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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강

죽순(竹筍)처럼 돋아나는 무의식적 방비책들

2. 죽순(竹筍)처럼 돋아나는 무의식적 방비책들[손 에드워드 신부, 조건없는 사랑]

 

이런 마음의 상태에 놓이게 되면, 인간의 마음은 차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법이다. 계속해서 이와 같은 괴롭고 쓰라린 경험을 당하게 되면 근심과 갈등과 좌절과 공포가 자기 자신을 엄습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지워버릴 수 없는 갈망을 박아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을 느낄 수 없는 심리 상태로 인하여, 기쁨과 평화와 안정감이 사라진다. 받는 사랑이 부족할수록 안정감과 평화가 줄어든다. 정신적 갈등의 한 가지 큰 원인은 부모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그들의 요구 조건을 채워 드리느냐, 그렇지 않으면 자기대로의 신념과 시대적인 요구에 따라 행동하느냐의 마음 갈림길에서 방황하게 되는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쉬운 예를 들어보면, 도시에 사는 완고한 부모님이 시대적 현실을 무시하고 자기 딸에게 옛 그대로의 낡은 풍속을 따르기를 강요할 때 그 딸은 갈피를 잡기 어려운 마음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또 자녀에게 공포심이 생겨나는 원인도 실은 변덕스러운 사랑과 거짓 사랑을 받아왔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어 혹시 미움을 또 받지 않을까 하여 남의 사랑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고, 또 남에게 배신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의구심(疑懼心)에서 남에게 사랑을 주는 것조차 두렵게 여기게 된다.

또, 한가지 요안이 남의 눈치를 자주 살피게 되는 그 원인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각 사람의 마음속에는 예컨대 상처를 입었을 적에 백혈구와 적혈구가 그 상처 부근으로 모여들어 새 피부가 나오도록 하고, 또 몸의 열은 나쁜 병균을 죽이고, 또 땀은 열을 내리도록 하는 등, 하느님이 마련하신 자연의 신비한 섭리대로 따라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리상에도 저절로 정신 고통을 회복시키고, 심적 교통을 완화 시키는 그러한 원리가 적용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무의식적 방비책”이라고 일컫는다. 쉽게 말하자면, 이러한 심적 방비책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미움을 피하고 하나는 사랑을 얻기 위한 것으로 이들 방비책은 근심과 좌절과 정신적 공포와 마음의 갈등을 감소시켜 준다. 그러나 병균을 죽이는 열이 뇌를 상하게 하여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열을 내리게 하는 땀의 역할이 오히려 몸을 마르게 하여 죽게까지도 할 수 있는 것처럼, 심적 방비책 역시 역효과를 내어 인간에게 해로울 수 있다.

여기서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은 것은 그 방비책은 어떤 병 자체가 아니라. 증세라고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이 증세는 마음속 깊이 쌓이고 쌓였던 잠재의식이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증세로 인하여 요안은 사랑을 느끼지 못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위한 조건 없는 사랑을 느끼지 못하였을 때마다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으로 빠져들어 가 다시 그 고통에서 헤어날 희망을 잃어버리게까지 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도 못하고, 현재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받아들이지도 못하므로 일어나는 마음의 갈등으로 인하여 자기가 갈망하는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 무엇을 꼭 해야만 하고 무엇 무엇을 꼭 피해야만 하는 줄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그의 마음속에는 필연적으로 무의식적 방비책이 움튼다. 그러면 이같이 복잡하게 얽혀져 버린 요안의 심리상태를 하나 하나씩 캐어보고 무엇 때문에 그처럼 자기 사랑(自愛)을 잃어버리고 그릇된 초조와 불안에서 헤매이는 가에 대하여, 즉, 그의 무의식적 방비책을 계속 일으키게 하는 그 원인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피기로 하자. 요안은 자기 자신을 살펴볼 때 본래의 아름답고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도리어 흉측스럽게 변해버린 새까만 조개탄 같은 모습을 볼 뿐이다.

이렇게 조건 붙은 사랑을 얻기를 거의 불가능하게 하는 자신의 무능과 결점을 보게 되면 될수록, 그만치 자신이 천해 보이고 괴로워지는 것이다. 이처럼 심각하고 절실한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떠한 방법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을까?

즉, 그의 마음속에서 필요 이상의 정력을 뺐고 있는 문제의 무의식적 방비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보기 흉한 모습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겉꾸민 커튼으로 가려놓고, 자기를 비평하는 대신 남의 성격 속에서 그와 똑같은 결점을 찾아내려는 짓궂은 마음으로 남의 흉을 마구 보게도 된다. 따라서 자기의 결점으로 직접 고백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감추어 버리고 남의 결점을 자기의 결점에 비추어 쉽게 남을 비평하게 되니, 이렇게 하는 것이 그에게는 괴로운 마음을 달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는 이런 행동을 모른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어찌하여 요안은 그처럼 쓸데 없는 비평을 하는가? 매우 교만하지 않은가?”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따라서 주위 사람들에게 더욱 따돌림을 받게 되고 점점 더 깊은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요안의 행동을 보고 우리는 그가 교만하고 불순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러나 교만의 탓이 전혀 없을 수는 없겠으나」 그 교만함(그겉으로 보여지는)의 근본을 캐어 보면 역시 자기 자신을 미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교만 때문이 아니라, 자기 사랑의 부족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런 경우에 비평을 차라리 남을 비평한다는 것보다 간접적이고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자기 자신을 비평하고 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모든 비평은 다 이러한 것으로 단정하는 것이 물론 아니고,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에 한하여 그들의 비뚤어진 성격을 두고 말하는 바이다.

또 한가지 방비책으로 변명하는 습관을 들을 수 있다. 가령, 자신의 결점 또는 실수와 같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아무리 사소한 약점일지라도 언제든지 그것을 솔직히 고백하기를 대단히 어려워할뿐더러 어떻게든지 자기의 결백성을 드러내려는 심산에서 끝까지 변명하려 든다.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을 고백할 때마다 다이아몬드 같아야 할 자신이 더욱더 조개탄같이 검게 느껴지고, 조그마한 과오 하나를 고백하더라도 자신을 골탄(骨炭)으로 칠하는 듯한 감정이 솟구쳐 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안은 변명함으로써 모든 약점을 감추어 버리고 백합처럼 깨끗하고 아리따운 모습으로 자신을 장식하려 한다. 이렇게 변명 잘하는 버릇도 역시 그가 지닌 교만의 탓이라기보다 그 마음 한가운데는 언제나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어 그 불안감에서 해방되려는 노력과 자신 마저 자기를 버릴 수 없다는 안타까움과 조금이라도 자기 약점이 드러날 때의 쓰라린 고통을 피하려는 목적의식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하겠다. 그런데, 그를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은 “어찌 요안이 그토록 핑계를 많이 할까? 왜 이치에 맞지 않는 엉뚱한 말을 잘할까?”하고 자못 의아스럽게 여긴다.

요안은 이 때에 아무리 결점투성이여서 비록 죄인일지라도 자기야말로 은 세상을 합친 그 무엇보다도 더 귀하고 아름다운 인격을 갖춘 하느님의 위대한 피조물 중의 왕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어 자기 사랑에 발을 붙일 수가 도저히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요안이 보통 사람 같으면 남이 자기를 비평하더라도 자기의 존엄성을 잃어버림이 없이 태연할 것이다.

이유는 자기 가치를 확실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어떤 이는 상당한 교육을 받기까지 한 그가 그것쯤 깨닫지 못하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가 교리 서적으로나 혹은 강론이나 성경 말씀을 통해서 비록 이론적으로는 자기 가치를 알 수도 있지만 대인 관계나 실생활을 통해서는 실제로 그런 체험을 해보지 못했고, 또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진리를 깨달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직까지 요안은 자기 자신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또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변함없는 사랑으로 대해 주는 사람을 발견하지도 못했다. 어쩌면, 그러한 사람들을 만났을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실상 그 누구와도 더 놓고 상통해 본 적이 없다. 요안은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자기 스스로가 자기 마음 둘레에 담을 쌓아 버린 것이다. 그는 남의 사랑을 거절하고 무서워하고 믿지 못한다. 자기 같은 사람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간주해 버리고, 쉽사리 자기 멸시와 자포자기에 빠지고 만다.

실로 자기 마음의 문제를 풀기에 가장 큰 지장을 초래하는 것은 남과 사귀기 어려운 점이다. 그는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도 자기 마음을 더 놓을 수 없다. “형제의 도움을 받는 형제는 견고한 도성 같다.”(잠언 18,19) 자기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모든 것을 드러내지 못한다. 이런 마음의 상태에서는, 한마디로, 마음을 털어놓지 못한다.

자기를 받아들이고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혹시 있는가, 찾아볼 방법도 찾지 않고 친밀한 관계도 두려워한다. 혹시나 자기가 감추려는 약점이 드러날까 봐 안절부절못한다. 그러므로, 수줍어하는 것만이 곧 방비책이 된다. 요안은 남을 상대하는 것을 될수록 피하고 얼굴을 똑바로 쳐들지도 못하고, 수집은 모양과 몸짓으로 자기 의사 표시를 대신하고, 혼자 있기를 너무 좋아한다. 자기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열등의식에만 사로잡혀 있다. 그러므로 자연히 다른 사람 앞에 나서면 쑥스럽고 불안해진다. 혹시 그가 나를 싫어하지나 않을까? 흉보지나 않을까? 날 무시하지나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된다. 특히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되면 말을 결기가 무척 어렵다.

때로는 정반대로, 요안이 엉뚱하게 수다스러울 정도로 말을 많이 하고 상대편에게 얘기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이렇게 하는 데는 여러 동기가 있을 수 있지만, 한 가지 이유는 수줍어하는 방비책으로 볼 수 있다. 상대편에서 자기의 기분을 상해주는 말이 나올까 봐 말할 여유를 상대편에게 주지 않으려는 술책이다. 반대로 지나치게 친숙해질까 봐도 두려워한다.

요안은 대화할 때 흔히 개인과 관계없는 화제에 중점을 준다. 예컨대, 스포츠나. 날씨, 과학의 놀라운 발전 또는 시사 문제 등에 관해서 얘기하기를 즐긴다. 자기의 심중에 있는 말을 하기를 몹시 꺼린다. 요안의 비사교성의 뿌리를 캐보면, 이 문제의 핵심을 강조하는 뜻에서 거듭 말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요한이 그렇게 과민한가? 왜 그렇게 자신이 없느냐? 왜 사교성이 부족할까?”라고 주위 사람이 비판한다. 어떤 영적 지도자의 생각에는 그것을 다만 교만의 한 가지 종류로 보지만, 그러나 그렇게 쉽게 판단할 수는 없다. 요안 같은 사람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마음의 불안정으로부터 기인한다고 보아야 비로소 그 근본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즉, 요안의 경우 “자기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라는 일종의 증세에다 기초를 둔다면 옳고 현명한 생각이요, 또 그래야 될 줄 믿는다.

행동의 동기는 보지 않고 다만 행동 자체만 보면 교만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 까닭은 겸손이 진리이고 교만이 허위라면 요안은 자기의 인간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고 또 자기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통하여 한없이 가치 있는 존재가 된 것을 자신마저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잘못이요, 또 그 존엄성 자체를 거부한다는 면에서 요안의 행동은 교만한 행동으로 규정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요안을 비난하고 판단하는 데 있지 않다. 하느님만이 사람의 잘잘못을 꿰뚫어 보시고 판단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의 재판소에서 판결을 받는 것을 괘념치 아니하며, 또한 내 자신으로서도 나 자신을 판결하지 아니하노라. 나를 판단하는 자는 주(主)시니라”(코린토 전서 4,3-4)하신 말씀과 같이 하느님만이 요안이 성총과 자유 의지를 남용해서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아신다. 다 같은 인간 대 인간의 위치에서는 아예 그런 권리는 고사하고 능력조차 있을 수 없지 않은가? 필자의 의도는 어디까지나 요안의 경우를 좀 더 색다른 면에서 이해해 주고 새 출발의 길을 열어주기 위한 방법을 연구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요안의 마음 상태가 어떻게 되었는지 관찰하고, 그리고 한 걸음 다가서서 그 증세의 요인부터 제거해 줄 수 있도록 힘써 보기로 한다.

요안에게 부족한 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는 적극성과 독창력이 거의 없다. 기발한 착상은 아예 엄두도 못 낸다. 딴 사람과 다르게 하지 못하고, 새로운 일이나 활동은 어렵고 위험스럽게 생각한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느니라”(요안 1서 4,18).

항상 지나치게 세심하고 안일한 무사주의(無事主義)만을 택하곤 한다. 남에게 모욕을 당한 수록 사람으로서 버림을 받은 기분이 들곤 한다. 그 이유는 실패나 남의 비평을 당하기가 너무 괴롭기 때문이다.

요안의 성격에 또 한 가지 결함된 점은 자기연민(自己憐憫)이다. 요안은 현재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몹시 고민하기도 하며, “나는 이날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너무나 변덕스럽고 까다로운 조건에서만 사랑을 받아왔으니 얼마나 가련한고”하고 비탄하기도 한다.

독자들께서도 타인의 태도, 표정, 판단 따위의 거울 속에 조건을 채우지 못한 탓으로 일그러진 자기 자신의 비참한 모습이 비쳐졌다면 요안처럼 비관하고 연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요안의 반응이 항상 자기를 위 문하고 동정만 하는 것으로 여기면 안 된다. 요안의 착잡한 심리 상태에서 나오는 색다른 반응이 또 있다는 말이다.

그는 실수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 자기 자신을 학대한다. 자기의 결점을, 감추기 위한 방비책 (비평하는 것처럼) 화를 내는 방비책을 무의식중에 씀으로써 남을 화풀이의 대상으로 삼는다. 괴롭고 저주스러운 마음을 풀어 보고 달래 보려는 무의식적 행동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자기혐오에서 도피하는 행위이고, 간접적으로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다.

여기에도 모든 분노가 다 일률적으로 자기 약점인 방비책에 기인하여 나타난다고는 말할 수 없고, 반대로 아주 좋은 뜻에서의 화도 있다는 것을 부언해 둔다. 그 중에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화를 내신 예수님의 그것이 대표적인 실례가 될 것이다. 그것은 미움에 의한 분노라기보다 완전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요안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어째서 요안은 그처럼 고함을 잘 지르는가? 왜 호랑이도 아닌데 으르렁거리기를 좋아할까? 애덕이 없기 때문이 아니냐?”고 지탄을 받게 된다. 어느 정도로 애덕이 부족한 탓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화를 내는 그 이면에는 숨어 있는 참 원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웃 사람을 자기 같이 미워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 애덕과 모순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원래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마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을 미워해서라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미워하는 데에 더 큰 원인이 있는 것이다. 어떤 지도자들은 화가 날 때는 온순한 성인을 생각하거나 열 혹은 스물 백까지라도 셈을 세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그때그때의 증세만을 치료하는 방법은 될지언정 근본치료는 되지 않을 것이다.

요안은 많은 결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규칙과 법 앞에서는 아주 정확한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체계적이며 일에 자세하다. 그는 세밀한 부분까지 지나칠 정도로 신경을 쓰고 너무 소심스럽다. 법 조문의 세 부분까지 철저하게 준수하고, 생활규칙에 얽매어 융통성이란 찾아볼 수도 없다. 요안을 위해서는 사람들보다 법이 더 소중하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얻기를 단념해 버린 안정감을 법으로부터 찾아 얻으려 는 것이다.

그가 생활해 오는 가운데 경험한 바로는 규칙과 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것만이 자신의 존엄성을 스스로 인정하도록 해 주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따라서 법을 지키는 것만이 그에게 자기 가치를 느끼게 한다.

법은 다른 고통스러운 경험 가운데서 빠져나오도록 도와준다고 여긴다. 그에게 있어서는 완전하지 못한 것처럼 보여지는 것은 큰일이다. 그는 불완전하므로 조건 없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다. 따라서, 자기의 허약성에서 영광을 찾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요안은 불완전한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성 바오로와 같이, “나 허약한 그대에 오히려 굳세다”(코린토 후서 12,10)라고 말할 수 없다. 요안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가치와 존엄성이 자기가 하는 행동의 완전성에 달려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것은 조건 붙은 사랑만 받았던 때문이다. 요안의 경험 중에서 가장 괴로운 일은, 친구를 사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불안정과 사랑의 굶주림 속에서 몹시 의롭다. 우정의 상통을 가로막는 담 속에 있는 요안은 친구의 정을 못내 그리워한다. 요안의 사랑과 우정에의 지나친 갈망은 그를 절제 없는 애착에 쉽게 빠지게 한다. 그의 사랑은 모든 것을 사로잡으려는 경향으로 기울게 되고 편정에 흐르게 되며, 질투심에 불타는 사랑, 즉 독점적 사랑에 빠지게 된다. 더군다나 사랑과 우정을 갈망하는 그의 욕정적 경향은 순결을 거스르는 유혹에까지 대담하게 빠져들어 가기 쉽다. “조건 없는 사랑”을 받지 못한 요안은 어느 누구에게 도 도무지 사랑을 받지 못할 것으로 여겨, 자연 마음은 점점 피로와만 지고, 사랑받고 싶은 충동은 감정적으로 보통 사람보다 훨씬 강하게 된다. 이 충동은 육체적인 것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의 영적 지도자는 유혹의 기회를 피하고, 극기하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더 간곡히 기도하라고 한다. 좋은 충고이기는 하지만 완전한 치료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일시적인 치료방법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다른 고해신부는 음란의 유혹은 단순히 악마의 장난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너무 마귀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이 아닐까? 또 어떤 지도자는 음란한 유혹은 인간의 깊은 곳에 서 흘러나오는 악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이 사상은 얀세니즘의 이단으로 보아야 한다. 아마 그 음란한 유혹의 근본적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닐까? 더 단순한 것이 아닐까? 사랑을 못 느끼는 불안정 때문이 아닐까? 혹시 요안이 사랑에 굶주리지 않았더라면 …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더라면 … 혹시 자기 자신이 사랑스럽고, 또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느꼈었더라면 … 그러한 유혹에 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끝없는 사막 길에서 갈 곳 몰라 방황하는 외로운 나그네와 같이 요안은 어쩔 수 없는 고독 속에서 신음하며 몸부림친다. 이때의 요안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고독이라는 사막에서 잠시라도 쉴 수 있는 곳을 찾게 되는 것이다. 즉, 고독이란 갈증에서 헤어나는 수단으로 이상적인 친구를 찾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간단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더욱더 큰 괴로움과 고독 속에 빠지게 마련이다. 그 친구들이 한결같이 자기의 기대에 어긋나거나, 혹 그 친구가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면 공연한 질투심이 일어나 얼마 안 가서 그 친구와도 절교하게 된다.

이러한 행동의 되풀이는 그가 자기 자신부터 사랑할 수 없는 한 계속될 것이다. 그가 일시적이나마 찾았던 친구 역시 불안전하고 약한 인간임에 틀림이 없으므로 요안의 기대에 어긋나고 실망을 가져다주었다. 그가 원하고 바라는 친구는 그 친구라는 인간 자체가 아니라, 그 친구가 지닐 수 있는바 이상형에 불과했던 것이다. 즉, 요안의 상상의 범위에 서만 가능한 하나의 환상이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 때문에 고독이라는 상처는 어떤 친구로 인해서 어루만져지기는커녕 더 심한 충격만의 반복으로 점점 더 깊이 끓게 마련이다. 이러한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아예 친구가 없는 것이 더 안전하고, 덜 괴롭다고 단정하게 된다. 우정이란 위험한 것이라고 결론지은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그립 상태에 빠지게 된다.

더욱더 비사교적인 사람이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 마음의 심란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조건없는 사랑”을 얻어 만나는 길에서 더욱 멀어져간다. 다시 말하면, 요안이 우정에 대해서 결론지은 생각은, 괴롭고 외로운 자기 마음에 위안과 평안을 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대하여 마지않았던 조건 없는 사랑을 얻기 위한 노력에서, 정반대의 방향으로 그를 내닫게 하는 것이다. 우정을 벗어버리는 행위는 하나의 도피행위이고 따라서 자기 인격 완성에 크나큰 장애를 놓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남을 통해서만,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아 인격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요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참된 사랑은 진리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고, 참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 장단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요안은 이 원리를 모르고 있다. 그는 이러한 사랑을 직접 맛보지 못했기 때문에 참사랑이 무엇인가를 잘 모른다.

지금까지 서너 가지 무의식적 방비책을 예 들어보았는데 두 가지 목적이 그 안에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사랑을 얻기 위한 것이고, 하나는 미움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의 행동을 깊이 분석하면 그 두 가지 방향으로 종합하여 매듭지을 수 있을 것이다.

요안은 자기 행동으로써만 사랑을 구할 수 있고, 또 타인으로부터 좋은 판단을 얻을 수 있는 줄로 여겨, 위대한 일을 해보고 싶은 야망에 불탄다. 요안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교만하다고 눈살을 찌푸릴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어느 정도 교만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교만함의 근본을 캐어 보면 무의식중에 요안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가지 무의식중의 방비책을 들어보면, 요안은 항상 경탄할만한 일을 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또는 자기 능력에 넘치는 것을 하려 하므로 정신상태가 이상하게 될 것만 같다.

그는 꼭 성공하여 대통령이나 장관이 되겠다. 또는 대사나 박사가 되겠다는 따위의 꿈을 꾼다. 물론 이러한 희망이 좋고 바람직한 일이긴 하지만, 그러나 힘에 겹도록 지나친 대망을 품음으로써 마음만 무거워질 뿐이다. 요안은 자기의 가치를 인정받고 존경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뛰어난 인물이 되는 것만이 첩경인 줄로 생각한다. 그는 조건 없는 사랑에 굶주려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안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그 무엇을 채워야만 사랑받게 되는 줄로 여기고, 늘 불안과 초조에 사로잡히게 된 근본 동기는 애당초 부모와 윗사람들의 그릇된 지도나 영향에 있다. 그들은 항상 좋은 일을 하라고만 타이르고 또 좋은 일을 할 때만 사랑했다. 따라서 요안은 반드시 좋은 일이나 색다른 일을 해야만 인정을 받게 되고 또 자신의 가치 기준이 여기에 의해서 측정된다고 느끼게 되었다. 물론 좋은 일을 하라고 권유하고 충동하는 것은 칭찬할 일이지만, 부모나 윗사람들의 입장에서 주의를 해야 할 점이 있다. 사랑에 조건을 붙여 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은연중 무거운 부담을 느끼게 되어 크나큰 고통과 충격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요안은 과민한 성격 탓으로 단순한 꾸중 정도도 받아들이기를 너무 어려워하고, 흉이나 비평을 참아 견디기를 몹시 어려워한다. 심지어 농담이나 가벼운 놀림까지도 받아주지 못하고, 마음 괴로워하고, 고풍스럽게 느낀다. 그들의 선의에서 나은 행동을 악의로 그릇 해석하여 얼굴표정이 굳어지고 마음이 뒤집힐 듯이 당황하며 어찌한 바를 물리 한다. 곧 자기 가치와 존엄성이 손상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의 비평이나 놀림을 받으면 자기 행동만 이 아니라 자기 인격 전체가 무시당하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는 자기가 “무엇인가”와 자기가 “무엇을 하는가”를 구별하지 못한다. 타인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이런 구별을 하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때문에 그들이 자기 의견을 반대하거나, 어느 모양으로는 자기의 뜻과 맞지 않으면, 무의식중에 배반이나 모욕을 당하는 것처럼 느끼고, 미움을 받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그는 마치 남의 의견과 판단의 노예나 다름없다. 이 착각의 감옥 속에서 해방될 때까지 요안은 자신의 참모습을 남 앞에 드러낼 수는 없다. 그때까지 가면을 쓰고 지내게 될 것이다.

불완전하고 결점투성이인 자기 자신을 만일 상대편에게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면 혹시 상대편이 자기를 싫어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잠재의식 때문이다.

참사랑을 얻어 만나는 길에서 점점 더 멀어져만 가는 이 불행한 요안에게 다시는 구원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말 것인가?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自暴自棄)에서 나온 자기학대가 아닐까? 이것도 자기 자신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자기혐오에 서가 아닐까? 만일 요안이 이기심이 없고 티 없는 참사랑을 느낄 수가 있고, 친밀하고 건설적인 대화의 분위기 속에 잠길 수만 있다면 과음하는 나쁜 습관이 다시 말해서 금과 마음을 좀먹는 나쁜 성벽이 점차 고쳐지지 않을까? “습관은 습관으로 이기어 진다.” 더 너그러운 이해와 관용을 가지고 그에게 참사랑과 기쁨에 가득 찬 생활의 보람을 누리도록 만들어 줄 인격자는 세상에 없을 것인가?

어떤 때 요안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열등의식과 혐오 때문에 딴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는 마치 연극배우처럼 자기 아닌 다른 어떤 선망의 인물을 대상으로 그를 지나치게 모방하는 이중인격자가 된다. 물론 훌륭한 사람을 본받는 것은 좋지만 그러나 요안은 너무 지나친 행동으로 그에게 빠져들어 간다. 그렇게 되면 요안이라는 한 사람 안에 두 사람의 인격이 움직이게 되므로 그의 행동은 더욱더 어색해지는 표리부동한 이중인격자가 된다.

이와 같이 행동하는 원인은 요안이 그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또 현재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머지 자기가 선망하는 어떤 사람으로 행세를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이므로 결국 괴로움만 더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인 요안이 두 사람의 역할을 하게 되어 자기 자신까지도 속이고 살아가는 것을 요안 자신도 모른다. 사람들은 요안을 이중인격자라고 비난하게 된다.

다른 또 하나의 마음의 상태를 보기로 하자. 요안은 듣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자랑하고 잘난 체한다. 또 남다른 일을 하려고 애쓴다. 어떻게 해서든지 남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자기 자신의 불안감을 제거해 보겠다는 심산에서이다.

요안의 성격의 또 다른 면을 누구든지 자기에게 무슨 의전을 말하면 무조건 동의하고 맞장구를 치는 것이다. 가령 똑같은 소재(素材)나 문제를 가지고 묻는 경우에도 그는 그 질문자체의 해결에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고 그냥, 이래도 “네” 저래도 “네”하는 식으로 대답해 버린다. 될수록 모든 사람과 의견 충돌이 없이 둥글둥글하게 지내려고만 애쓴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이렇게 되면 요안은 인기 좋은 팔방미인이 된다. 그래서 그의 실생활은 “그렇다” “옳다” “암” “물론이죠” “그럼요”하는 식의 말들로써 흐르는 시냇물처럼 된다. 이런 사람은 남의 기분을 맞춰는 주겠지만 과연 인격을 갖춘 사람일까? 여기서도 요안은 조건 있는 사랑의 희생자이다. 요안은 딴 사람과 의견이 일치되지 않으므로 상대편이 나를 싫어하거나 미워하지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사이가 멀어질까 봐 집을 내는 까닭이다.

요안은 어렸을 때부터 엄격한 교육과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 자라 왔다. 윗사람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때마다. 미움을 받는 쓰라린 생활 체험을 했기 때문에 그는 남과 의좋게 지내려면 자기 주관 따위는 깨끗이 단념해 버리고 남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이 차라리 마음 편하고 안전한 길이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여기에 아침도 곁들이기 마련이다. 이로 인하여 요안은 무기력하고 믿음성마저 잃어버린다. 요안은 남들에게 “줏대 없는 놈”이라는 말을 듣게 되고 따라서 그의 마음은 한층 더 괴로워만 진다. 요안은 자포 자기에 빠져 자신을 혐오할 뿐 아니라 자신마저 의심한다. 지나친 조심성이 세심병으로 나아가고 공연히 딴 사람까지도 의심하게 된다. 필경 요안은 우울증에로 빠져들어 간다. 사랑과 위로를 갈망하는 불쌍한 요안은 자기의 사랑에 대한 갈증을 총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무의식중에 비굴하게도 병이 생기기를 원하는 마음까지 먹게 된다.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병들고 쇠약해 졌을 때에, 부모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사랑을 받았던 일을 회상하게 된다. 이 마음 상태를 “우울증”이라고 한다.

요안은 어렸을 때부터 가난에 시달렸다. 자기 부모님들이 가난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고 수치로 여겼다. 의식주 문제에 급급하게 된 나머지 행복이란 돈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곧 행복을 쟁취하는 것으로 여기게끔 되었다. 실상인즉 행복이란 의식주 문제를 뛰어넘은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행복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요안은 “내가 현재 불행하고 또 사랑을 받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정신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물질적인 것에 있다”고 여기게 된다.

“내가 좋고 값진 옷을 입었을 때 남들이 나를 부러워했다.”

“내가 좋은 집을 지니고 또 좋은 직장을 갖는다면 남들이 나를 깔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만일 자가용 차에 몸을 싣고 다닌다면 - 아, 내가 만일 남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돈을 많이 벌어 들인다면, 남들이 나를 우러러보고 감탄할 것이다.” “내가 만일 훌륭한 사람이 되고, 또 돈을 많이 벌어서 부모님을 유복(裕福)하게 해드린다면 그들 또한 극진히 나를 사랑하실 게다” “내가 만일 부호가 되어 자선 사업에 공헌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존경하고 아껴줄 것이 아닌가?”

행복의 본질에서 동떨어진 사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 나온다. “돈을 벌자! 돈만이 나를 불행에서 건져주교, 또 미움과 업신여김에서 날 구해줄 수 있다”고. 물론 돈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행복이란 물질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데 있다.

돈이나 물질은 행복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한가한 것이지, 결코 행복 그 자체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요안이 만일 부유하고 윤택한 가정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면, 그가 돈에다 행복의 근거를 두었겠는가? 만일 요안이 물질적인 것에 기인되는 사람들의 감정을 체험하지 않았더라면 … 만일 중주위 사람들이 요안이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무식하거나, 유식하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상관치 않고, 요안이란 그 인간 자체를 보고 사랑했더라면 …

물론 요안이 당장 굶어 죽게 된 상태라면 이런 사상을 논할 여지도 없겠지만, 그러나 요안은 적임자는 아니다. 그가 돈을 벌려고 악착같이 애쓰는 근본 동기는 어디에 있을까?

그가 좀 더 잘 입고 좀더 멋을 내려고 마음을 쓰는 동기는 아마도 남에게 돋보이고 싶은 마음과 사치와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때문이 아닐까?

그가 마음이 복잡하고 불안한 것은 생활에 필요한 돈 때문이라는 것이 이해는 되지만, 근본적으로 불안감을 만드는 이유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와 열등의식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는 남의 사랑을 받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얼마 전부터 요안은 나쁜 습관에 물들어가고 있다. 마음이 슬프고 괴롭고 울적할 때마다 누구에게 귀에 거슬리거나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들었을 먹는 술을 마신다. 술이 자기의 고뇌를 말끔끔히 씻어주기나 하듯이- 취기가 온몸에 감돌면 정신이 몽롱해지고, 마음의 폭이 넓어지고 얽히고설킨 마음이 다소 풀어지는 좀 하다. 마음이 언짢을 때는 마시지 않고는 배길 수 있게 되었다. 마시고 취하는 일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이제는 술과 절교하기 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다. 요안이 술에 만취가 되면 평소에 품은 불만과 불평을 함부로 토로하여 주절거린다. 격하고 흥분한 어조로 남을 비평하고 비난한다. 홍을 못 이겨 들뜨는가 하면, 어느새 기분이 나아지고 연민의 감정에 휩싸인다.

이러한 사이에 어느덧 어쩔 수 없는 알콜 중독자가 되었다.

요안이 이렇게 남에게 지탄을 받을 만큼 전락(顚落)된 동기는 무엇일까? 어쩌다가 그가 술과 떨어질 수 없는 친근한 사이가 되었을까?

의심할 여지도 없이 처음에는 알콜의 힘을 빌어 우울한 기분을 해소시키고 잠시나마 심적 고통을 덜어 보려는 심산에 서 였으리라. 그러나, 좀더 깊이 그 밑뿌리를 캐보면 과음(過飮)하는 근본 동기와 이유는 다른 데 있음이 분명하다.

혹시나 윗사람에 대한 반항심과 반발심이 아닐까?

아드리안 반 캄이 쓴 “종교와 개성”이란 책에서 요안에 게 적용되는 문장을 아래에 인용해 보겠다.

“만일 가정에서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받아주지 않았다면, 일생을 통해서 어느 정도 하느님과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경원하지나 않을까, 미워하거나 혹은 저주하거나 않을까 두려워하게 된다.”

“유년시절의 불행했던 경험 때문에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살피고 감시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바램, 어떤 생각이나 느낌, 그리고 불완전 때문에 배척과 증오가 우리에게 떨어질까 염려한다.”

마찬가지로 칼 라저스 박사에게 보낸 서간 속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을 이해하는 비결은 아이에게 대한 부모의 태도나 취급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어떤 부모가 자기 자녀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그 대로를 원한다면, 이런 자녀는 자신(自信)과 존엄성을 지닌 성인(成人)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부모님들이 자기 자녀를 현재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좀 더 영리했으면, 좀 더 잘났더라면 하고 현재보다 다르고, 고쳐지고, 변경되어진 자녀를 원한다면, 이런 부모를 가진 자녀는 받아주는 기쁨을 느낄 수 없어 늘 근심 중에 있게 됩니다. 이런 부모는 그들의 자녀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이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들의 심저(心底)를 뚫고 들어가 보면, 그들은 이렇게 느낍니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는 바로 내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아니다.”

노골적으로 이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차라리 나는 그들이 까 놓고 말하는 것이 더 낫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오히려 받아줌을 받지 못하는 자녀들의 마음속에 그 같은 깊은 상처는 남겨 주지 않을 테니까요.

그들은 잔인한 말 대신에 부드러운 말로 사랑의 조건을 붙입니다. “네가 만일 이러한 착한 애가 된다면, 만일 네가 좀 더 다른 그 무엇이 된다면, 우리는 널 귀여워해 줄 것이다”라고.

요안을 염두에 두고, 인간의 성격 발전에 있어서 부모들의 영향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들이 조건 있는 사랑의 분위기를 자기 자녀들에게 만들어 주는 것이 잘못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들 역시 고루한 옛 풍속과 옛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테니까. 아마도 그들이 종교인이라면, “감정은 악이다” “육체도 악이다”라고 주장하는 엄격주의로 이름났던 얀세니즘이나 칼비니즘의 이단적 사상에 은연중 물들었을 테니까, 아마도 자녀 교육에 대한 무지에 그들의 잘못에 대한 책임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 자신이 불안정하고 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 실패한 때문이 아닐지, 그들의 부모들로부터 그들 자신이 이러한 교육과 훈련을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자기들이 당했던 바를 그대로 다른 이에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자녀에게 대한 부모들의 영향을 아래와 같이 알아듣는 것이 당연하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부모들은 온 인류를 대표한다.

아이들은 일생을 통해서 자기 부모나 식구들에게 받았던 반응을, 같은 모양으로 다른 이에게도 그대로 무의식중에 적용하려 든다. 같은 모양으로 그의 부모들이 그에게 베푼 사랑이나, 미움, 판단, 배척 등이 온 세상 사람을 대표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자기의 육체적인 외모와 그 외모에 따른 자기의 반응이 성격 발전에 큰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 하느님의 못난 상태로 된 인간의 가치와 아름다움은 겉모양으로 알아낼 수도 없고, 판단할 수도 없지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겉만 보고 사람을 평가한다. 한 사람의 자연적 아름다움이 온 우주에서 발견되는 모든 자연적 아름다움을 능가한다. 창조주의 걸작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몸으로 인하여 남의 판단과 호감과 미움을 받고 있는 줄로 여긴다. 키가 꺽다리같이 크든지, 난쟁이같이 작든지 또한 너무 뚱뚱하거나, 빼빼 마르든지, 혹은 너무 흉하게 생겼으면, 열등감을 느껴 남의 사랑을 못 받을 줄로 여기고 비관하기 쉽다.

따라서 이러한 약점을 보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의식적인 방비책이 생긴다. 자기의 균형 잡히지 않은 몸이나, 보기 흉한 얼굴 때문에 남의 사랑을 받기는 영 글렀다고 여겨 비탄에 빠져버린다. 이런 사람들은 다이아몬드인 자신을 더욱더 더럽혀지게 만들고 자기 자신을 무의식중에 더 심하게 미워하게 된다. 요안은 말할 수 없이 못생기고 키마저 작달막하다. 자기 자신 몸을 차별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통 없는 것처럼 여긴다. 자기를 남 앞에 잘 보이려는 요안의 행동이 여기에 기인함이 아닐까? 조건 없이 사랑하고 외모의 차별 없이 대해 주는 사람을 만나 상통할 수만 있다면, 요안의 착잡하고 괴로운 마음이 봄눈 녹듯이 풀어지지 않을까?

또, 한가지 제일 해로운 방비책은 억압이라 하겠다. 이것은 불안감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자기의 괴로운 경험을 감추어 버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저주스러운 경험을 무의식이라는 어두운 창고에 밀쳐 넣은 후에 문을 탁 닫아 버리고 맹공이 자물통으로 굳게 잠그고는 열쇠를 멀리 내던져 버린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죄악감이나, 불안감, 또는 과오나 가책, 그리고 과거에 체험한 괴로운 추억 따위가 의식에 떠오르지 못하도록 누르려는 것이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면, 요안이 어렸을 때 친구한테 배신을 당하고 심한 모욕을 당했다. 요안은 그 후 그 일이 기억에 떠 오르기만 하면, 마음이 아주 괴로워짐으로 아예 생각이 나지 않게끔 방비책으로 간단히 감추어 버려 다시는 의식에 떠오르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현재의 과오와 실수, 그리고 죄악을 고백하기는커녕 자기에게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나 현재 있는 사실까지도 부인한다. 의식적으로 고통스러웠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무는 것 같지만 그러나 무의식 속에 눌려 버렸던 경험과 감정이 사라지지 않고 머물러 있어, 때를 따라 외적으로 폭발한다. 지워지려는 경험이나 감정 따위가 연관성을 갖고 있던 사람 또는 행동으로 말미암아 무의식중에 재생(再生)된다.

특히, 억압으로 누르려고 하는 재료는, 존엄성을 손상시키는 남의 미움이나 멸시 또는 학대 따위이다.

또 요안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두운 창고의 문이 열릴까 봐 문을 열 수 있는 책과 사람과 담화와 생각 따위를 조심스럽게 피하곤 한다. 결과적으로 눈앞에 있는 “실재”(實在)도 못 보는 상태이다. 부분적인 소경과 같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요안은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도 없고 자기의 심적 상태의 원인을 파악해 낼 수도 없다. 굳게 닫혀진 그 문이 어떻게 해서 다시 열려질 것인지 좀더 두고 보기로 하자. 모든 사람에게 버림을 받고, 자기 자신마저 자신을 버린 불우한 요안은 세상을 살아나갈 기력조차 없는 듯하다.

독자는 필자와 더불어 오랫동안 끈기 있게 요안의 심정을 관찰했다. 인정 많으신 독자는 요안의 심적 고통을 완화시켜 주고 싶은 동정심이 샘 솟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심과 괴로운 마음이 회복될 수 있는 비결을 발견하는 그 시간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더 나아가 보자 우리는 부활이 있기 전에 십자가를 져야 하고, 장미꽃이 되기 전에 가시나무가 있어야 된다는 철칙을 재음미해야 하겠다.

요안이 자기의 쇠약함과 나약함을 어떻게 극복하는가를 보여주기 전에 지금까지 요안의 마음 상태에 대해서 고찰한 바를 간단히 총괄해서 설명해 보고자 한다.

1) 요안은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보배로운 보석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인간이 무엇이온데 당신이 그를 기억하시나이까? 또 사람의 자식이 무엇이온데, 당신이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러나 당신은 그를 천사들보다 좀 못하게 만드셨으며 영광과 명예의 관을 그에게 씌우셨나이다. 그로 하여금 당신 손의 조물들을 다스리게 하셨으며, 모든 것을 당신이 그의 발밑에 굴복시키셨나이다.”(다윗성왕의 성영 8,5-7)

그러나, 요안은 대인 관계로 인해서만 자기 자신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

2) 요안은 자기에게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의 저울에 나타난 영상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을 보고 또 평가한다.

3) 남이 자기를 받아들이는 정도 대로 자기 자신을 좋게 느끼게 되고 자기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자기 자신 안에 반영시켜준다.

4) 불행하게도 요안은 참된 사랑을 별로 느껴 보지 못했고, 조건 붙은 사랑을 너무나 많이 받아왔다. 이 사랑은 변덕스러웠다. 요구하는 사랑이었고,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랑이었고, 상으로 주고 별로 회수하는 사랑이었다. 한마디로 이기적인 사랑이었다. 양순, 봉사, 희생, 외양(外樣), 노력 등에 달려있는 사랑이었다.

이와 같은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요안은 자기 가치와 사랑받을 수 있는 능력이 남의 요구와 기대를 충족시켜 주거나 못 시켜 주는 데에 따라 좌우된다고 여기게끔 되었다. 그는 자기 가치와 사랑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는 때에만(한해서만) 자기 자신이 빛나는 다이아몬드임을 자각한다.

그는 자기의 가치가 자기 안에 있는 것으로 (內在하는 것으로) 보지 못하고 타인 안에 있는 것으로 여긴다.

5) 요안은 남의 조건을 채우지 못해서, 즉 사랑의 대가로 붙여진 조건을 채우지 못해서, 갈등과 좌절과 근심과 공포가 뒤범벅된다. 이는 자신을 미워함에서다.

6) 괴로움을 편하고 사랑을 얻기 위해서 무의식중에 여러 가지 방비책이 아래 “그림”의 예에서 보여주듯이 이른 봄의 새싹처럼 움튼다.

이제까지 뚜렷하고 자세하게 요안의 성격을 살펴본 결과 요안의 결점과 죄와 잘못된 점들은 한 가지 큰 원인에서 유래 됨을 알 수 있다. 이 한 가지 큰 원인이 바로 자기혐오라 하겠다. 위의 삽화에서 화살표로 그려진 결점과 방비책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상호 간에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들을 따로따로 분리해서 여러 병이나 문제로 보지 말아야 하니, 그것들은 병 자체가 아니고, 병의 증세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병으로부터 흘러나온 여러 가지 증세들이다.

이 병은 자기혐오, 자기 증오, 즉 인간으로서의 가치 상실, 사랑을 질식시킴, 그리고 자아의 가치를 묻어 버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과소평가이다. 모든 죄의 원인이 사랑의 부족에 기인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모든 율법이 사랑 안에 포함된다”라는 성경 말씀을 쉽사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결점과 모든 악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나중에 취급하기로 하자. 요안의 생각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심각한 이 문제가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기 때문인 줄로 여긴다. 자만심 때문이라고만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요안을 지도하는 사람들이 그와 꼭 같이 생각하는 고로 요안을 보고, “자신을 낮추라” “자신을 무가치하고 허무한 것으로 여겨라”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어떤 지도 신부는 요안의 결점을 하나하나씩 체계적으로 분석해 가지고, 하나하나씩 고쳐 보려고 한다. 그 지도 신부는, “일 년에 결점 한 가지씩 뽑아 버리면 성인이 되리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의심 없이 아주 틀린 원리에서 나온 말이다.

이 얼마나 진리에서 동떨어진 생각인가! 죄와 결점의 뿌리를 뽑아 버리는 적극적인 방법이 못되고, 다만 증세만 치료하려는 소극적인 방법이 아니겠는가?

쉬운 예를 들어, 여기 폐결핵 환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의 담당 의사가 그의 병을 근치(根治)시키는 약을 쓰지 않고 열을 내라는 약과 기침약을 쓴다면, 그 병의 증세만 어느 정도 완화시켜 주는 결과밖에 나지 않을 것이다. 근본적인 치료는 병균을 직접 죽이고 공격하는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스트립트 마이싱”이나 “파스” 또는 “아시아짓트” 같은 약을 써야 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결점이나 죄를 제거하기 위한 선결문제는 조건 없는 사랑을 부어 주는 것이 아닐까?

에릭 프롬이 쓴 “사랑의 예술”이란 논문의 일부를 아래에 인용하겠다. 요안의 심정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이다.

“자기 공로 때문에 사랑을 받고, 자격이 갖추어졌기에 사랑을 받았던 결과는 항상 의심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혹시 내가 나를 사랑해 주기를 원하던 그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혹시 나 그 사람의 마음을 상해주거나 기분 나쁘게 해 주면 어쩌나 하는 의심이 생겨난다. 그 사랑이 사라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항상 섞여 있다. 더 나아가서 말미암아 받은 사랑은 쓰디 쓴 기분을 뒷맛으로 남긴다. 즉, 상대편이 나를 위하여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내가 그를 기쁘게 해 주는 그 이유 때문에 그가 날 사랑하는 것이다. 사실로 나를 사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이용하는 것이다.”

요안은 남이 자기를 사랑하는 눈치를 보이면, 자기 혼자 생각한다. “내가 그이에게 어느 점에서 이용 가치가 있기 때문일 거야. 하지만 이용 가치가 없어지는 날에는 날 차버릴 게다.”

요안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고 심한 고통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굳은 신앙으로 많은 십자가 뒤에 숨어 있는 크나큰 가치를 인식하고 영적 발전에 힘를 기울인다. 요안은 각 종류의 기분과 복잡한 마음의 상태 속에서 하느님의 성충을 볼 수 있다. 자기 마음의 투쟁 속에서 이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는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과 일치한다.

요안은 구세주 예수께서 인간이 겪는 각 가지 괴로움을 친히 체험하셨다는 사실을 잘 안다. 하느님이신 예수께서는 고독과 그리움, 수치와 모욕, 배신과 저주, 근심과 공포, 갈등과 좌절 따위를 친히 경험하셨다. 예수께서는 모든 괴로움, 모든 부족함, 모든 질병, 그리고 미숙함과 불균형 등을 성화시키시고 공로가 되기 위한 재료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재료로 만드셨다.

다행히도 요안은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신심, 특히 게세마니에 대한 신심이 두려움으로 뼈저린 슬픔과, 짓눌리는 마음의 고통 속에서도 게세마니 동산으로 올라가서 무릎을 꿇고는 용기를 잃지 않고 있다.

“영혼을 성화하는 데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성 보나벤뚜라)

게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 옆에 경건히 무릎을 꿇고, 그 마음의 고통에 자기의 슬픔과 괴로움을 합치시킬 수 있다는 신비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하는 듯하다.

그러나 요안이 마음의 위로와 치료를 해 주는 게세마니의 신비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아직도 요원하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의 별빛도 얻어 보지 못한 채, 요안은 자기의 고통이 아주 쓸데없는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극도에 달하는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죽음의 골짜기인 게세마니에서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려고 내려온 천사를 그분은 들려 보내지 않으셨다. 요안도 진정으로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나타나 준다면 그를 진심으로 환영하지 않겠는가?

상처투성이가 된 요안의 마음을 그 누가 위로해 주고 어루만져 줄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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