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강
12. 조건 없는 사랑의 존재 여부
어떤 사람들은 조건 없는 사랑을 실제로 실천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전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 존재까지도 의심한다.
사실로, 이러한 사랑의 존재 여부를 중명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학자들 간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며, 토론의 대상이 되고 있다. 크리스챤이 아닌 외교인들이 이익 없이 누구에게 친절한 대우나 과분한 선물을 받게 된다면, 그들의 마음은 당황해지고 오히려 그러한 사람을 베푸는 사람을 의심하기 쉽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랑을 베풀기도 어렵지만, 받아들이기도 그와 못지않게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좀 더 차분히 가라 앉은 기분으로 사랑의 본질과 특성을 숙고해 보자. 조건 없는 사랑을 분석한다면 신비를 취급하려 드는 것이 아닐까? 사람의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신비성을 띤 사랑을 어떻게 분석할 수 있겠는가? 이는 과학이나 학문의 영역을 뛰어넘은 다른 차원에 속하는 것이 아니냐?
인간의 참된 사랑은 들여다볼 수도 없고, 잴 수도 없으며 달아 볼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확실히 알 수도 없는 것이고, 더군다나 분석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믿을 수만 있는 것이 아닐까? 한 마디로 신비가 아니겠느냐?
인간 사회에서도 목숨을 내건 진정한 모성애가 있고, 참된 의미에서의 희생을 각오한 진실하고 열렬한 이성 간의 사랑이 있다. 여기에도 이해타산적인 동기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진정한 사랑의 특성은 요구가 붙거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참된 사랑의 대인 관계는 하느님적 사랑의 신비가 작용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겠는가?
필자도 진정한 사랑은 성질상 이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좀 더 설명을 가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사랑은 본질상 신비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므로, 존재 증명에 있어서 그 추리가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다.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자.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은 큰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랑은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결과적으로 자기에게 없는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제아무리 또 조건 없이 또 이익 없이 사랑한다 할지라도, 자기의 부족함을 채우고, 자기에게 없었던 것을 얻게 되고, 발전되는 것이다.
어느 점에 매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끌어 당겨지는 것이다. 사랑으로 인간이 더 뛰어난 존재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영원으로부터 완전하시고 부족함이 없으시고, 발전할 여지가 전혀 없으시다.
하느님은 고독하지도 않으시고, 필요로 하는 것도 없으시고, 배고픔도 없고, 완전히 자기 스스로 만족하시고 희열을 느끼신다. 존재하는 그 무엇이나 다 하느님이 이미 차지하시는 것이고, 창조자의 자격으로 만사와 온 인류의 임자가 되신다. 창조하실 본분도 없으시고, 책임도 없으시다.
별들을 이름으로 부르고(별들의 하나하나를 아신다는 뜻) 전지하시고 전능하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보아 무엇을 얻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주는 사랑이다. 뻗쳐 나가는 사랑이요. 외적으로 퍼지는 사랑이다. 없는 가운데서 창조하시는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에도 어떠한 이익이 있지 않겠느냐고 한다면, 다만 외적인 영광을 얻게 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 영광은 하느님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것도 아니고, 필요하기 때문에 꼭 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심으로써 인간들에게 사랑의 보답을 다소 받기는 하시지만, 그러나 이것 역시 하느님의 완성을 위해 보탬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니고, 하느님의 내적 생활에 이익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도 불완전하시다고 할 수밖에 없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자기의 사랑은 뻗어 나가고, 거저 주고, 창조하는 사랑일 뿐 아니라, 인자하고 자비로우며 동정하고 구속하는 사랑임을 증명하시거나 계시하시려고 하신다. 그러므로 아담과 에와로부터 인간에게 악이나 선을 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고, 자유를 막거나 죄에 빠질 것을 미리 방지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유감에 빠져서 죄를 짓고, 말할 수 없이 비참하고 죄스럽고 나약하고 불쌍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인간의 범죄는 하느님께 당신의 사랑이 결국 창조적이고 생명을 주는 사람일 뿐 아니라, 구속하는 사랑이라는 것을 증명할 기회와 베풀어 주실 기회를 제공해 드린 것이다.
우리의 전례 안에 아담의 죄를 성 아우구스티누스께서 「복된 탓」이라고 한 것도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심으로써 영광과 찬미를 받으시도록 우리 선조가 기회를 제공해 드린 셈이 되기 때문이다.
자비로우신 당신의 사랑을 온 인류에게 계시하시고자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인류 구속을 위해서 사람이 되게까지 하시고, 죽기까지 희생하도록 하셨다. 타락한 인간을 무한한 인자로 용서하시고 동정하시며 비참한 처지에 놓인 그들을 건져 주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최상의 기쁨이요 영광(외적 영광)이다.
예수님께서 원수와 죄인들을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사랑에 조건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증명하셨다.
조건 없는 사랑의 존재성과 실천성을 부인하려 드는 사람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절대자이신 하느님만이 조건 없는 사랑을 백 퍼센트로 완전하게 베푸실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
피조물에 불과한 불완전한 우리 인간이 하느님적 사랑인 이 사랑을 백 퍼센트로 실천할 수 있다면, 인간이 바로 하느님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적 사랑을 성총의 작용에 힘입어 불완전한 인간들이 한몫을 받아 불완전하게나마 어느 정도로 실천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에 인간인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신, 세위끼리 서로 사랑하시고 서로 인식하신다. 이로 말미암아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고, 더 이상 채울 것도 없이 스스로 완전히 만족하신다. 완전한 내 사랑으로써 완전한 내적 영광을 스스로 누리고 계신다.
사랑은 본질상 외적으로 뻗쳐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은 자기 안에서 자기 밖으로 퍼져 나온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자기 모습을 따라 없는 가운데로부터 창조하시기를 원하시고 자유의지를 가진 영혼을 받아 주셨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까닭에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고 귀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보다 먼저 창조된 우주 만물은 인간을 위해서 필요하기 예문에 하느님께서 영원한 안목으로 미리 보시고 영원한 사랑으로써 제공해 주신 것이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한 별 등이나, 들에 핀 한 포기의 들국화를 보고도 하느님의 사랑을 추정할 수 있다.
“내 하느님이시여 땅 위에 보이는 모든 것은 당신을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이 모든 것은 나를 사랑하심으로 창조하신고로”라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무에서 창조하시고 그에게 크나큰 가치와 존엄성을 부여하셨다. 하느님 자신의 눈에 아름답고 진귀한 다이아몬드처럼 만드셨다. 한마디로 말해서, 먼저 인간을 사랑하신 것이다. 먼저라는 말은 사랑하셨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랴?
인간 자신이 노력해서 아름답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된 연후에 사랑하겠다는 조건을 붙이지 않으시고, 먼저 하느님께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당신의 외적 사랑과 외적 영광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만족하시고 완전히 행복하시고 충만한 영광을 누리시기에 외부로부터 무엇을 보충받을 필요가 없으시고 더구나 어떤 매개물을 통하여 자기 영광을 증진 시킬 필요성도 없으시다. 하느님의 외적 사랑과 외적 영광은 우리 인간을 위해서만, 다시 말하면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 불가결할 뿐이다.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인간은 하느님의 계명을 거슬렸기 때문에 죄를 범했고 불쌍한 처지에 떨어지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막지도 않으시고, 관여하지도 않으셨다.
인간이 자유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불행을 자처한 것이다. 인간 자신의 힘으로써는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성충의 생명을 회복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자비로운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죄중 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즉시 용서해 주시고 또한 구세주를 약속하셨다. 인간의 약함이 하느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베푸실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드린 것이다.
구세주의 내림에 대한 예언이 주요 골자로 되어 있는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지상에 사람으로서 탄생하셨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셨다. 탕자의 비유, 마리아·막달레나, 배반한 사도 베드루, 우물 옆에서 물을 깃던 사마리아 여인, 간음한 여인 등이 이를 잘 증명한다. 신약에 있어서의 사랑의 새 계명은 다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데 그치지 않고 원수에 대한 사랑에까지 미친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신약에 있어서의 사랑의 대의(大意)이며 사랑의 주제(主題)이며 사람의 증명(證明)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니라. - 이른바: 네게 가까운 자는 사랑하고 네 원수는 미워하라 하였음을 너희는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네 원수를 사랑하여 너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며. 너를 핍박하고 중상하는 자를 위해 기구하여, 선인이나 악인이나 대양으로 다 비추시고 의로운 자에게나 불의한 자에게나 비를 다 주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성부의 아들이 되게 하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들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갚음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이것은 행치 아니 하느냐. 또 너희가 형제들에게만 인사하면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교 백성들도 이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마테오 5,43-48, 6.1-4)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뿐 아니라 표양으로서 친히 조건 없는 사랑을 인간들에게 가르치셨다. 그는 인간의 구속을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형제가 되고 친구가 되도록 만든 아담의 죄는 이런 뜻에서 “복된 탓”이라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약하면 약할수록 하느님께서 자애로운 사랑을 베풀어 주실 기회를 제공해 드리는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을 현양해 드리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께서는 “나 허약한 그 때에 오히려 굳세다”라고 피력하셨을 게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느 누구에게도 비록 경미한 순간이라도 사랑하기를 중지하지 않으신다. 사람들이 중죄를 범할 때에 또 만일 그들이 지옥에 떨어진다 할지라도 그들을 끊임없이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를 중단하신 것이 아니고, 그들 자신이 그분의 사랑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불행을 스스로 자처한 것이다. 그들 자신이 온전 자유로 장벽을 세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