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강
14. 성총
요안의 이야기를 통해 본, 이해하는 마음에서 가장 매혹당하고 가장 아름답게 느낀 것은 하느님의 성초의 작용에 대한 통찰력이다. 성총은 사랑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성총이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의 관계이다. 더 나아가 서 성총은 인간의 본성에 스며들어 이를 향상시킨다. 이 작용은 인간 본성 위에 무엇을 만들어 붙이는 것이 아니고, 인간 본성과 더불어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말미암아 대인 관계에 있어서의 사랑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하느님의 성총에 대하여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신학에서 우리는 성총을 여러 종류로 분류시킴을 안다.
즉, 상존(常存), 조력(助力), 작용(作用), 가료(加療), 조명(照明), 유효(有效) 성총 등. 그리나, 요안이 자기와 같은 다른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서와같이 사랑이 사람들에게 된 하는 바를 관찰하면, 성총의 종류는 단지 하나로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바로 조건 없는 사랑이다. 여러분은 아마도 성총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시겠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실제로 하나이고 동일한 작용이다.
그것들이 무엇인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가에 의해서, 혹은 그것들의 효력에 의해서 구별되어 질 수도 있다. 만일 성총이 이해하고, 자유를 주고, 구원하고, 믿어주고, 조건 없는 사랑을 쏟아 주는 것이라면, 이를 믿을 만한 이유가 있으니, 즉 우리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묘사한 것이 바로 성총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인 성총이 여러 가지 효과에 의해서 어떻게 구별되는가를 알아보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요안의 이야기에 비추어 사랑을 다시 음미하기 전에 성총에 관해서 우리가 아는 바를 제시하고자 한다. 성총은 사랑이며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삼위일체의 내적 생명은 사랑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니라. 그런즉 사랑에 머무는 자는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 또한 저안에 머무르시느니라.”(요안1서 4,16-17)
성총은 “하느님의 생명에의 참여”라고 정의(定議)된다. 성총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말과 꼭 같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사랑은 본질상 구속적이고, 창조적이며 자비적이고 동정적이며,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우리는 사랑이 전혀 조건 없다는 것과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안다. 이 사랑은 우리가 그분에게 무엇을 했느냐에 대한 보답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해해주고, 믿어주며, 자유를 주는 사랑이라는 것을 안다.
이제 우리는 요안을 도와준 이해하는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이런 사랑이 들어 있는가 살펴보자. 우선 무엇보다도 이 지도자의 이해하는 사랑, 이해하는 이런 마음은 창조적이며, 생명을 주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요안을 아낌없이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해 주어서 새사람이 되게 하였으며, 그에게 새 생명을 주었고, 그의 인격을 되찾게 하였으며, 사랑을 통해서 어린아이로 다시 나도록 하였다.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보아, 상존성총의 효과가 아니고 무엇이라?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우리는 조건 없는 사랑의 대인 관계의 효과에서 조력(助力) 성총을 찾아보자.
이해하는 마음은 어떠한 강제나 억압도 없이, 요안이 한 사람의 존엄성과 유일성, 그리고, 자유를 존중하면서, 단순히 조건 없는 사랑의 분위기를 마련하여 줌으로써, 그가 자라고 완숙되어 주계서 자기 안에 심어 놓으신 재능을 자유롭게 게 발하고 숨겨진 능력을 끌어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요안은 자기가 받은 사랑을 자유로이 그리고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의 덕행과 사랑의 행위에 발산시켰다. 영신적으로 보아서 이것이 바로 조력 성충이다. 여기에서 사랑은 사랑의 행위를 낳는 힘으로 나타난다.
성총의 다른 형(型)은 가료적(加療的) 성총, 즉 회복시키는 성총이라고 불려진다. 요안에 있어 치료의 효과를 나타낸 조건 없는 사랑은 방비책을 무너뜨리고, 고통스러운 불안, 욕구불만(欲求不滿), 공포, 갈등 따위를 제거하여 주었다. 또한 우리는 조명(照明) 성총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 역시 조건 없는 사랑의 작용에 있어서의 다른 일면(面)이다. 이해하는 마음은 요안으로 하여금 진선미(眞善美)를 탐구하는 데 있어서,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자기 자신의 지능을 적용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것은 권위주의적 방법으로 지식을 주입시키거나 강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요안이 자기 내부로부터 성장하도록 도와주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매개물로 하여) 내부로부터 영감(靈感)을 주시는 방법이다.
피터·프란슨이 성총에 대하여 쓰신 바를 여기에 인용해 보고자 한다. “햇빛은 프리즘을 통해서 무지개의 화려한 여러 색깔을 정확한 각도로 발산시킨다. 이들 여러 색깔들은 그들 자신의 광채와 독특한 광휘를 가지지만. 같은 실재(實在)의 일면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안에 사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성총도 여러 가지가 아니고, 다만 하나의 실재일 따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쿠르실로·송의 “색깔의 찬미”란 서정시가 여기에 아주 알맞는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 안에는 아름답고 환희에 찬 봄의 색깔을 찬미하는 노래들로 꽉 차 있다. 지저귀는 산새들과 밝고 아름답고 영롱한 무지개의 색깔을 노래하고, 수탉과 암탉의 정겨운 소리, 무엇보다도 의좋은 형제적 사랑을 예찬하였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적 사랑의 표현처럼 보여지며, 하느님적 사랑의 한 가지 색깔처럼 보여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