 다 마치시고 이제 세례성사를 받는 날이 되었다. 세례성사가 막 시작되던 그때, 주례 사제에게 그 할아버지가 갑자기 자기는 세례성사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사제가 그 이유를 물었다. 그 할아버지로부터 돌아온 답은 이렇다. 당신은 세례성사를 받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갈수 없다고 교리를 배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세례성사를 받고 자기 혼자만 하느님 나라를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자꾸 마음 한 구석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도저히 안 되겠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둘이 한 몸으로 한 평생을 동고동락하며 살아왔던 마누라가 세례성사를 받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하느님 나라에 가지 못했을 거 아니냐는 것이다. 죽어서 다시 보고 싶다는 말이다. 또 얼마 전까지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온 서너 명의 친한 친구들도 세례성사를 받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들과 함께 천국에서 함께 살지 못하고, 나 혼자 하느님 나라에 간다면 무슨 사는 재미가 있겠냐며, 세례성사를 보이콧하려 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이 두 사례를 보면서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하여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 이르게 된다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와 함께 하는 가족, 이웃, 동료, 친구들과 더불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꾸리지 못한다면, 천상의 행복은 별 의미가 없다. 이 세상에서부터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를 살아간 사람이,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서도 타인들과 더불어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가정공동체도 마치 성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와 아들 예수님이 이루신 성가정 공동체와 같은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성가정 공동체 생활 안에서 날로 지혜와 총명이 자라난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자 드디어 갈릴래아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랑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인간의 참된 행복은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서 타인과 이루는 관계 안에서 이뤄질 수가 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서 사랑으로 우리 인간을 부르고 계신다.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응답은, 바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삶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가장 완전히 응답하는 신앙생활이다.

무심결에 바치는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 나라가 오시며”라는 기도의 지향과 내용은,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기를 시작하고 진행시켜 완성에 이르게 하소서!”라는 종말론적이며 완세론적 의미가 담겨 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도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지향도 같은 맥락이다. 즉 “저희가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게 하시고, 하늘에서도 그 하느님 나라 살기를 완성시켜 주십시오”라는 청원의 기도이다. 주님의 기도문을 바칠 때마다, 아버지의 뜻인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 살기를 실천함으로써, 참된 행복을 지금 여기에서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끊임없이 자문하면서 바쳐야만 한다.

인간의 삶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매순간 스스로 묻고 답해가면서 살아야 한다. 이와 같은 질문의 답은 매순간 자신의 일상의 삶에서 나타난다. 왜냐하면 인간 삶의 본질과 삶의 방향에 관한 물음은 극히 단순하고 일상적인 일상의 삶 속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는 것을 통해서 인간 삶의 본질과 그 삶의 지향을 위한 답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를 사는 참된 행복을 누리고 얻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을 너무도 쉽게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인생은 아름답다’는 말은 사람들과의 관계, 곧 대인관계에서 오는 사랑으로 인해 아름답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기를 진행시키고, 그 완성의 길로 나아가면서 참된 행복을 찾는다면, ‘귀천’(歸天)의 시인 천상병처럼 잠깐 소풍 나온 세상, 인생은 정말 아름답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성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이런 말이 있다. “저 사람은 지금까지 계속 지옥에서 살다가 지금 금방 나온 사람의 얼굴 표정을 하고 산다면 어떻게 참된 행복한 자의 부류에 속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적어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래서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면서, 그 나라의 완성에 기여하고 있다면, 얼굴 표정부터 참된 행복을 누리는 자에 속하게 될 것이다.

인터넷을 보다보면 뜻하지 않게 의미 있는 묵상거리를 제공하는 글을 볼 경우가 가끔 있다. 그렇게 떠도는 글을 옮겨서 묵상의 자료로 삼았다.

 

지나간 어제 – 내일

 

내일(來日)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심리학자 윌리엄 마스틴은 시민 3천 명을 대상으로 “당신은 무엇 때문에 삽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설문 응답자의 94%는 미래를 기다리면서 현재를 그저 참아내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윌리암은 이 사실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부 응답자는 그저 무슨 일이 벌어지기만을 기다린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떠날 때를 기다리고 누군가가 죽기를, 혹은 내일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은 있었지만 현재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시작된 후 오늘은 언제나 인간의 친구(親舊)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지한데다 슬픔을 이기지 못해 어제와 내일을 바라봅니다.

지나간 고통과 슬픔은 잊으세요. 어제는 이미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죄책감은 과거에 집착하고 염려는 미래를 걱정합니다. 그러나 만족은 현재를 누립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산다는 것은 당장 지금 여기에서 살아 나아가야 할 하느님 나라에 만족하면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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