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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강

나아가는 말

우리 피정의 집에서 피정하는 사람들을 아래로부터의 영성으로 지도하면, 그들은 이 영성에 의해 상당한 자유와 치유를 경험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지금까지 추구해 온 위로부터의 영성에 의해 압박받고 때로는 병들게 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에게 지금까지 추구해 온 위로부터의 영성이 본래 좋은 것이란 사실을 주지시키려고 거듭 시도한다. 위로부터의 영성은 그들로 하여금 매우 강하게. 열심히 수행해 나갈 것을 강요했다. 이것을 회화적으로 표현하면, 위로부터의 영성은 한 마음씨 나쁜 사람이 싱싱하고 아름다운 어린 야자수가 더 이상 자라지 못하도록 그 야자수 위에 올려놓은 장애물과도 같다. 그런 일을 저지른 몇 년 후에 그가 그곳에 다시 와 보니 그 야자수는 그 지역에서 가장 훌륭하게 잘 자라 있었다. 그 야자수는 그 장애물 때문에 뿌리를 더욱더 깊이 박으며 성장을 계속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이상적 요소들은 자주 우리가 뿌리를 더욱더 깊이 뻗어나가도록 강요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지도받는 사람들은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그 길을 계속 가는 것은 그들에게 해로움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늦어도 삶의 중반기를 지나기 이전에 이와는 반대쪽의 축인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이해하도록 시도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제 이들은 하느님의 음성을 그들 자신의 마음과 그들 삶의 고통에서, 그들의 느낌과 꿈 안에서, 그들의 육체 안에서 듣고 이해하여 실천해 나가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제 이들은 자신들을 꽉 조여 압박 하는 옷을 벗어버려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느님께서 그들 안에 만들어놓으신 그들의 원래 모습을 꽃피워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피정 지도를 받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지금까지 수행해 온 자기수련과 이상적 요소들은 그들에게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함을 인식하도록 하여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내어드리고 하느님 안에 머물도록 했으므로, 그것이 그들에게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또한 우리 과제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위로부터의 영성 없이는 그들이 그렇게 쉽게 막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막다른 골목에서 자신에게 채찍질을 가하면서 힘으로 그곳을 통과하려고 시도한다면 그것은 매우 슬픈 일이 된다. 그렇게 될 때, 그것은 머리로 벽을 들이받는 것과 같아 피를 흘릴 것이며, 정말 많은 피를 흘리는 지경에까지 이를지도 모른다.

 

막다른 길, 자신의 무능을 인식한 상황에서 우리는 더 이상 투쟁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우리의 무능함에서 구출해 주실 때까지 소리 높여 외쳐대는 것뿐이다. 만약 우리가 무능함과 화해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참으로 만나게 되는 장소가 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빈손으로, 지친 몸으로, 온몸이 긁히고 다친 상태로, 우리를 구원하고 자유롭게 하는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두 팔을 들고 항복하게 되며, 우리의 무능 저 밑바닥에서 하느님의 능력에 가득 찬 은총과 사랑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막다른 상태에 접해서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상승시키려고 하는 것을 포기한 그곳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참으로 올바르게 이해하게 된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로가 이해한 것과 같이 하느님의 은총이 참으로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해하게 되며,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우리를 완전에로 이끌어가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참조: 안셀름 그륀, 아래로부터의 영성, 147-149쪽 참조)

 

코로나 시대를 넘어서

 

바야흐로 그때에 비로소 아래로부터의 영성 신앙생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비대면 신앙생활 대안, 뉴노멀 성령의 시대를 살아 나아가는 새 시대 징표를 따르는 우리 신앙생활을 전개해 나아갈 수 있다. 우리들의 믿음, 우리들의 신앙생활이란, 의심과 그 어떤 고난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충실하게 따라 살아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앙생활의 힘과 원동력은 그저 확고한 신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심과 불분명하고 불확실함은 견디고 주님 사랑의 인력과 중력의 무게를 버티어내면서 이끌려가며 믿음, 희망, 사랑의 삼덕을 수행하는 삶을 잃지 않는 능력과 힘에 있다. 그런데 우리들 믿음의 생활과 희망의 생활도 이 세상에서 다 지나가지만 우리들의 사랑의 신앙생활만은 영원히 남게 된다. 그 사랑의 신앙생활, 사랑의 성령이 함께하는 아래로부터의 영성 생활로 이 비정상의 세계, 코로나19 시대를 극복해 나아갈 힘을 얻어야 한다.

 

지금은 인공지능의 시대, 디지털 시대다. 언젠가 자신을 ‘디지털 노동자’로 소개한 한 신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가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에서 발간하는 <함께하는 사목>지에 ‘디지털 세상에 교회는?’이라는 물으면서 이렇게 제안하고 있다.

 

하루에 만들어지는 데이터의 양은 성경책으로 따지면 팔경 사십조 권이 됩니다. 데이터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데이터 바로 빅데이터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양의 크기도 크기지만, 빅데이터는 원하는 정보의 패턴을 아는 데 필요한 경우의 수가 중요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창세 1,10)처럼, 이 시대 디지털과 데이터로 읽고 움직여지는 지금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소셜 미디어의 알림은 그야말로 전 세계를 온라인(Online) 세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온라인은 세상을 연결하고 이렇게 모아진 데이터가 세상을 엿보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패턴을 서버와 클라우드로 수집해 빅데이터로 활용하게 된 것입니다.

플랫폼과 데이터 시대를 교회 안에서 품을 수는 없을까요. 신앙생활에 온라인 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면, 보다 적극적으로 교회가 에스앤에스를 수용하면 어떨까요. 다만, 우선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데이터 시대에 맞는 디지털 격차 해소와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이 필요해 보입니다. 디지털 접근성이 세대별로 다른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이로 인한 격차를 줄이기 위해 교회가 지속적인 격차 해소를 위한 교육을 진행해보면 어떨까요. 디지털 리터러시에 대한 중요성처럼 반드시 교회가 이 땅의 빛과 소금으로 평화와 정의를 펼치는 디지털 시대의 소명을 갖는 것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먼저, 교회 구성원의 소리를 나누고, 조정하는 천천히 그러나, 세심한 나눔에 대한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소모임을 통해서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교회 안에서 만들어가는 교회만의 SNS다움이라고 할까요. 나와 가족을 위해, 벗을 위해, 모임을 위해, 사제와 수도자를 위해, 교회를 위해, 세상을 위해 온라인으로 기도·나눔·소통하는 관계로 가능한 것부터 권해 드리며, 우리 교회에서 창조보전을 위한 ‘아나바다’(‘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자’)를 SNS로 해보면 어떨까요.

데이터로 수집되고, 돈으로 바뀌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온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고 이루어지도록 교회 안에서 디지털 세상을 알고 지혜롭게 쓰이도록 해야 합니다. 빅테크·플랫폼 기업과는 다른 빛과 소금으로 쓰이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실천하는 지혜로, 삶에서 실천하는 지금 여기의 교회를 희망해 봅니다.

 

디지털 세상에 젊은 세대를 잃어가는 교회는 이런 희망과 제안에 응답해야만 한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우리는 대면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본당 공동체 신앙생활에서 대면 예비자교리나 견진교리 등 선교활동, 지속적인 신앙생활에 손을 놓았다. 그런데, 어려운 현실에서 손을 놓아버리는 무책이 상책일 수는 없다. 젊은이 중에는 SNS으로 공동 신앙생활을 위한 대안을 찾아나간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들이 찾고 있는 디지털 시대의 징표는 과거의 신앙 표징과는 전혀 다르다. 엠마오로 가는 길,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낯선 나그네 모습으로 당신 제자들과 함께 걸어가셨다(sinodalitas). 자주 언급하지만, ‘성가정생활캠프’(HFC)도 부활하신 주님과 낯선 이웃들과 디지털 온라인 세상에서 함께 걸어가면서, 공동체 신앙생활을 영위하려는 노력이다.

 

 

더불어 함께 찾아가는 사랑의 빛

 

당신의 삶에서 가장 멋지고 기쁨은 무엇입니까? 라고 누군가 물으면, 하느님 나라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기쁨이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가 낯선 나그네, 부활한 주님을 만나서 비로소 삶의 모든 해답을 찾았듯이 말이다. 주님께서 성경 말씀을 풀어주셨을 때, 그들 마음에 뜨거운 성령의 불길이 댕겨져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았듯이 말이다.

 

아래로부터 영성 생활은 일단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기 위한 가장 분명한 삶의 표양은 요셉과 마리아의 성가정 생활 안에서 하느님이시며 인간으로 살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 각자가 자신의 가정생활에서도 아래로부터 영성을 구현하며,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인간 삶의 방식에 관한 책, <심플하게 산다>를 쓴 도미니크 로로 는 그 책의 결론에서, 소유와 존재의 삶에 관한 우리의 태도를 묻는다. 그것은 마치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는 ‘심플한 성가정 생활’과 같아 보인다.

 

이 세상에서 “우리 인생에서 의미를 주는 단 하나의 색은 사랑의 색깔이다. 프랑스 표현주의 화가 샤갈에게 파란색은 신비를 담은 생명의 빛깔이었고, 그것으로 사랑의 색을 더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예수님의 성가정이야말로 아래로부터 영성인 성령의 생명과 사랑의 색깔이 빛을 내고 있는 곳이라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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