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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강

“죽으면 살리라!”

우리가 우리 자신 밖에서 무엇을 얻거나 받으면 이는 옳지 않다. 우리는 하느님을 자기 자신 밖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거나 간주해서는 안 되고 자기 자신의 것으로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든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든 혹은 자기 밖에 그 어떤 것을 위해서든, 어떤 목적을 위해 봉사하거나 일해서도 안 된다. 오직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어떤 순진한 사람들은 하느님은 저기 계시고 자기들은 여기 있는 것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망상한다. 그렇지 않다. 하느님과 나, 우리는 하나다!

 

독일의 신비가이며 엑카르트 신비주의 전통에 서 있는 안겔루스 실레시우스(Angelus Silesius, 1624-1677년)의 시는 바로 이러한 자족적 생명의 자유를 노래한 것이다.

 

장미는 이유를모른다. 장미는 피기 때문에 핀다.

장미는 자신에게 관심 없고, 누가 자기를 보는지 묻지도 않는다.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어떤 동기나 목적 없이 사는 삶, 오직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에 의해 사는 삶, 누군가에게 이유와 까닭을 제시할 필요 없이 사는 삶은 곧 스스로가 존재 이유이신 하느님 자신의 삶이다. 하느님은 생명 그 자체(ipsum vivere)로서, 하느님이야말로 아무 이유 없이(ohne Warum) 사는 존재이다: “하느님은 당연히 자기 밖 혹은 넘어 어떤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유가 있는 일은 어떤 것도 하느님의 일이나 하느님을 위한 일이 아니다.” 하느님의 생명에 뿌리박고 사는 사람, 아니 자기 자신의 근저로부터 솟아나는 힘으로 사는 하느님의 아들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하느님과 그 근저를 공유하고 있는 영혼은 하느님처럼 자족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블로흐(Ernst Bloch)가 이를 두고, 엑카르트를 “하늘에 팔아먹은 보물들을 적어도 이론상으로 인간의 소유로 확보하고자 노력한” 사람으로 평하는 것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하지만 물론 엑카르트는 하느님의 것을 인간의 것으로 되찾은 단순한 세속적 휴머니스트는 아니다. 그가 되찾은 인간과 세계의 복권에는 하느님의 대한 심오한 영성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전통적 신앙에 따르면,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삶,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사는 삶은 그야말로 무의미하고 절망적인 삶이다. 바로 무신론자들의 삶의 모습이다. 그렇다, 엑카르트도 “하느님 없이”(Gottes ledig, frei von Gott) 자유롭게 사는 삶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과 너무나 가깝기 때문에, 아니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이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지, 흔히 말하는 무신론이 아니다. 엑카르트의 “신비주의적 무신론”의 관점에서 보면, 전통적 유신론과 무신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반대인 것 같으면서도 통한다. 엑카르트는 이제 이러한 피상적 대립을 넘어서는 세계, 종교적 휴머니즘의 세계, 우에다의 표현대로, “비종교의 종교”를 열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타 두 자매 집에서 벌어진 일

 

그리스도가 마르타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른 것은 마르타가 시간적 가치와 영원한 가치를 모두 완벽하게 갖추었음을 뜻한다. “너는 걱정을 하고 있다”는 말은 마르타가 사물들과 “함께” 있지만 사물들은 마르타 “안에” 있지 않다는 뜻으로서, 마르타는 현실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현실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다. 마르타는 걱정과 “함께” 있지만 걱정 “가운데” 있지는 않다.

 

시간 속에서 하는 세상일들이 하느님을 찾는 관조적 삶이나 “종교적” 삶보다도 더 고귀하다. 마르타는 마리아가 아직 자신의 존재에 따른 본질적(wesentlich) 삶을 살지 못함을 알고서 그로 하여금 영원한 행복에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기를 영혼의 근저로부터 소원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하나”는 곧 하느님 자신을 가리킨다. 마르타는 존재에 확고하게 뿌리를 두고 있어서(wesenhaft), 어떤 일을 하든지 장애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영원한 빛에 감싸여 활기차게 수행한다. 그는 마리아처럼 하느님에 집착하지 않고 하느님을 놓아 버림으로써 일 속에서 하느님을 만난다.

 

이상이 엑카르트 해석의 요점이다. 중요한 것은 엑카르트가 단연코 활동적 삶을 관조적 삶보다 우월하다고 보았다는 사실이다. 아니, 그 둘을 택일해야 하는 대립적 관계로 보는 것 자체가 잘못이며, 마리아는 아직 이런 대립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둘이 같이 가며 하나인 경지이다. 그것이 마르타의 경지였다는 것이 엑카르트의 해석이다. 하느님 (그리스도)의 위로에 집착하여 하느님을 떠날 수 없는 종교적 삶보다는 자신의 존재 혹은 영혼의 근저에 굳게 서서 흔들림 없이 세상사를 수행해 나가는 실천적 삶이 더 성숙하고 고차적 삶이라는 것이다. 엑카르트는 이미 젊은 시절의 저서 『훈화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자기 내면을 피하거나 무시하거나 거부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바로 그것 안에서 그것과 더불어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활동하는 법을 배워서, 내면성이 활동성으로 터져 나오며 활동성이 내면성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여 강요됨 없이 활동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타는 바로 이러한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시간적 선과 영원한 선이 배타적 선택이 아니라 융합되어 있다. 마르타는 세속을 떠난 종교적 삶이 아니라 세속 가운데 있지만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 시간을 떠난 영원이 아니라 시간 속에 살면서도 영원을 사는 삶의 전형을 보이고 있으며, 엑카르트는 이러한 삶을 참된 영성으로 여긴다. 그에게는 “초탈이 결코 외적으로 이해되지 않도록 (세상으로부터) 떠남과 회귀가 하나의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결정적이다”.

 

이것은 결국 하느님마저 떠나는 “돌파”를 통해 자기 존재의 근저에 뿌리 박고 사는 본질적 삶의 모습으로서, 여기서 성과 속, 유신론과 무신론의 이원적 대립을 초월하는 새로운 정신세계가 열린다. 도피적 세계 부정과 맹목적 세계 긍정을 넘어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의 이원적 대립이 극복되고, “세상 안에서 완전히 편안하게 느끼는 종교적 내면성”이 열리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세상을 등진 “수도원적 기독교에 대한 종교개혁가들의 비판”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우에다는 엑카르트의 이러한 활동적 삶의 영성, “비종교적 종교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엑카르트에 의하면, 신성(神性)의 무(無)는 영혼에게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신의 근저이다. 따라서 영혼은 자기 자신의 본원적 근처로 되돌아오기 위해서 하느님을 돌파하여 신성의 무로 돌파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 영혼은 “하느님을 떠나야” 하며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이것은 오직 영혼이 자기 자신을 떠나 하느님과 하나가 됨으로서만 이루어진다. 이것은 엑카르트에게 극단적인 “초탈”, “철저한 죽음”을 뜻한다. 동시에 이를 통해서 영혼의 근저에는 “아무런 이유 없이” 자기 스스로로부터 자신에 의해 사는 순수한 생명의 원천이 드러난다. 영혼은 이제 자기 자신의 근저로부터 산다. 이제 엑카르트는 영혼으로 하여금 “나는 신도 아니고 피조물도 아니다”고 말하게 한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 하느님 없는 자유로서, 이와 더불어 이 “하느님 없음” 속에 신성의 무, 곧 신의 본질이 현존한다. 이러한 사상으로 엑카르트는 유신론과 무신론의 대립의 피안, 인격신관과 탈인격신관의 대립의 피안에 선다.

 

우에다는 계속해서 말한다.

 

이 “하느님 없는 삶” 속에서 엑카르트는 이 “피안”을 일상적인 세상 현실 속의 “활동적 삶”과 직접 연결한다. 실로 “하느님으로부터 신성의 무로”, 그리고 이와 더불어 “신으로부터 세상의 현실로”라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마르타에게 있어서 이 세상 현실로의 희귀는 하느님을 돌파하여 신성의 무로 뚫고 들어가는 돌파의 실제 수행이다. 부엌에서 일하는 마르타에게 그리고 마르타로서, 그 본질에서 무인 하느님이 현존한다. 엑카르트는 이른바 합일의 신비주의를 극복하고 비종교적 종교성으로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관조와 활동, 초탈과 헌신이 하나인 엑카르트의 영성과 신비주의는 자연히 어떤 특이한 신비 체험이나 영적 경험 자체에 집착하거나 도취되지 않는다. 엑카르트는 사랑이 그 어떤 고양된 종교적 감정이나 경험보다도 우선임을 말하면서, 우리가 설사 사도 바울로가 체험한 것과 같은 탈아경에 있더라도, 아픈 사람 하나가 수프 한 접시를 청하면 즉시 탈아경에 대한 사랑을 떠나 도움의 손길을 펴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엑카르트 연구가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그의 신비주의는 어떤 특별한 종교적 경험, 예컨대 신비적 합일에서 오는 고도로 격앙된 감정이나 탈아경, 환상이나 환청 같은 특이한 감각적 경험에 집착하지 않는다. 오토의 지적대로, 엑카르트 신비주의는 인도의 베단타 사상가 샹카라(Sankara)의 신비주의와 마찬가지로, 어떤 고조된 감정이나 격정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려운 매우 지적이고 담담한 신비주의이다. 그러면서도 샹카라의 탈세계화된 인도적 영성보다는 평상심(平常心)이 곧 도(道)임을 몸으로 깨닫고 사는 중국 선사들의 일상적 영성에 훨씬 더 가깝다.

 

엑카르트의 영성은 이렇게 특정한 신비적 경험 자체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자들이나 일부 신비가들 혹은 신학적 훈련을 받은 자들만의 전유물이 되지 않고, 대중 언어인 독일어 설교를 통해 “단순한 사람들에게”도 전파된 개방적 영성이 될 수 있었으며,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린 활동적 삶으로 힘차게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초탈과 은총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된 자에게는 더 이상 수행이란 필요 없는 것일까? 있다면, 어떤 수행이 필요할까? 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난 자에게 아직도 어떤 참회의 행위(Bußwerke)가 필요한지를 묻는 물음에, 엑카르트는 금식·철야·기도·고행과 같은 참회 행위들은, 육(Fleisch)에는 고향(Heimat)이요 영(Geist)에는 이방(Fremde)인 이 지상에서 강한 육을 제어하고 약한 영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라면서, “사랑의 고삐”(Zaum der Liebe)를 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육과 싸우는데 수천 배나 더 낫다고 답한다.

 

사랑으로써 그대는 그것(육)을 가장 빨리 극복하며, 사랑으로써 그대는 그것에 가장 무거운 짐을 지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우리를 겨냥해 노린 것 가운데 사랑만한 것이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바로 낚시꾼의 낚시와도 같기 때문이다. 낚시꾼은 고기가 낚시에 걸리기까지는 잡을 수 없다. 일단 낚시에 걸렸다 하면, 고기를 잡는 것은 보장된 일이다. 이리 꿈틀 저리 꿈틀 아무리 버둥대 봤자, 낚시꾼은 전혀 끄떡없고 고기는 빠져나갈 수 없다. 사랑도 이와 같다고 나는 말한다. 사랑에 의해 잡힌 자는 가장 강한 사슬을 끌고 다니지만 하나의 즐거운 짐을 진 자이다. 이 달콤한 짐을 진 자는 사람들 모두가 할 수 있는 그 모든 참회 행위와 고행을 통해서보다도 더 많이 그리고 더 멀리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또 그는 심지어 하느님이 그에게 가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즐겁게 감내하고 견딜 수 있으며, 사람들이 그에게 어떤 악을 행해도 너그럽게 용서할 수도 있다. 이 사랑의 달콤한 유대만큼 그대를 하느님께 가까이 가져다주고 하느님을 그대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없다. 이 길을 발견한 자는 다른 길들을 찾을 필요가 없다. 이 낚시에 매달려 있는 자는 손과 발, 입, 눈, 가슴 그리고 사람이 가진 것 전부가 언제나 하느님의 것이 될 수밖에 없도록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육의 힘을 이기는 데는 온갖 참회 행위나 고행보다 사랑의 실천이 더 효과적이며, 사랑은 행복한 짐, 자유로운 묶임이라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낚시는 “걸리면 걸릴수록 더 자유롭다”.

 

엑카르트는 어디까지나 중세의 아들이었다. 그의 영성이 아무리 활동적 삶의 영성이라 해도 그에게서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나 정치적 관심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어디까지나 영성가요 신비가였지 중세적 질서를 뒤집으려는 혁명가나 예언자적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미트(Mieth)의 지적대로, 그에게서 발견되는 명성과 행위의 통합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중심적 삶을 정화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사회와 세계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하는 활동적 영성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적 영성과 사회적 실천에 지니는 의미는 여전히 크다.

엑카르트는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종교적 경험이나 행위에 집착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일상적 삶에 매몰되지도 않으며, 성과 속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영혼의 근저에 뿌리박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참다운 자유의 길을 가르쳐 준다. 지칠 줄 모르는 왕성한 활동의 연속이었던 그의 삶 자체가 이를 증언한다. 평생을 엑카르트 연구에 헌신한 퀸트의 말을 인용하며 이 책을 마친다.

 

“죽으면 살리라!”(Stirb und werde!)라는 엑카르트의 명령은 결국 “인간이여, 본질적 되어라, 그대 자신을 알고 자신이 되어라, 즉 그대의 가장 내적이고 진실한 본질을 채우고 완성하라!”는 것 외에 무슨 뜻이겠는가? 초탈과 초연의 길을 타고 그대의 작은 “나”의 볼모의 껍질과 각질을 돌파하여 그대 자신의 존재의 근저로 내려가라. 그러나 거기 저 밑, 그대 영혼의 근저에는 신적인 것이 거하며 하느님 자신의 힘이 놓여 있다. 이 하느님의 힘과 하나 되는 가운데서 그대는 본질적 활동을 향한 강한 충동을 경험할 것이며, 그대는 창조자가 되어 의로운 자로서 그대의 덕 하나하나로부터 하느님이 탄생할 것이며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덕 하나하나뿐 아니라, 의로운 자를 통해 의 가운데서 행해지는 의로운 자의 일 하나하나가 아무리 사소해도 그것으로 인해 하느님은 기뻐하시고 실로 한껏 기뻐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근저에는 기쁨으로 어쩔 줄 모르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참조: 길희성, 마이스터 엑크하르트의 영성 사상, 분도출판사, 271-294쪽(8장, 하느님 아들의 삶)]

 

 

우리가 매일 지내는 매일 미사 중에서 성체성사는,

 

가장 평범하면서도 신적인 행위입니다. 이것은 예수가 전해 준 것입니다. 너무나 인간적이면서 한편으로 너무나 신적입니다. 대단히 친숙하면서도 신비롭습니다. 섬세하면서도 무한합니다. … 우리에게 가까이 오고자 하시는, 당신과 우리 사이에 그 무엇도 끼어들어 갈라놓을 수 없을 만큼 가까이 오시어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지게 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성사입니다.

 

우리가 매일 세 끼니 식탁에서만 우리 생명 유지와 지탱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당신 자신의 생명으로 살아 나아가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인 당신 자신의 몸과 피를 우리 생명을 위하여 내어주신 하느님 식탁의 만찬인 것입니다.

 

성체성사에 관한 나웬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하면 이렇습니다. 성체성사는 생명에 감사드리는 축제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의 신적 초월성은 물론이거니와 그 꾸밈없고 인간적인 속성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하고 인간적인 행위로써 인류와 그들의 노고와 지구상의 모든 비극을 아우릅니다. 사람들은 날마다 함께 음식을 먹고 마시기 위해 친구나 가족과 함께 식탁에 모입니다. 이웃과 낯선 이들을 맞아들여 축제를 열고 식탁에 둘러앉아 문제를 해결하기도 합니다. 함께 음식을 나누는 자리에서 우리는 삶을 깊이 성찰하고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식탁은 조화와 일치의 장소입니다. 식탁은 친교, 즉 이 세상과 사람들과 함께 생명을 나누는 행위를 상징합니다. 우리 곁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삶과 인간됨을 올바르게 인식하도록 도와줍니다. 우리는 식탁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 한층 더 가까워집니다. 친교 예식을 함께 나눔으로써 우리의 관계는 변화합니다.

 

예수께서 주관하시던 식탁은 우리의 식탁과 매우 닮았습니다. 예수는 우리를 친구로 맞아들이시고,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시며, 친교의 기초를 형성하는 빵과 잔을 마련해 주십니다.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예수와 하느님 아버지와도 크나큰 친교를 나눕니다. 그리고 서로 경계를 늦추게 됩니다. 이 단순한 체험에서 우리는 예수와 조화를 이루는 것은 물론, 하느님의 식탁에 초대받은 모든 사람과도 조화를 이룹니다. ‘인간 노력의 결실이며 포도나무의 열매인’ 빵과 포도주는 모든 피조물의 노력과 그 결실을 아우르는 일치와 조화의 결정체입니다. 감사 기도를 바치며 빵과 포도주를 들어 올릴 때마다 모든 피조물은 새로이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성공, 슬픔, 불안, 소망을 안고 식탁에 모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의 삶에 대한 탐구이며 축복입니다.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위안을 얻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 성사의 개인적 의미는 종종 무시되어 왔습니다. 미사에서는 성체성사의 공적·조직적 특성만 너무 강조되었기 때문에, 개개인 삶과의 연관성을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이 균형과 조화를 헨리 나웬이 이루어낸 것입니다. 식탁에 앉아 잔을 들 때, 우리는 분노와 소외감을 뒤로하고 참여와 감사에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여정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자신이 마실 잔, 자신의 삶,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우리들 각자의 영적·개인적 체험을 표현하기 위한 매개체가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잔을 축복하기 전에 우리는 그것을 들어 올려 우리가 누구인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생각합니다. 잔에 담겨 있는 것은 우리 각자의 삶이고 저마다의 특별한 상황입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삶을 충실히 사는 것,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 모두 “너도 이 잔을 들겠느냐?”라는 예수의 물음에 대한 응답인 것입니다.

 

매일 드리는 미사 끝에 집전 사제는 “이제 미사가 끝났으니 너희는 가서 이 예식으로 거행한 이 모든 것을 일상생활 자체로 거행하라”고 우리 각자를 파견하십니다. 역사적 인물이셨던 예수 그리스도 같은 일상 삶을 살아 나아갈 수 있을 때, 주님의 기도문처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시고, 그것을 지속·연장하시기 위해 최후만찬, 곧 성체성사를 만드시고 당신을 내어주시어 당신과 함께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헨리는 아래로 내려가는 길, 낮아지는 길의 핵심을 이루는 비밀은 예수와 똑같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하고 가난해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이 그리스도 신비의 일부였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는 복음서를 이렇게 받아들였습니다. 복음서란 오래전에 하느님께서 예수를 통해 이루신 영성을 알려 주는 책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자신의 삶을 살고 하느님을 발견할 것인가에 대한 청사진이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곧 복음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오래전부터의 묵상을 실현시킨 것입니다. 예전부터 헨리는 성체성사가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모델임을 알고 있었고 그렇게 가르쳐 왔습니다. 성체성사에서 우리는 거룩한 빵이 집어 올려지고··· 축복받고··· 쪼개지고··· 나누이는 것을 봅니다. 성체성사의 이 모든 행위는 예수의 삶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부름을 받으셨을 때 들어 올려지셨습니다. 그분은 세례 때 축복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쪼개지고, 세상에 나누이셨습니다.

 

헨리는 이 신비가 어떻게 우리의 삶과 연관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에게서 같은 방식으로 한 번 더 구현되는지 일깨워 줍니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실 때 들어 올려지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알아보시고 사랑하실 때 축복을 받고, 상처와 불행으로 고통당할 때 쪼개집니다. 그리고 우리도 나누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세상에 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성체성사의 핵심, 복음서의 핵심, 나웬이 그리스도 교회에 전해 주는 메시지의 핵심으로 이끄는 심오하고 아름다운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삶과 우리의 삶이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아래로 내려가는 이 길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새로운 길인 것처럼, 우리의 삶과 그리스도의 삶은 성체성사라는 중심 전례를 통해 서로를 비추어 준다는 것이 나웬의 가르침입니다.

 

성체성사야말로 아래로부터 영성생활의 핵심인 사랑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사랑은 자기 자신을 전부 내어주는 것으로, 이 성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사랑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래로부터 영성생활에 결론이라 할 성경 말씀입니다(필리 2,1-11).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눈다면, 뜻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아래로부터 영성 신앙생활은 성령으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역사적 인물 예수 그리스도같이 살아 나아가기입니다. 즉 아래로부터의 영성 신앙생활은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와도 함께 계시는 성령과 함께 하느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역사적 인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기입니다.

 

헨리는 아래로 내려가는 길, 낮아지는 길의 핵심을 이루는 비밀은 예수와 똑같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하고 가난해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이 그리스도 신비의 일부였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는 복음서를 이렇게 받아들였습니다. 복음서란 오래전에 하느님께서 예수를 통해 이루신 영성을 알려 주는 책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자신의 삶을 살고 하느님을 발견할 것인가에 대한 청사진이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곧 복음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오래전부터의 묵상을 실현시킨 것입니다. 예전부터 헨리는 성체성사가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모델임을 알고 있었고 그렇게 가르쳐 왔습니다. 성체성사에서 우리는 거룩한 빵이 집어 올려지고··· 축복받고… 쪼개지고··· 나누이는 것을 봅니다. 성체성사의 이 모든 행위는 예수의 삶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부름을 받으셨을 때 들어 올려지셨습니다. 그분은 세례 때 축복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쪼개지고, 세상에 나누이셨습니다.

 

헨리는 이 신비가 어떻게 우리의 삶과 연관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에게서 같은 방식으로 한 번 더 구현되는지 일깨워 줍니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실 때 들어 올려지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알아보시고 사랑하실 때 축복을 받고, 상처와 불행으로 고통당할 때 쪼개집니다. 그리고 우리도 나누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세상에 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성체성사의 핵심, 복음서의 핵심, 나웬이 그리스도 교회에 전해 주는 메시지의 핵심으로 이끄는 심오하고 아름다운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삶과 우리의 삶이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아래로 내려가는 이 길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새로운 길인 것처럼, 우리의 삶과 그리스도의 삶은 성체성사라는 중심 전례를 통해 서로를 비추어 준다는 것이 나웬의 가르침입니다.

 

예수의 삶과 죽음에 대한 네 가지 이야기(네 복음서)를 보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더욱 잘 깨닫게 되면서 예수는 그 사명이 당신을 더욱더 가난하게 만들 것임을 분명히 깨달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을 위로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 친히 가난한 사람이 되심으로써 위로를 주시고자 파견되셨다. 가난하게 되는 것은 단지 집과 가족을 버리고 떠돌이 신세가 되거나, 거듭 박해받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단다. 친구를 잃고, 성공을 포기하고, 심지어 하느님 현존에 대한 인식마저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마침내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시어 큰 소리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외치셨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가히 어림잡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예수께서 가난의 정점과 하느님 사랑의 정점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Nouwen, Letter to Marc about Jesus, 44-45쪽) .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받으실 때, 하늘이 열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는 선언과 함께 네가 누구든지 너는 “나의 사랑 받는 아들”임을 확인하셨다. 그리고 우리를 그 하느님 아버지께로 이끄시고 격려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아래로부터 영성생활로 안내하십니다. 헨리의 『사랑받는 사람의 삶』을 통해서 자기 친구에게 말합니다. 이 책에서 헨리는 들어 올려지고 축복을 받고 쪼개지고 나누이는 성체성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과, 특히 예수께서 받으신 축복에 대해 프레드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전통에 속해 있건 아니건 간에, 모든 인류에게 가장 깊은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는 내적 확신을 얻게 되었네. 프레드, 내가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너는 내 사랑하는 사람이다”라는 말뿐이라네. 이 사랑이 지닐 수 있는 힘과 온유함으로, 자네에게 들려오는 이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네. 나의 유일한 소망은 자네의 존재 구석구석에 이 말씀이 울려 퍼지는 것이라네. “너는 내 사랑하는 사람이다.”(Henry Nouwen, Life of the Beloved: Spiritual Living in a Secular World, 25-26쪽)

 

[참조: 마이클 오래플린, 하느님의 연인 헨리 나웬, 분도출판사, 142-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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