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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4

11. 그리스도교의 정체성

 이 책에서는 보편적 개방성이 더욱 심화되는 모습이 그리스도교의 오후의 특징이 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성찰을 계속하고 있다. 기존의 정신적 · 제도적 울타리를 넘는 과감한 발걸음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매번 불안한 질문을 제기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 그리스도교를 배신하는 것은 아닌가? 이것으로 우리 신앙의 정체성이 흐려지지는 않는가? 비판적으로 자기 성찰을 하게끔 하는 대부분의 의심처럼 이런 의심은 건강하고 유용하다. 그 의심은 우리가 늘 반복해야 하는, 특히 문화적 패러다임이 변하는 상황에서 던져야 하는 다음의 질문으로 이끈다. 우리 신앙에서 그리스도교적 특성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교답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고 간단히 대답하면 그게 올바른 답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올바름은 다른 많은 질문을 거쳐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믿고 무슨 신앙을 고백하는 것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분의 부활을 믿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부활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인간 예수를 우리처럼 존경하고 사랑하는 '비신앙인들'에게도 장애물이 되며 여기에서 우리와 갈린다. 아니면 우리는, 예수님이 믿었던 예수님의 신앙 행위(fides qua)와 예수님이 믿었던 신앙의 내용 · 대상(fides quae)을 믿는 것인가? 우리 신앙이 특히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신 그분에 대한 예수의 증언이 참되다고 믿고 신뢰하는 것인가?

 수세기 동안, 가톨릭 신학부의 사제 지망생들의 준비 과정은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철학과 '자연 신학'을 먼저 공부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학업 체계 때문에, 예수님이 하늘 아버지에 관하여 말씀하셨을 때 누구를 의미했는가에 대한 물음에 사전 에 준비된 정형화된 대답만 내놓게 되었다. 형이상학 강의에서 신의 본성과 속성에 대하여 이미 많이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선지식 때문에 복음의 원래 핵심을 치명적으로 오해하고 심지어 왜곡하여 이해하게 될까 염려스러웠다.

 예수님은 철학자와 학자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 불타는 덤불 속에서 모세와 대화한 하느님을 믿으셨다. 이 차이는 파스칼에게서도 이른바 '불의 밤' 체험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학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 인간의 모든 상상, 즉 형이상학적 구조에서 개인적 환상에 이르기까지 생각들을 근본적으로 ‘망각’하고 ‘배제’할 용기를 전제로 삼아야만 한다. 우리는 하느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 자신들을 포함한)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는 단어로 의미하고, 의미한 것을 알지 못한다고 겸손하게 인정해야 (또는 현명하게 인식해야 하며. 예수님이 당신 아버지라고 말씀하신 분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버지와 맺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길 갈망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보호자 요 조력자인 분을 우리에게 보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고 있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한편으로 성서적 근본주의에 대항하고 다른 한편으로 모호한 감정적 신앙주의와 거리를 두고자, 창조에 대한 성찰을 통해 창조주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 이성의 능력 안에 있는 일이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우리는 이 확신을 결코 신앙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신앙이란 하느님의 선물인 은총과 이 선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인간의 자유가 본질적으로 서로 스며드는 하나의 덕이기 때문이다.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개방성(계시)이 인간의 개방성, 즉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분께 순종하는 능력 (potentia oboedientialis)과 만나게 된다. 우리의 신앙은 형이상학자들의 신 관념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가 맺는 관계이다. 그 관계는 복음서에 나타난 관계로, 복음서에는 그 관계를 증거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담겨 있고, 그분의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믿음을 가지시오!" (Habt den Glauben Gottes) 라고 말씀하신다. 번역을 신중하게 하는 바람에 이 문장의 의미가 하느님께 믿음을 가지시오! (Habt Glauben an Gott)라는 식으로 희석되고 왜곡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더 많은 내용 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주체'이다. 고전적인 신학 교과서는 예수님이 신덕信德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신덕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을 "믿음의 선구자이시며 완성자'라고 말한다. 그분의 믿음에는 하느님 당신의 믿음이 있고, 위험을 감수하는 우리에 대한 믿음이 있다. 하느님은 우리의 믿음을 일개우시며 우리의 자유를 신뢰하시고 우리가 당신 선물에 믿음과 신뢰로 응답할 것이라고 믿으시면서 우리 믿음에 동행하신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부정할 수 없기에 신의가 있으시다. 그 분은 우리가 신의가 없을 때도 신의가 있으시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믿지 않아도 우리를 믿으신다. 그분은 우리 마음, 믿음과 불신, 신의와 배신이 늘 씨름하는 인간의 마음보다 더 크시다.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믿음, 신뢰, 사랑이 우리 인간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임을 당하며 묻힌다. 그러나 그분의 믿음, 신뢰, 사랑은 무덤 속에 있지 않다. 어느 누구보다도 겟세마니의 어둠을 제대로 체험한 체코 시인 얀 자흐라드니체크는 지상의 권력은 “역사가 성금요일 정오를 넘어서지 않도록” 늘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썼다. 하지만 부활 이야기는 지옥과 죽음이란 단어로 종지부를 찍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부활 이야기는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메시지로 끝난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부활의 아침 빛이 얼마나 천천히 어렵게 사도들의 슬픔과 의심으로 드리운 어둠을 뚫고 들어가는지 살펴볼 수 있다. 예수님은 죽음의 경험으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한 모습으로 사도들에게 오신다. 이따금 나는 이 메시지를 듣기에는 아직 우리의 “귀가 자라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신의 죽음을 알린 니체의 광인이 던진 메시지는 이미 우리에게 친숙하게 되어 버렸지만, 부활은 여전히 완벽하게 이해되지 않았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활은 종종 쉽게 거부할 수 있는 상투적인 메시지 형식(시체가 단순히 되살아나 움직인다는 보고나 '예수님의 일이 계속된다'라는 상징적 표현)으로 다가올 뿐이다.

 이 메시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증거에서 인식할 수 있어야 믿을 수 있다.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서, 그들의 신앙, 그들의 희망에서 살아 있어야 한다. 특히 진정하고 강력한 사랑의 연대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아 있어야 이 메시지는 신빙성이 있다. 니체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내가 그들의 구원자를 믿을 수 있도록. 그의 제자들이 더 구원받은 것처럼 보여야 한다!'라고 말한다. 우리의 자유, 즉 모든 종류의 노예제도로부터의 구원은 우리 신앙의 주춧돌인 그리스도의 부환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이다.

 

 “예수는 하느님이다” 라는 진술은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일부 해석은 많은 오해를 일으켰고, 특히 예수님의 참된 인성을 부정하는 단성론과 가현설이라는 이단을 낳았다. 예수님이 하느님과 나란히 있는 신이라는 생각 때문에, 유대교와 이슬람은 그리스도교를 유일신고의 배신자라고 의심했고, 유일신에 대한 신앙을 저버렸다며 갈등을 빚었다. 잘못된 해석이 낳은 이단들은 그리스도교 사상과 신학에 해가 됐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영성과 사회적 실천에도 피해를 주었다. 예수님의 참된 인성을 가리고 의문시하며, 그분의 신성만을 강조하는 그늘에서 그리스도교 인본주의, 그리스도인의 인간성은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리스도인은 정통 실천(Orthopexis)을 통하여, 즉 인간성과 이웃 사랑을 철저히 실현함으로써 예수님이 참으로 인간임 을 믿는 정통 신앙을 가장 잘 고백할 수 있다. 여기에 바로 그리스도교 정체성의 기둥 중 하나가 세워져 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신성을 어떻게 고백해야 할까? 복음서에서 우리는 딱 한 군데서 예수님의 신성을 분명하게 만날 수 있다. 의심하는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의 상처를 만지며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외치는 장면이다. 나는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믿음을 수많은 신학적 해석과 교의적 정의에서 벗어나서 자체의 '삶의 자리'가 있는 저 장면에서 다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저 기반에서 종종 동떨어진 모든 진술의 진위를 토마스 사도의 격정적인 부활 신앙에 근거해 확인해 봐야 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문장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 '깨침'의 순간을 종종 떠올린다. 이 순간은 동시에 그리스도교 신앙, 부활 신앙,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라는 신앙을 새롭게 이해한 순간이었다. 인도의 마드라스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나는 토마스 사도가 순교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 근처에 굶주리고 병들어 버려진 아이들이 가득한 가톨릭 보육원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이것이 그리스도의 상처이구나!'라고 깨달았다. 우리 세상에서 온갖 불행, 고뇌, 고통의 상처를 외면하는 사람은, 그 상처에 눈을 감고 만져 보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외칠 권리가 없다. 동시대 많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이라는 우리의 신앙 교의를 이해하지 못 한다. 그래서 우리는 교의적 정의에서 벗어나 고통받는 사람들과 연 대하며 그들의 고통에 담긴 神顯, 하느님의 계시에 개방적인 정통 실천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우리 세상의 상처 속에서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방식으로 볼 수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신비를 접촉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가 신앙의 역사에서 어떤 이바지를 했는지 찾으려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 특히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 사이의 유대를 강조한 그분의 가르침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신약성경의 본문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들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위선자이고 거짓말쟁이라고 늘 반복해서 말한다. 그와 반대로 이웃과 연대하는 사랑이 하느님 신앙을 포괄한다. 예수님이 최후의 심판을 묘사한 부분을 읽어 보면, 명백히 '그리스도교적' 동기가 없는데도 궁핍한 이들에게 실제 사랑을 보여 준 사람들이야말로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을 증명한 이들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그렇게 해준 것으로 그리스도를 스스로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예수님은 “주님, 주님”이라고 당신 이름 을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참 된 제자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느님 아버지께로 '배타적'인 방법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이 당신이라는 예수님 말씀에 대한 통상적 해석을 결정적으로 바로잡은 것이다. 그 말씀을 엄격히 배타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그리스도인 아닌 이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태오복음에서 묘사된 최후의 심판에 따르면, 예수님의 '나'는 훨씬 포괄적이다. 그 나에는 당신과 동일시될 수 있는 모든 '미천한 이들' 이 속한다. 그 말은 그들에게 이웃 사랑을 보여 주는 사람은 그것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간다는 뜻이다. 비록 그가 예수 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알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리스도는 그들 안 에 숨어 계시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고 가르친다. 그분은 문이고, 열린 문은 텅 빈 공간이다. 따라서 통로가 되어서 들어갈 수 있다. 바로 이 케노시스, 자기 증여, 자기 비움이 하느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드높이시고' 그분에게 '모든 이름 위의 이름'을 준 근거 이다. 즉, 하느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보편적인 그리스도'로, 언제 어디서나 계시는 전능한 주님으로 만드셨다.

 야고보 서간에 암시된 신앙의 모티브로 돌아가자. 믿음을 끊임없이 입에 올리지만 사랑의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위선자이며 죽은 신앙을 가진 자들이다. 반면에 암묵적으로, 익명으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믿음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묘사된 것과 같은 그리스도 신앙을 찾으려 한다면,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명확히 연관된 곳에서만 찾지 않아도 된다. 또 전통적으로 이해된 교회의 범위 안에서 배타적으로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를 따르지 않는 제자들, 익명의 그리스도인', '보이지 않는 교회'도 존재한다. 예수님은 지나치게 의욕적이고 편협한 제자들에게, ‘우리를 따르지 않는’ 이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당신을 증거하는 일을 막지 않도록 단단히 이르셨다.

 

 신약성경 사화에 나오는 인간 예수의 이야기는 바오로 서간과 요한계 문헌을 토대로 한 신학의 테두리 안에서 구성되어 있다. 그 이야기'에서 인간이신 예수님은 특히 그리스도, 즉 구원자이다. 바오로와 요한에게 예수님은 예언자들이 약속했던 유대인의 메시아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교회는 지상의 인간 예수가 근원적 성사이자 상징이다, 당신을 가리키는 동시에 하느님의 자기표현인 강력한 표정 이라고 가르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느님과 결합된 말씀이다. 하느님은 그분을 통하여,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모든 만물의 창조 원리이며, “세상은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다”. 따라서 이 복음에서 예수님이 당신 자신에 대하여 “나는···이다” (ego eimi)로 시작하신 말씀으로 하느님의 자아가 빛을 밝히게 된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요한묵시록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의 시작과 끝인 알파요. 오메가이며, 우주의 첫 번째 의미이자 마지막 의미이다.

 바오로 사도에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어 아버지의 영광 속으로 올라가신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그리스도이자 하늘과 땅의 주님이자 심판관이시다. 바오로의 그리스도교 보편성은 인물, 즉 나자렛 예수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와 그의 가르침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편성에 기초한다. 바오로 사도를 매료 시킨 것은 '육신에 따른' 역사적 인물 예수라기보다 ' 성령에 따른' 그리스도이다. 그분은 모든 경계를 허물고, 심지어 사도의 에고를 압도 하며 대체시켰기 때문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오늘날 지구촌 사회라는 맥락에서 다시 보편적인 제안이 되려 한다면,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론은 다시 바오로 사도 그리스 교부들, 신비주의자들의 그리스도처럼, 또 프란치스칸 영성, 동방 그리스도교의 영성 신학, 테야르 드 샤르댕의 신비주의적 우주론에서 묘사된 그리스도처럼, 지난 몇 세기 동안 감성적이고 도덕적인 설교나 고루하고 무미건조한 설교에서 흔히 묘사된 그리스도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더 큰 그리스도'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론을 발전시키는 대담하고 고무적인 시도 중 하나는 미국 프란치스코회 사제 리처드 로어의 '보편적 그리스도' 개념이다. 그는 같은 이름의 책에서 프란치스칸 신학과 신비주의를 결합해 그리스도론을 발전시킨다.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전능한 그리스도라는 비전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가 성취되고, 육화는 물질의 그리스도화를 통해 그 정점에 이른다. 내가 보기에 이 비전은 그리스도를 우주 발전의 오메가 지점으로 보는 테야르의 가르침뿐 아니라 카를 라너의 유명한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과도 조화를 이룬다. 우리는 세례를 받은 사람이든 아니든, 신앙인이든 비신앙인이든 간에 모든 사람에게서 그리스도를 만난다. 라너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그 인간성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성취하시는 인간의 신화神化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의 신화는 특히 동방 그리스도교의 신학과 영성의 특징이다. 게다가 이 ‘성탄의 신비’를 서방 가톨릭 전례의 모든 미사에서도 사제가 선포한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리처드 로어는 그리스도께서 만물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역사와 모든 인간의 삶이 다다를 신비로운 종말론적 목적지로 이해하게 되면 제2, 제3의 보편적 교회일치운동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다른 종교들이 또 비중고적이지만 영성적인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 및 이슬람과의 대화에서는 우리의 신앙이 인간 예수를 숭배하는 이교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다. 인간 예수를 ‘두 번째 신’인 양 숭배하는 것은 한 분 하느님 신앙의 순수성을 위협한다. 세속적 인본주의와 대화에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존경의 신비로운 깊이를 다시금 드러낼 수 있다. 비종교적 인본주의와의 관계가 단순히 피상적인 정략적 동맹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 관계를 신학적 • 철학적으로 성찰해야 하고, 같이 숙고하면서 무르익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인간 이란 무엇인가?"라는 절대 쉽지 않은 대단히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공동으로 찾는 데 좀 더 뜻 깊은 공헌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살펴보자. 교회와 그 신앙은 부활 신앙이어야만 그리스도교적이라 할 수 있다. 그분은 돌아가셨다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신앙의 형태는 많고 다양하다. 개인적 차원 (단순한 ‘부모들의 유산’으로서 우리의 어린 시절의 믿음, 개종자들의 처음 열정)의 신앙도 있고, 교회 역사의 일부로서 집단적 차원의 신앙도 있다. 이들 형태는 언젠가 사라져야 한다. 이따금 신앙인은 익숙한 신앙 형태가 사라질 때, 하느님이 자기를 버렸다고 느낄 때 성금요일의 암흑 속을 지나간다. 하지만 이 어두운 밤들(개인적인 신앙이 시험대에 오른 순간일 수도 있고, 역사에서 신앙이 집단으로 겪는 밤들일 수 있다)을 버텨 내는 사람은 조만간 부활 아침의 빛, 즉 신앙의 변화를 체험할 수 있다.

 부활 사건에는 사도신경의 "지옥에 내려가시어"라는 중요한 문장으로 표현된 신비도 포함되어 있다. 수난사에서 예수님은 먼저 인간의 잔혹함과 폭력의 지옥으로 내려가시고, 그다음에는 더 깊은 지옥, 고립무원의 지옥, 하느님 당신에게서 버림을 받은 지옥으로 내 려가신다. 그리스도의 상처에 대한 존경은 성금요일의 대중 신심, 특히 프란치스칸 영성에 속한다. 하지만 우리는 가장 깊은 상처, 고통으로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어서 외친 그 마음의 상처를 잊어서는 안 된다.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사람들의 고통과 불행 속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상처를 만진다고 한다면, 많은 이가 창에 찔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가는 신앙 의 어둠 속에서 이 상처를 어루만지는 셈이다. 그 상처가 없는 부할 이야기는 완전하지 못할 것이다. 복음 사가 중 오직 두 사람만이 이 외침을 과감히 인용할 수 있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빛으로 가득 차 있다. 요한은 십자가를 이미 파스카적 승리와 연결하여 수난을 이해한다.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제 다 이루었다.” 그러나 많은 이의 삶에서 이 상처는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채로 드러나 있다. 고통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두려운 일이지만, 우리의 신앙도 십자가의 어둠과 부할 전야의 고요와 침묵으로 내려가지 않으려고 한다면, 완전하지 않고 진정 그리스도교적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느님의 죽음'으로 많은 명석한 신학, 철학 논문과 신비주의 시의 주제가 되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신심 깊은 사람들이 성금요일 하느님의 무덤을 묵상할 때, 그들도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의 죽음’에 대하여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우리는 예수님이 지옥으로 내려가신 의미를 형상화한 것을 비잔틴 이콘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지옥에서 춤을 추듯 성큼성큼 죽은 이들의 행렬을 이끌고 걸어 나오신다. 나는 늘 이 이콘 앞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속 좁은 신앙 때문에 수백 년 동안 지옥으로 떨어진 사람들, 즉 '다른 신앙'을 가진 모든 인류를 구원의 빛으로 인도하신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지옥을 지나가신 뒤 지옥이 텅 빈 채로 남아 있기를 희망하는 것을 금지하는 독단적 교리는 정말 없다.

 이 장의 원래 제목을 '지옥의 예수님'으로 정했다가 비겁하게 다시 지웠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지옥에 내려가시어'란 문장이 우리 신앙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믿으며, 예수님이 골고타의 정오의 어둠 속에서 소리쳤던 버림받은 그 경험, 우리 세상에서 정신적 • 영적으로 고통받는 많은 이들이 나누고 있는 그 경험이 포함된 정오의 암흑을 거쳐야 그리스도교의 오후로 넘어간다고 굳게 믿는다.

 

 살아 있는 그리스도파는 움직이는 중이며, 발생하고 있고, 되어 가고 있으며, 매번 미완성으로 여전히 종말론적 완성으로 가는 중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참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 변화(‘메타노이아’ metanoia)가 중요하다. 나는 이 변화와 관련해 오순절파 교회에서 '새로 태어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나, 회심을 단지 마음의 변화나 '도덕적 개선'으로 이해하는 사람들과는 견해가 좀 다르다. 이 모든 것들은 기껏해야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에서 보이는 일부 양상일 따름이다.

이는 회심할 때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현상에 가깝고, 회심의 결과이다. 그러나 회심 자체가 이런 것들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신앙의 삶은 신조에 대한 확신이나 도덕, '제2의 탄생'이라는 감정적 체험으로 환원될 수 없다. 회심, 곧 메타노이아는 한 인간의 완전한 실존적 변화 이다.

 그리스도는 어떤 '교리'를 제공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 및 타인과의 관계, 사회 및 자연과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 등 우리의 모든 관계를 포함한 인간의 실존 방식과 우리 인간성을 부단히 변화시킬 방법을 알려 주시러 오셨다. 이것이 그의 '가르침'이다. '무엇의' 교의, 이론, 교리가 아니라 '무엇을' 배우는 과정이나 익히는 과정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교육 방식이고 치유 방식이다. 그분의 '새로운 가르침'은 '권위 있는 가르침'이며 이 권위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의 동기와 목표, 삶의 근본적인 방안을 바꿀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예수님은 랍비, 철학자, 단순히 ‘도덕 스승’이라기보다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삶의 스승’(Lebemeister)이다. 예수님이 가르치는 신앙을 배우고, 회심에 대한 요구에 실존적으로 응답하는 것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부활 사건의 요소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시체의 되살아남'으로 축소될 수 없고, 신앙인의 부활이 단지 죽음 이후의 일로 축소될 수 없다. 바오로 사도는 신앙인의 부활을 지금 여기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삶이라고 말한 다. 부활, 즉 예수님의 부활과 신앙인의 부활(회심), 교회의 부활(개혁과 쇄신)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며, 지나간 일의 반복도 아니다. 부활은 항상 급진적인 변화이다.

 마태오복음에서 묘사된 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가 익명으로 역사와 우리 삶을 지나가고, 종말론적 미래의 문턱에서야 비로소 그 간 수많은 변장을 벗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그렇다. 가난 한 사람들, 헐벗은 사람들, 아픈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나였다! 이미 우리 길에서 만나는 궁핍한 사람들에게서 이미 파루시아, 즉 그분의 재림인 동시에 우리에 대한 심판이 일어나고 있다. 마지막 위기, 최후의 심판은 이 숨겨진 과정의 완성일 뿐이다. 우리 삶과 교회의 역사는 숨은 그리스도를 찾는 모험이다. 고통받는 이, 착취당하는 이, 박해받는 이의 부르짖음에 귀를 닫지 말자. 우리 세상의 상처와 고통에 눈을 감지 말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마음을 단지 말자. 그렇지 않으면, 그들 안에서 예수님의 목소리를 놓칠지도 모른다. 그들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 수 있다.

 부활은 부활 성야 다음 날 아침에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계속되는 창조(creatio continua) 와 마찬가지로 계속되는 부활(resurretio continua)에 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죽음, 죄, 두려움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는 역사에서, 교회의 신앙에서, 개개인의 인생사에서 계속된다. 부 활하신 분의 숨겨진 삶(예수님은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다)은 개인의 회심이나 교회 개혁의 사건들 속에서 수면으로 샘솟는 지하수와 같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도한다는 것은 눈을 감고 하느님이 지금 세상을 창조하고 계심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만 덧붙이고 싶다.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마음을 열고 예수님이 지금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고 계심을 깨닫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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