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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5

1장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러 오신

임마누엘 하느님이시자 인간이신 그리스도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하느님의 육화(肉化)와 인간의 신화(神化)이다. 다시 말해서 이레네오 성인부터 동서방의 교부들이 말한 바와 같이, “신이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Deus homo factus est ut fiert Deus.”

프랑수아 바리용 신부는 <흔들리지 않은 신앙>(생활성서, 2014)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강생과 인간의 신화(神化), 이 두 진리는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전통적인 것이며, 어떤 문화적 컨텍스트라도 변경시킬 수 없는, 영원불변하는 신앙의 핵이다. 교회는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을 문제 삼을 수 는 있어도, 결코 그것 자체를 의문시할 수는 없다(24쪽 이하).

 

성화(聖化)의 은총

 

은총이란 순수한 베풂을 뜻한다. 그리고 거룩하게 하는 것, 즉 성화란 신화(神化)를 의미한다. 구약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다. 이사야는 예언자로 소명을 받는 자리에서 하느님을,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면 찬미한다(이사 5,3). 우리는 하느님을 거룩하신 분으로 고백한다. 하느님 거룩함의 은총으로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같아질 수 있다. 성화(聖化)란 엄격한 의미에서 신이 되게 하는 것, 곧 신화(神化)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화의 은총이 있다는 것을 교리로 배워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이 우리가 신적인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

 

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삶 자체를 사는 피조물을 의미한다. 아버지는 자기 아이들에게 단순히 생명만 주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준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고유한 생명을 주셨음을, 다시 말하여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신성에 참여하도록 이끄신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더 엄격히 말하면, 우리가 신화(神化)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상당히 중대한 문제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엄청난 일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드는 세례는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누구이며, 하느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신다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의미는 인간이 신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데 있다. 나는 교회에서 ‘신화’(神化), 또는 ‘신격화’(神格化)라는 단어가 다시 활기차게 말해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여기서도 물음은 있다. 이 단어가 제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물론 정확히 해 둘 것들이 있다. 즉 우리는 하느님이 신이신 것처럼 영원히 신일 수 없고, 그분처럼 무한하며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 삶의 문제 속으로 들어 왔다. 그 삶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모른다면 우리가 영원히 하느님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거듭해서 말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 하느님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지 않고서 우리의 소명이 당신같이 되는 것이라고 계시해 주실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분이 우리를 놀리시는 것이 되리라.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만일 인간이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인간은 “신이 될 수 있는 존재”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은 가장 심오한 답변으로, 인문, 사회과학이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그 어떤 흥미로운 답변들도 능가한다. 심리학, 사회학, 정신분석학 등의 진술이 흥미진진하지만, 인간의 궁극적 깊이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인간의 신비 – 인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비다! - 에 대해 가르쳐 줄 수 없다.

어째서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존재인가? 아주 간단히 말해서,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이면서 온전히 사람인 인간이 있다. 복음서와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이시라고 거듭 말한다. “죄만 빼고”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바로 죄인이 아니기에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시다. 우리가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을 막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에 있다. 진정 하느님이 인간 종족, 인간 족속의 한 구성원이 되셨다면, 모든 인간은 하느님인 그 존재처럼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한 사람이 하느님이라는 것은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의 신비, 의미 그리고 인간적 삶의 의미는 모든 인간에게 하느님처럼 될 수 있는 본질적 능력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에 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 주신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지당한 말이다. 하느님이신 한 인간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사실 사랑의 깊은 경향, 심오한 움직임은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 사랑하는 대상과 결합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와 하나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적 사랑 안에 이미 있되, 인간적 사랑으로는 온전히 실현될 수 없는 움직임이다.

나는 사랑하는 기쁨에 견줄 만한 기쁨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예술을 하는 기쁨이나 학문을 탐구하는 기쁨과도 결코 비교할 수가 없다. 사랑하는 기쁨은 절대적으로 유일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엔 고통이 따른다. 사랑으로 들어가는 것은 기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지만, 또한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단순히 언제나 배신, 습관, 감정의 약화 등의 위험이 따르기 때문만이 아니다. 훨씬 심각한 의미에서, 사랑의 깊은 소망이 이승에서는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너와 나, 우리가 결합될 뿐 아니라, 온전히 하나가 되고자 하는 그 깊은 소망을 우리는 여기서 온전히 이룰 수 없다.

그 인간의 소망을 하느님은 육화/강생incarnatio을 통해 실현하신다. 그분은 나와 하나가 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은 한 인간과 결합하신 것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과 하나가 되신다. 이것이 완전하게 실현된 사랑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신 한 인격적 존재라고 말할 때, 벌써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알게 된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의 성경 전체가 이 점을 자세히 보여 준다.

 

<거룩한 갈망 - 그리스도교 영성을 찾아서>(‘참사람되어’, 2004년 11월)를 쓴 도날드 론하이저의 해석은 이렇다. 제법 긴 내용이지만, 전문을 옮겨 적는다.

 

육화의 신비란 단순하게 말하자면, 하느님이 육체를 취하고 인간과 보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방법으로 관계를 맺는 신비이다. 그러나 이 신비의 본질적인 측면, 특히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 대해서는 보충 설명이 요구된다. 즉, 왜 하느님은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셨을까? 이런 행위의 충격적인 노골성: 그리고 단 한번이 아니라 계속되는 측면.

 

왜 육화일까?

왜 무한한 권능이 인간 역사와 인간 육체라는 테두리 안에서 그분 자신을 한정시키려고 했을까?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살을 가지고 있능 어떤 존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살을 취한다. 모든 곳에 계시는 하느님은 또한 쉽사리 아무 곳에도 계시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만지고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볼 수 있는 것을 믿는다. 우리에게는 오감도 있고 그것을 통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길을 걸었던 예수는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들을 수 있는 존재였다. 육화를 통하여 하느님은 신체적인 존재가 되었다. 감각을 지닌 피조물인 우리가 살을 지닌 하느님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나코스 카잔차키스는 우화를 통해 설명하였다. “한 남자가 예수께 다가와 숨어 계시지만 하는 하느님께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왜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십니까? 저는 평생 하느님을 뵙기를 기다리면서 매일 기도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고 부드럽게 대답하셨다. ‘어느 날 가난한 거지가 맨발로 배를 굶은 채 말했다. 하느님, 자비를 베푸시어 당신의 힘을 진정시키시고 당신의 영광을 낮추시어 저 같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이 당신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저희가 당신을 제다로 봤다간 장님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한 조각의 빵, 차가운 물 한 잔, 따뜻한 겉옷, 그리고 작은 움막이 되셨고 그 움막 앞에서 아기를 돌보는 여자가 되셨다. 그 거지는 속삭였다. 주님 감사합니다. 당신은 저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빵, 물, 옷, 부인과 아이가 되셨으니 제가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당신이 갖고 계신 사랑스러운 그 얼굴들에 경배합니다.”

하느님은 육체를 취하심으로써 모든 가정이 교회가 되고, 모든 이가 아기 예수가 되면 모든 음식과 음료가 성찬이 될 수 있게 하셨다. 하느님은 그분이 갖고 있는 수많은 모습으로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셨다.

 

육화가 지니고 있는 충격적이며 원초적인 신체성

육화는 육체의 특징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므로 매우 충격적이다. 영어의 육화incarnation는 라틴어에서 살, 육체적인 살을 의미하는 carnus에서 유래했는데, 이 말은 매우 비정신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말이다. carnus는 있는 그대로의 몸, 동물적인 몸,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몸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육화는 문자 그대로 육체적인 살을 뜻한다.

우리는 예수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한편으로 익숙하게 여기지만 그분의 몸이 죽을 수밖에 없고 성적인 능력이 있으며 병에 걸릴 수 있고 냄새가 나며 기타 모든 인간의 일상적인 작용을 그대로 따라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주저하게 된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 다시 말하자면 성찬례와 믿는 이들의 지체에 이러한 육체적 실제성을 부여하지 못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지속되는 육화

마지막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는 육화의 지속성에 관한 것이다. 육화는 하느님이 역사 속에서 삼십삼 년간 단 한차례에 걸쳐 인간에게 개입한 사건이 아니다. 육화는 예수로부터 시작되었고 결코 끝나지 않는다. 예수의 승천은 육화를 끝내거나 근본적으로 변질시킨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육체는 여전히 우리 가운데 계신다. 하느님은 역사적 예수로 존재하셨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며, 육체적으로 실제적으로 살아 계신다. 예수처럼 인간의 피부와 살로 덮여서 지상을 걷고 계신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성서는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표현할 때 세 가지 의미를 제시한다. 즉 예수, 이 지상에 삼십삼 년간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 성찬례, 우리 가운데 육체로 현존하시는 하느님; 그리고 믿는 이들의 지체, 이 역시 실제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말은 동시에 단 한번으로, 예수, 성찬례, 신앙의 공동체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표현은 과장도 아니요, 은유도 아니다. 믿는 이들의 지체가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말하는 것은 성서에 없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 특히 바오로 사도는 미든 이들의 지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대신하는 것이나, 그리스도의 지체를 대변하는 것이나, 그리스도의 신비체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단순하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1코린 12,27; 6,15)라고 말했다.

바오로 사도의 이 표현에 대하여 성서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어떤 법인체 같은 단체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실제로 육체적인 몸으로 본 것일까? 우리는 예를 들면 예수회처럼 같은 공동체의 정신에 의해 고무되는 그룹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신체의 여러 기관이 하나의 몸을 이루는 것같이 지체가 되는 것인가? 성서학자들은 대략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다. 믿는 이들의 지체는 성찬례처럼 유기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것은 법인체가 아니라 지체이다. 단순히 신비체가 아니라 육체적인 실제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대번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분 자체인 어떤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엄청난 의미들이 나타난다. 예수가 승천했을 때 육화가 삼십삼 년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은 여전히 이곳에, 육체로서 실제로 몸으로서 살아 계신다. 예수님 안에서 살았던 것처럼, 말씀은 한 때 살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셨던 것이 아니라 살이 되었고 계속하여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신다. 미든 이들의 지체 안에서 그리고 성찬례 안에서 하느님은 여전히 육체적인 살과 피부를 갖고 육체적으로 보여지고 만져지고 들을 수 있고 맛볼 수 있다.

이 사실은 단순히 신학과 진리, 믿을 교의가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임이 진실이라면, 오늘날 이 세상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은 결국 우리들이 어떻게 행동하는 가에 많이 달려 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똑 같은 방식으로 하느님이 이 세상에 계속 현존하시도록 해야 한다. 아빌라의 데레사가 너무나 간단명료하게 표현했던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손, 발, 입 그리고 마음이 되어야 한다. 어느 성서학자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중재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공동체가 선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들릴 수가 없다. 사람들로 하여금 응답할 수 있게 하는 예수님의 권능은 공동체가 표현하지 않는 한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어 세상 속에서 세상을 위하여 했던 것을 공동체도 이 세상 속에서 세상을 위하여 한다.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때 행동하셨던 것처럼, 그분은 이제 그분의 아들의 모습과 일치하고 아들의 모범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행동하신다.”

 

역사적 인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셨던 것 같이, 우리 인간도 이 세상에서 성령의 놀라운 도우심으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해져야 한다는 예수님의 권고를 실천하는 일이다. 즉 그 길은 우리가 참으로 올바른 인간으로 완성에 도달하는 길, 마침내 신이 되는 길이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죽어서도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없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믿고 고백하는 부활 신앙이고, 파스카 신앙생활이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산다는 것은 참 행복의 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임마누엘 주님께 다가가는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그렇게 당신께 다가서는 우리에게 행복의 문을 열어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느님 나라를 살아나가도록 도우신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7-19).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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