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강
참된 행복 : 하느님 나라를 사는 생활 규범, 하느님 나라에 사는 행복한 사람들
복음서에 따르면 사십 일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이때의 일성(一聲)이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가르침과 아울러 온갖 질병과 아픔에 허덕이는 가난한 이들의 치유도 잊지 않으셨다(마태 4,23 이하). 그리고 복음서는 가르침과 치유 행위를 보고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랐다고 전한다. 갈릴래아에서 예수님의 첫 번째 전도는 성공적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을 보고 산으로 오르시더니,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삶이란 무엇인지, 다시 말해 예수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생활규범을 선포하셨다. 흔히 말하는 ‘산상설교’는 참 행복에 관한 가르침에 이어지는 하느님 나라 윤리강령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행복 선언은 천국에서 누리게 될 미래의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지침을 내포하고 있다.
사실 행복 선언은 복음서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복음으로 사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그것은 행복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를 쓴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말(“행복에 대한 네 생각을 말해다오. 그러면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겠다”)처럼, 행복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신원을 파악할 수 있다. 굳이 베르나노스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행복추구는 그리스도교 인간관 전체를 관통하는 화두이다.
마태오 복음(마태 5,3-12)이나 루카 복음(루카 6,20-23)의 행복 선언에서 “…한 사람들은 행복하여라”라는 예수님의 외침은 추상적이 아니다. 상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선언이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슬퍼하고, 자비와 정의를 베푸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복은 천상의 것이 아니라, 실체적이다.
복음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행복하여라’의 그리스어는 마카리오스makarios인데, 이는 하느님의 축복으로 사람들 사이에서의 복됨을 의미한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사회적으로 소외받고 가난하며 억압받는 이들에게 ‘지금 여기’의 행복을 선언하신다. 또 어린아이들에게 복되다고 하신다.
이제 예수님의 행복 선언을 들고, 좀 더 그리스도인의 복됨에 다가서 보자. 도대체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며 지상의 삶을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참 행복을 가르쳐주셨지만, 그 행복의 내용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행복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행복론으로 그리스도인은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이 세상 안에서 ‘반대 받는 표적’의 길을 걸어가셨고, 그로 인해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언제나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프셨다(루카 2,35 참조). 참 행복, 진복팔단이 언급하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으로 박해를 받는 사람이다. 사실 그러한 사람은 바로 지상에서 우리와 함께했던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따르는 것이라면, 진복팔단은 바로 그러한 삶의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을 통해 참 행복의 내용을 제시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행복은 슬퍼하는 이들과 공감하여 함께 울고, 굶주린 이들,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여 배고파할 줄 알고, 억압받는 이들의 편에서 함께 박해받음을 통해서 얻게 된다. 참 행복에 대한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새로운 실존에로의 부르심이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 불행 속으로 빠져들라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위한 어떤 태도와 관점을 취하라는 촉구요, 예수님의 체험을 함께 나누러 오라는 초대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인간의 위대함을 알리는 새로운 실존의 결과로서 하느님 나라의 참 행복은 그렇게 다가온다.
한편 참된 행복은 ‘마리아의 찬가Manificat’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엿볼 수 있다. 참 인간이며, 참 하느님의 어머니, 가난하고 겸손한 마리아의 찬미와 감사의 노래, 마니피캇은 아래와 같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루카 1,46-55).
1.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5,3; 루카 6,20)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사실 아무것도 갖지 못한 ‘가난’은 그 자체로 무척 ‘괴로운’ 일이다. 물질적 가난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그렇게 가난하다는 것은 무언가에 억눌려 있다는 압박감을 지니게 한다. 그러다 결국 경쟁 사회에서 소외되고 도태되어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이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마음을 연다면, 그 무기력, 압박감, 소외감에서 벗어나 전적인 평온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물질적 가난이 오히려 하느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맡길 힘을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가난은 하느님께 의지해서 살 수밖에 없는 실존적 의존성을 가리킨다. 탐욕의 족쇄에서 풀려나 하느님께 의존하게 된 가난한 사람은 믿음, 소망, 사랑 속에서 살면서 남들을 섬기려 한다. 이렇게 하여 부정적인 물질적 가난에서 시작하여 긍정적인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난의 의미가 형성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는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늘 나라’는 저 높은 하늘에 존재하는 곳, 죽어서 가게 될 그 어떤 곳, 장소의 개념이 아니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 곧 ‘하느님의 통치’가 있는 곳이다. 하느님의 통치는 구체적이고도 초월적인 것, 곧 물질적이고도 영적인 것을 모두 넘어서는 신비로서 통치다. 하늘 나라는 비록 가난하지만, 진리 안에서 빛을 보려 하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이들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루카 12,16-21)를 알고 있다. 아무리 재산이 많고 풍요로워도 하룻밤 사이에 목숨을 잃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하시며 하느님 나라를 찾으라고 하신다. 하느님 나라를 찾으면 나머지는 덤으로 다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루카 12,22-32 참조). 예수님께서는 물질적 재화에 사로잡힌 탐욕을 질타하시면서, 두려움 없는 믿음을 강조하신 것이다.
교황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ate et Exultate>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음의 가난, ‘영적 가난’을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의 말을 인용하여 “거룩한 불편심”이라 부른다. 이 가난은 우리를 ‘내적 자유’로 안내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이다. 타인의 고통과 아픔에 자연스럽게 공감하며 그들과 함께 사랑의 연대를 이룬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통 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통해 하느님을 찾는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 소외된 사람, 가난한 사람, 즉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신 ‘주변부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알게 해주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난한 교회를 넘어 ‘가난한 이들의 교회’를 힘주어 말한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우선적인 선택은 어떤 구호나 선언이 아니라 최상의 복음 실천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은 ‘의롭게 믿은 자들과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부여되는 명칭’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구약성경의 묵시문학에서부터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작은 사람들이며,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하느님을 향한 부르짖음이었다. 그래서 철저히 하느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에 의해 배척받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종말에 이르러 구원받을 사람이다. 또한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의 가난한 사람’은 ‘주님의 종’이고, 하늘 나라의 사람이다. 오늘의 현대인도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의 영혼을 지닌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실존에 걸맞은 삶의 방식 또는 삶의 유형을 살아내도록 계속해서 당신의 가난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는 그 초대에 단지 ‘예’라고 답하면 된다. 그것으로 우리는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될 것이다. 즉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게 될 것이다.
‘하느님 나라 백성’의 신원을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 ‘가난’이다. 그 가난은 마태오 복음에서는 마음의 가난, 영적 가난을 강조하고, 루카 복음은 마태오 복음과 달리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가난을 강조하는데, 하느님 나라의 가난은 이 모두를 포함한다. 특히 루카 복음서의 가난은 우리를 단순 소박한 삶으로 초대한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예수님은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강생의 영성, 육화의 영성에 따라 예수님과 동화되기를 권유한다(GE, 70항). 우리는 가난한 자의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안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자신에게 능력과 지혜가 있더라도 거기에 의지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탈피해서 오직 하느님께 의지하는 가난한 삶의 태도다. 물적이건 영적이건 가난한 삶은 단순하게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삶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나의 전부’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가난의 말’이다. 당신이 전부이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며, 그래서 나는 당신으로 인해 가난하게 되었으나 당신을 통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어 부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프랑수와 바리용 신부는 이러한 인간적 사랑의 예를 들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가난을 설명한다. 그가 일러주는 하느님의 가난을 살펴보면서 가난한 이의 행복을 마무리한다.
인간적 사랑에서도 이것이 진실일진대, 하느님에게서는 얼마나 더 그러할 것인가! 하느님은 절대적 가난이시다. 그분에게는 가미, 소유의 흔적이 없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영원히 말한다. “너는 나에게 전부다.”라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대답한다. “당신은 나에게 전부입니다”라고 그리고 성령은 이 가난함의 역동성 자체이다. 모든 존재 중 가장 가난하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만일 당신의 이성이 이런 관점 앞에서 혼란스러워지면, 이렇게 말하라. “하느님은 부요하십니다” 그러나 즉각 덧붙여라. “소유에 있어서가 아니라, 사랑에 있어서 부요하십니다.” 그런데 사랑에 있어서는 부요하다는 것과 가난하다는 것은 똑같은 말인 것이다. 하느님은 무한한 가난함이시다. 소유는 하느님의 반대이다.
물론 인간적 삶 속에서 어느 정도의 소유는 필수적이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사람은 부랑아다. 불행하게도 사람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면 존재하기가 몹시 힘들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는 소유 없는 존재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교회는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소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하느님에게는 소유가 전혀 필요치 않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유를 벗어 버린 뒤에야 하느님 안에 들어갈 수 있다. 베들레헴과 나자렛의 가난은 그보다 훨씬 더 심오한 가난의 표징일 뿐이다. 하느님의 드넓은 가난, 무한하고 절대적인 가난 없이,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이시라고 말할 수 없다.(흔들리지 않는 신앙, 49쪽 이하)
2.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5,4; 루카 6,21)
슬픔은 가난함과 연결된다. 사람들은 가난하기를 원하지 않듯 슬프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슬픔을 외면하고, 고통을 무시하거나 감추기도 한다. 우리는 성당의 십자가를 우러러보지만, 십자가를 지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가난을 이야기하시더니, 이제 슬픔을 이야기하신다. 가난의 심연을 지나기도 쉽지 않은데, 이제는 슬퍼하라, 슬퍼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인간의 척도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슬픔은 한자로 애통, 비통이다. 그 자체로 극심한 아픔이며 고통이다. 하지만 그 슬픔의 시간을 견디어 낸다면, 그 시간의 끝에서 참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가난처럼 숨기고 싶은 고통과 슬픔이지만, 이것은 충분히 드러나야 한다. 슬픔의 바닥에서 공감의 원천을 찾을 때, 그 슬픔은 인생의 깊은 의미, 행복의 참 원천을 향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고통과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서, 교부시대부터 내려오는 ‘눈물의 은총’에 가치를 부여해 왔다고 전한다(GE, 76항).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죄, 연약함 등을 뉘우칠 줄 알고 통회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다. 슬픔과 고통은 사람을 영적으로 성장하게 만든다.
또한 가난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슬퍼하는 사람은 타인과 공감하며 연대하는 사람이다. 즉 슬픔은 가난처럼 공감과 연대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돌아보면서 슬퍼할 줄 아는 마음,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그 연민의 마음을 지닌다면 하느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복음서 곳곳에는 예수님 슬픔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정화에 앞서 곧 파괴될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며 슬피우셨다(루카 19,41-44 참조). 또 예수님의 친구 라자로의 죽음을 두고도 사람들과 함께 우셨다(요한 11,33-36 참조). 사도 바오로도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을 말하면서, ‘우는 이들과 함께 울라’(로마 12,15)고 권고하였다(GE 76항 참조).
오늘 우리의 시대는 불의와 폭력, 탐욕과 이기심 등으로 실패와 좌절, 무기력과 허위로 가득한 것처럼 보인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위기와 위험의 시대이다. 상실과 몰락의 시대에 남은 것은, 어쩌면 슬픔과 고통을 넘어 분노뿐이다.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이 웃으며 곡식 단을 들고(시편 126, 6 참조) 올 날은 까마득해 보인다. 그리스도인도 역시 이러한 비탄과 무기력 그리고 분노의 시대를 살아간다.
이제 진정한 위로, 용서, 사랑을 회복할 때이다. 복되신 예수님께서도 불의와 분노, 슬픔의 시대를 사셨고, 고난을 받으시다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불의와 슬픔의 시간 안에서 그분을 살리셨다. 이 살아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 구세주로 고백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불의와 부정, 좌절과 무기력 속에서도 하느님의 위로를 희망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위로를 알기에 슬픔의 시간도 복된 은총의 시간으로 받아들인다. 이 슬픔의 시간 안에서 서로의 위로, 하느님의 위로를 발견할 때, 슬픔은 위대한 힘이 된다.
슬픔을 위하여
정호승
슬픔을 위하여
슬픔을 이야기하지 말라
오히려 슬픔의 새벽에 관하여 말하라
첫아이를 사산한 그 여인에 대하여 기도하고
불빛 없는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그 청년의 애인을 위하여 기도하라
슬픔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의
새벽은 언제나 별들로 가득하다
나는 오늘 새벽, 슬픔으로 가는 길을 홀로 걸으며
평등과 화해에 대하여 기도하다가
슬픔이 눈물이 아니라 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저 새벽별이 질 때까지
슬픔의 상처를 어루만지지 말라
우리가 슬픔을 사랑하기까지는
슬이 우리들을 완성하기까지는
슬픔으로 가는 새벽길을 걸으며 기도하라
슬픔의 어머니를 만나 기도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