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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3

3. 시대의 표징 읽기

 이 장에서는 주로 방법론적 문제, 특히 역사와 문화에 대한 신앙의 관계를 다루려 한다. 나는 이 책에서 적용한 신학적 접근법을 카이롤로지Kairologie(결정적 시간론)라고 부른다. 나는 이 단어를 가지고 역사에서, 특히 사회적 • 문화적 패러다임 전환들이 일어나는 위기의 순간들에서 신앙 체험의 신학적 해석학을 특징짓고자 한다.

나는 위기들을 기회의 시간, 무르익은 순간인 카이로스kairos라고 생각한다. 그리스어에는 시간과 관계된 다른 두 관점을 나타내는 두 가지 단어가 있다. 크로노스chronos는 양적인 시간으로서 시, 일, 년의 순서, 즉 우리 시계와 달력으로 측정 가능한 시간의 흐름을 가리킨다. 이와 달리 카이로스는 질적인 시간을 가리키는 단어로 기회, 무언가를 위한 때, 무르익은 때, 엄습의 순간이다. 한 번뿐이라며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순간의 도래이자 출현이기에, 그 의미를 이해하여야 하며 그 요구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결정의 때, 그 의미를 이해하여야 하며 그 요구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결정의 때, 지체하거나 허비해서는 안 되는 결정적 순간이다. 구약의 코헬렛에서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신다. “때가 되었다!” 예수님은 동시대 사람들이 다음날 날씨는 예측할 수 있으면서도, 그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하고 풀이하려 들지도 않는다고 비난하신다.

 '시대의 표징 (ta semeia ton kairon)을 분별하고 풀이하는 것은 성경과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예언자들의 사명이었다. 성경의 예언자들은 미래를 예언하는 점쟁이나 미래학자가 아니다. 그들은 주로 하느님의 교육자로서 현재 사건을 풀이하는 해석학자였다. 카이롤로지는 예수님이 교회에 맡긴 이런 예언자적 사명을 신봉한다. 교회는 현대 철학, 특히 현상학과 해석학 덕분에 신학이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된 수단들을 이용해 그 사명을 수행한다.

 나는 전통적 형이상학 틀 안에서 움직이는 신학은 이런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카이롤로지는 존재론적 신학, 즉 성경의 역사 속 하느님을 그리스의 움직이지 않는 최초 동인動因과 혼동하는 형이상학적 '신에 대한 학문'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나는 신의 존재, 본질, 속성에 대한 의심이나 신의 실조에 대한 증명들은 전적으로 제쳐 놓고자 한다(‘괄호 안에 넣어둔다’). ‘하느님과 그분의 살아 계심’이란 제목의 신학적 논문들이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살아 계심, 우리 역사 안에서 살아 계심을 다루지 않았다면, 그 논문들은 늘 신빙성이 없다고 여겼다.

 그리스도교에서 예배는 인간에 대한 봉사와 분리될 수 없으며, 하느님에 대한 지식은 세상과 인간에 대한 지식과 분리될 수 없다. 신학이 인간에 대한 봉사의 필수 요소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려면 신앙의 경험, 즉 인간 삶과 사회에서 그 현존을 반드시 반영하는 맥락 신학이어야 한다. 신학은 문화와 역사적 변환의 맥락에서, 즉 인간, 문화, 사회, 역사를 다루는 여러 학문과 대화하며 신앙을 성찰해야 한다.

 카이롤로지는 '순수' 신학이라기보다 (사회학과 신학이 상호 침투하는) 사회신학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종교에 관해 신학자, 철학자, 종교사회학자가 학제적으로 협력한 국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한 경험으로 볼 때, 오늘날 신학의 지적 연구가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려면 현실에 관상적으로 접근해야 할 뿐 아니라 현대 철학과 사회 과학들과 성실한 대화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신학과 사회학의 관점이 분리되어서 어느 한쪽에 치우친다면, 복잡하고 변화하는 종교현상을 이해할 수 없다. 신학자와 사회학자는 서로에 대한 선입견을 극복하고, 상대방의 언어를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해서 독자적 관점, 독자적 경험을 상호 보완하여 다른 쪽으로 확장해 나가야 한다. 중교를 바라보는 두 분야의 맹점 때문에 과거에 피상적이고 이념적으로 왜곡된 종교 이론이 수없이 생겼다.

 신학의 관점과 사회과학의 관점을 서로 연결하려는 노력을 계속 기울여야 한다. 카이롤로지는 정치신학, 해방신학, 가톨릭 사회교리. 개신교 사회신학과 같은 연관 분야에서 새로운 자극과 영감을 꾸준히 새로 마련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신학은 신앙을 섬기는 하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은 문화와 사회에서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신앙을 이해하고 신앙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신앙을 맥락으로 이해하고 그 맥락도 연구해야 한다.

 

 나는 인간의 경험, 인간이 겪는 역사적 경험이 하느님 계시의 장소라고 바라보는 미셸 드 세르토의 신학적 개념을 지지한다. 카이롤로지는 사회학자, 역사학자, 정치학자, 문화인류학자, 사회심리학자의 분석에 시대에 대한 영적 진단을 덧붙인다. 시대의 문화적·도덕적 환경에서 믿음, 희망, 사랑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 묻는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아주 파격적인 방식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제 전통적 그리스도교가 이런 ‘향주적’을 더는 독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당신 선물을 온전히 자유롭게 무제한으로 나눠 주신다는 사실을 가르쳤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다. 믿음, 희망, 사랑은 교회의 제도적 울타리 너머에서 그 독자적 생명을 지니고 있지만, 교회가 아닌 맥락에서 매우 크게 변화하면서 새로운 이름까지 붙는다.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보물들이 이렇게 광범위하게 확산하고 해방되는 현상을 교회는 긍정 적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아니면 통제력을 상실했다고 근심과 걱정으로 받아들어야 할까? 아마도 세속 문화에서 변형된 '그리스도교적 가치들'의 출현은 새로운 교회론 형성에, 즉 교회 자신을 좀 더 광범위하고 심층적으로 이해하려는 데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신학적 교회관은 역사에서 이미 실현된 형태를 사회학적으로 서술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풍부해야 한다. 신학적 관점에서 교회는 사회 기관들이나 이해 집단 그 이상이다. 교회는 하나의 성사, 즉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의 일치 상징이자 효과적 표징(signum efficiens)이다. 교회는 여기에 아직 존재하지 않은 것, 역사 한가운데서 풍만하게 기대할 수 없는 것을 효과적으로 지적해야 한다. 교회는 역사의 이런 예고될 수 있는 정점, 그와 동시에 교회 존재 의미의 충족을 종말론적 (즉, 역사의 지평을 초월하는) 목표로 이해한다. 따라서 '경계 없는 교회'(진정한 의미의 가톨릭 보편 교회)라는 비전은 역사 안에 설 자리 ('토포스'topos)가 없다는 의미에서 역사 차원에서 유토피아적(u-topisch)이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미 오메가 지점을 지향한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이 '유토피아'가 영감이 되고 동기가 된다면 그것은 중요하고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비전에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경고를 덧붙여야만 한다. 그 비전이 교회와 그 인식의 어떤 형태(신학의 어떤 특정한 입장과 형식)가 완벽하다고 선언함으로써 교회의 발전과 개혁들을 저해할 수 도 있는 이데올로기가 되어선 안 된다. 역사를 통틀어 ‘유토피아를 이데올로기화’ 하려는 불행한 시도와 지상 천국을 만들려는 천년왕국의 노력이 수없이 반복되었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의 이단적 형태나 공산주의라는 세속적 이데올로기가 등장했는데, 이런 의미에서 공산주의도 그리스도교 이단 중 하나이다. 앞서 언급한 교회와 신학의 어떤 특정한 상태가 최종적 모습이라고 선언하려는 그리스도교 승리주의의 시도들도 불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전 저서들에서 지상의 호전적인 교회(ecclesia militans)와 천상 승리의 교회(ecclesia triumphans) 사이의 종말론적 차이를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승리주의와 호전적 종교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나는 '그리스도교의 가톨릭 보편성'을 차츰 실현하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즉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의 개방성을 확대하고 심화시키는 길을 제시하겠다.

 

 나는 카이롤로지를 공공 신학(public theology)의 한 요소로 본다. 그것은 신학 및 학술 커뮤니티와 교회 환경을 벗어나서도 이해될 수 있는 언어로 자기 의사를 표명할 의무가 있다. 공공 신학에서 공공장소는 연구의 대상일 뿐 아니라 발언의 수신자이기도 하다. 많은 경우 공공 신학자들이 사회 활동, 시민주도 운동, 저항운동에 직접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회적 실천은 신앙에 의해 동기 부여되고, 그들에 의해 신학적으로 성찰된다. 공공 신학자들은 사회와 문화 영역의 공공생활의 사건들에 관하여 전문 지식으로 신빙성 있고 이해되게끔 의사 표명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성경 예언자들의 영감을 받아 변화하는 세상에서 역사 속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인식한다.

 역사와 역사성의 강조는 현대 신학의 기본 중 기본이다. 옛 신학은 하느님 계시를 두 권의 책인 성경과 자연(창조)을 참조했다. 하느님을 찾고자 한다면, 성경과 자연의 책에서 그분에 관한 내용을 읽으라고 했다. 성경 이전의 신화와 이교에서는 신의 현현, 즉 거룩함의 계시 장소가 주로 자연과 그 순환적 특성, 동일한 것의 영원한 반복 이지만, 성경에서 하느님의 현현은 주로 역사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성경과 자연(창조)에 이어 '제3의 책'일까?

 성경의 하느님은 세상의 창조주이자 역사의 주님이시다. 자연(창조)과 역사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자연은 항구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이고, 인간의 역사는 이 과정의 특별한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항구적으로 계속되는 하느님의 '가르침'인 창조가 바로 세상이며, 성경의 관점에서는 발전하고 변화될 세상이다. 창조는 계속되는 과정, 즉 계속되는 창조(creatio continua)이고, 인간의 역사와 문화는 계속되는 창조의 본질적 요소이다. 창세기 시작에 나오는 창조에 관한 성경 문학은 거룩한 안식일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이 줄거리에 성경 텍스트의 신화적 • 시적 언어로 특정 시간 개념을 부여하지만, 창조를 하나의 역사, 시간 속의 하나의 줄거리로 묘사한다. 생물학에서 역사를 만들고, 역사를 생물학에 투영하는 창조적 아이디어는 다윈 덕분으로, 아마 그도 헤겔에게서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 덕택에 우리는 자연을 인류사에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발전으로서 이해하게 되었다. 테야르 드 샤르댕과 과정 신학은 진화론에 신학적 해석을 제공했고, 그리스도교 신학과 영성을 위한 고무적인 잠재력을 과시했다.

 자연과 역사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성경도 역사에서 분리될 수 없다. 역사는 성경 옆에 나란히 존재하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역사에 관한 서사이자 역사의 산물이다. 역사의 증인이자 공동 창조주이기도 하다. 성경 이야기는 역사 속 문화적 기억으로 생명을 지니고, 역사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하며, 이를 통해 역사를 함께 만들어 나간다. 또한 개인들의 인생 이야기, 즉 신앙인 의 ‘개인사’도 함께 형성한다. 신앙은 개방성을 통해 성경 이야기들 이 인간의 삶으로 들어가 그 삶을 변화시킨다.

 트리엔트공의회는 성서聖書와 성전聖傳을 하느님 계시의 두 원천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성경은 거룩한 전승의 한 요소이고, 성경에는 성경의 생성 역사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항구적으로 이어져 온 성경의 해석, 교회와 문화에서 성경의 삶도 포함된다. 이런 맥락에서 만 성경은 우리에게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하느님은 주로 일회성 역사적 사건들에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그 사건들에 관해 서술하고 해석하는 이야기들 안에서 드러내신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는 역사에서 나타나시고, 사건들에서 당신 백성에게 하신 말씀을 듣도록 하시며, 사화와 이야기들에서 당신 말씀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전달하도록 하신다. 역사를 해석하고, 사건들에서 경험을 쌓고, 경험의 전달과 전승에서 문화를 만드는 이야기들 속에서 역사는 비로소 인간의 역사가 된다. 해석할 이야기들이 없다면 그 역사는 말이 없는 것과 같다.

 성경의 하느님은 '역사의 이면'에 계시지 않는다. 즉 무대 뒤에 서 인간을 꼭두각시 인형을 움직이는 것처럼 다루고 계시는 분이 아니다. 창조주는 창조의 결과물, 자연, 역사에 현존해 계시면서 역사의 몸통에 결합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구체화하신다. 그분은 인간의 역사와 인간의 문화에서도 현존해 계신다. 그리스도교는 역사 속에서, 인류 역사뿐 아니라 창조의 전 과정에서 하느님 현존의 궁극적 형태를 육화, 곧 나자렛 예수의 인격 및 그분의 역사라고 설명한다.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그분 안에서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긍정이자 '아멘'으로서 인류와 인간 역사의 구원과 해방과 치유를 완성하셨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영도자이자 완성자"라고 표현한다.

 신앙은 창조주와 그분 업적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긍정'이며, 하느님과 인간의 동반자적 계약 관계의 표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신앙 안에서 인간 자유와 존엄성의 궁극적인 실현을 볼 수 있다. 즉, 신앙으로 모든 실재의 전체요. 깊이이신 하느님과 의식적이고도 성찰적인 대화 관계가 가능해진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포괄하고 모든 것을 초월하는 전체이며, 자연과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맥락이다. 신앙을 통해 사람은 그 맥락을 발견하고 신앙 안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새롭게 이해한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신학은 규정된 신앙 조항들을 주로 이용해 왔다. 하지만 오늘날 신학에 더 풍부한 자료들이 있다. 바로 살아있는 신앙 체험, 영성, 신비주의이며, 영적 삶의 중요한 표현인 예술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발전하고 있다. 우리는 인류 역사의 핵심 요소가 문화, 즉 사람들이 의미를 찾고, 자신과 역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므로 어디선가 시대의 표징을 찾아야만 한다면, 바로 문화에서 찾아야 한다. 문화가 우리의 절대적인 관심사, 즉 궁극적인 관심사 (ultimate concern)를 포함해 의미를 찾는 매개체라면, 문화를 신학의 장소(lcus thologicus), 신학 연구의 합당한 대상으로서 여길 수 있다.

 인간들은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이행할 때뿐 아니라 자연과 역사 속의 모든 특수한 존재 형태를 통해서도 역사와 주변 환경의 공동 창조자다. 그들의 영적 • 정신적 삶이 본질적으로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미를 묻고, 자기 존재를 (문화를 통해) 이해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초월하며, 자신들에게 점차 열리는 기회를 발견하고 성취한다. 그들은 창의력으로 창조주에게 부여 받은 소명을 달성하고, 하느님과의 유사함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듯 심층 신학에 기초가 되고 영감을 준다. 왜냐하면 특히 예술에서 우리는 위대한 꿈들을 만나며. 그 꿈들에서, 또 그 꿈들을 통해 개인 뿐 아니라 전 세대의 의미 있는 (이따금 무의식적이고 알려진 것 바깥에 놓인) 갈망과 열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의 죽음을 선포한 광인狂人에 대한 니체의 이야기나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신화 재해석을 생각해 보면, 이런 위대한 꿈들은 문화의 잠재적 동력으로서 작용했다. 그것들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움직인 힘들을 표현하는 강력한 이미지들이었다. 예컨대 현대 무신론의 뿌리를 이해하려 한다면 그러한 꿈들을 무시할 수 있을까? 꿈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직업 인간에게 말씀하신다는 성경(또한 이웃 종교들)의 증언들을 무시 할 수 있을까?

 신앙, 사랑, 예술적 창조물 사이에는 내재적 유사성이 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세상을 고무하는 그런 열정(passio)과 에너지를 만날 수 있다. 낭만주의는 종교적 경일, 사랑의 걱정, 예술에 대한 일정에 존재하는 에로스가 어떤 신성함의 성질을 지니고 있으며, 두렵고 매혹적인 소비(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라는 사실을 잘 포착했다, 인간은 사랑과 신앙에서와 비슷하게 예술적 창조물에서 모든 것을 내어 주는 동시에 얻고 받아들인다. 선물을 주는 것일 뿐 아니라 이해하며 받는 것, 즉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일품의 초원이며 자기 개방이다.

 문화, 특히 종교적 영역에서도 피상적인 통속 소비물과 구별되는 예술이 의미를 찾는 인간의 표현인 한, 이런 갈망, 개방, 마음의 불안(inquietas cordis) 속에 하느님이 계신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단어로 표현하자면) 하느님이 일으킨 그 불안이 종말론적 최종 목표에 도달하기도 전에 이미 여기 이 땅에 계신다. 나는 예수님의 케노시스(자기비움) 안에 충만히 현시된 하느님은 너무나 겸손하시어 인간의 개방, 갈망, 희망의 표현들 속에 익명으로 계시며. 심지어 그분을 알지 못 해서 이름 붙여지지 않은 곳에도 계신다고 믿는다. 세속 문화가 인간 적으로 진실하다면 거기에도 계신다.

 하느님과 인간 문화의 관계에 관련해서도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말을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 볼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보는 눈과 하느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눈은 같은 눈이다. 비슷한 생각을 정교회의 이콘 신학과 이콘을 이용한 묵상의 실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이콘을 쓰거나’ (동방 정교회 전통은 이콘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쓴다고 표현한다. 이콘 제작은 예술보다는 기도의 형태로 여겨지며, 하느님께서 이콘 제작자의 손을 인도하신다고 믿는다_옮긴이), 이콘 앞에서 묵상할 때, 우리의 창작 과정과 그 결실인 이미지를 통하여 하느님을 바라보며, 동시에 하느님이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미지 앞에 서서 이미지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 이 체험을 근거로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기도의 신학을 세웠다. 즉 기도와 관상 속에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시선을 체험한다. 특히 질문을 던지고 사색하는 인간을 바라보는 그분의 시선을 경험한다. 하느님 시선의 빛 속에서 인간은 하느님께 내맡기고 점점 더 그 자신이 되어 간다. 하느님께서 “네가 너의 것이 되면, 나는 너의 것이 되리라”라고 인간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인간존재를 받아들이고, 인간이 하느님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신비가 '순수 하고 분리되지 않은 채' 이뤄진다.

 인간들은 역사와 주변 환경, 자연의 공동 창조자이며, 인간의 활동, 과학기술의 매력적인 가능성으로 증폭된 힘을 통해서만 아니라, 삶에 대한 관상적 접근, 절대자의 신비에 대한 개방성을 통하여 공동 창조자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독자, 관객, 시청자는 문학, 조형예술, 음악 작품의 공동 창작자이다. 예술 작품은 창작자의 산물일 뿐 아니라, 작가 외에 다른 참가자들, 즉 독자, 관객, 시청자가 필수불가결하게 만나는 사건이다. 예술 작품은 감동한 사람들이 지각함으로써 생명을 지니고 그 최종적 형태를 얻는다. 그 과정을 통해 감동 한 사람들도 공동 창작자이자 완성을 시킨 이가 된다. 창조 과정이 인류 역사에서 인간 삶의 자유 속에서 계속되고 완성되는 것과 비슷하게 예술 작품은 자신을 체험하는 사람들에게서 생명을 얻고 최종 적인 특징을 지닌다. 예술은 소통의 예술을 요구하고, 그 자체가 해석을 요구하는 해석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삶을 관상적으로 접근하면 인간 삶은 독백에서 대화로 변화한다. 대화에서는 인간의 자기 주장, 자연의 기술 적 변환, 권력에 의한 사회 조작 그 이상의 것이 관건이다. 즉 세계와 역사에 대한 공학적 접근이 아닌 무언가가 중요하다. 침묵을 지키고, 경청하며,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진정한 답을 찾으려고 끈질기게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을 기술적으로 조작하는 접근 방법이 관상적 접근 방법으로 수정되지 않는다면 인간 세계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믿음, 희망, 사랑은 인간 세계에서 문화를 통하여 구체화된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신성과 인성이 상호 교차하는 상호 내재 (perichoresis)를 위한 환경이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통해 하느님은 인간의 문화 속에 현존하신다. 하지만 문화. 특히 현대 예술을 신화 적으로 해석할 때 우리 세계에서 하느님은,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용어를 빌린다면, 반대되는(sub contrario) 표징으로 재현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부조리 연극뿐 아니라 주로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자와 청교도를 자극하고 불쾌함을 일으키는 많은 불경스러운 동시대 예술 작품들은 신학적으로 신중하게 해석해야 한 가치가 있다. 신의 부재, 세상의 불가해함, 인간 운명의 비극에 대한 체험이 어느 순간에 바로 하느님을 기다리고, 하느님을 목마르게 갈망하는 동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 당신은 이런 갈망을 일깨우시고 어떤 방식으로 그 안에 이미 현존해 계신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응답으로서뿐 아니라 질문으로서도 오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부분적인 응답을 초원하고 매번 다시 새로운 의문을 여는 갈망 속에서 이해하려 오신다. 그분은 새로 운 탐구를 하도록 고무하시며, 우리 존재에 순례자의 특성을 각인하신다. "나는 진리다"라고만 말해도 된 그분은 동시에 "길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길이 아닌 진리는 죽은 것이다. 믿음으로써 인간은 길과 목표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하나인 하느님께 영원히 순례를 떠난다.

 

만약 우리가 역사적 사건들의 의미, 시대의 표징을 찾는다면, 문화 심층적 차원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사건들이 예고되거나 울려 퍼지는 예술이 예언적인 꿈들에서 찾을 수 있다. 꿈은 자기만의 언어와 논리를 가지고 있고, 적절한 해석적 접근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런 신적 언어의 세계에 고전적·형이상학적 신학 방법들을 이용해서는 들어갈 수 없다. 예술 세계의 이미지들과 화두들을 묵상하며 해석하던 학습 방식을 일상적인 역설과 수수께끼를 곰곰이 생각할 때에 적용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시대에 영적·정신적으로 진단하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신학적 미학과 문화의 신학, 특히 (현대 대중 소설과 영화에 명상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포함한) 예술 신학은 오늘날 서양 신학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나는 니체의 『즐거운 지식』에 등장하는 광인에 관해 언급한 앞장(신의 죽음에 대한 유명한 발언이 나오는 장면)을 매번 묵상할 때마다, 고대 부족들이 개인적인 작은 꿈과 전체 부족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큰 꿈을 구별했다는 융의 말을 떠올린다. 망각으로 내몰린 신에 대한 집단적 살해와 관련된 니체의 이야기는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 전체 부족을 위한 위대한 꿈의 메시지였다! 니체는 당시 자기 말을 들을 “귀가 자라지 않았다”라는 사실을 잘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20세기와 21세기 사건들로 그를 이해하고, 매번 재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술은 때때로 명백하고 때로는 잠재적인 종교적 내용을 지닌 예언적 꿈이 끊이지 않는 보물창고여서 우리를 신학적 해석으로 초대한다. 예를 들어,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카프카의 『소송』에서 대심문관의 전설을, 오웰의 장편소설 『1984』에서 전체국가의 환상을 알아차린다. 문학, 영화, 조형예술의 다른 많은 작품은 신학적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한때 성직자로 활동했던) 20세기 대표적 문학비평가 중 한 사람인 노스럽 프라이는 그리스 디오니소스의 의례에서 드라마가 탄생한 순간 인간의 의식에 결정된 변동이 일어났으며. “신화에서 문학으로 점차적인 이동”이 일어났다고 썼다. 아마도 문학이나 예술 전반의 상징들에 대한 관상적 접근과 예술 작품에 대한 신학적 해석학은 우리와 종교 사이의 관계에 중대한 변동을 낳을 수 있다. 즉 세속화된 세계의 아이들에게 종교적 경험을 이해하는 새로운 (탈세속적) 접근을 열어 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신아의 치유력을 새로 일깨우고, 내부적으로 분열된 절름발이 교회를 그 야전병원으로 만들고 민중의 빛이 되게 할 수 있을까? 교회와 종교를 게토, 폐쇄되고 요새화된 벙커, 철 지난 과거 신조들로 장식된 무덤, 진정제나 수면제를 소비하는 사람들을 이한 개인 정원으로 만들려는 유혹에 어떻게 맞설 수 있을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신뢰를 잃고, 자유 좌파들에 의해 단호히 배격당하고 외면된 그리스도교가 다양한 목소리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상호 존중과 소통, 가치 공유의 도덕적 풍토로 바꿀 수 있는 정치 문화를 형성하도록 어떻게 북돋울 수 있을까?

나는 카이올로직 그저 가치가 없는 분석이나 진단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기를 바란다. 대부분 시간을 학생들을 가르치고 사목하는데 보낸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미 제기한 질문에 대답하는 데 보탬이 되면 좋겠다. 막 시작된 새로운 시대가 동반한 도전들에 대처하기 위해 (어떤 종교가 아니라) 어떤 유형의 신앙이 다가올 세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현재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이 책에서 그리스도교의 오후라고 지칭한 시대에 사람들을 위한 버팀목이 될 수 있도록 교회, 신학, 영성이 어떤 형태의 변화를 겪어 나가야 하는지 대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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