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강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사랑의 십자가로서 내 사랑은 달고 가벼운 짐이다

에세이집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에서 박완서 작가는 자녀 사랑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이를 묵상해본다(379-381쪽).
평범하게 키우고 있다. 공개해서 남에게 도움이 될 만한 애 기르기의 비결 같은 것도 전연 아는 바 없다. 그저 따뜻이 먹이고 입히고, 밤늦도록 과중한 숙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숙제를 좀 덜 해가고 대신 선생님께 매를 맞는 게 어떻겠느냐고 심히 비교육적이고 주책없는 권고를 하기도 한다.
일전에 어떤 친구한테 지독한 소리를 들었다.
“너같이 애들을 막 키워서야 이다음에 무슨 낯으로 애들한테 큰소리를 치겠니? 그 흔한 과외 공부 하나 시켜 봤니? 딸이 넷씩이나 있는데 피아노나 무용이나 미술 공부 같은 걸 따로 시켜 봤니?”
그때 그 친구의 모멸의 시선이 지금 생각해도 따갑다. 아닌 게 아니라 내 애들 중 예능 방면의 천재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부모를 알량하게 만나 묻혀 있는 게 아닌가 싶은 두려움이 간혹 들긴 하지만 이다음에 ‘큰소리’치기 위해 지나친 극성을 떨 생각은 아예 없다.
아이들의 책가방은 무겁다. 그러나 단순한 책가방의 무게만으로 한창 나이의 아이들의 어깨가 그렇게 축 처진 것일까? 부모들의 지나친 사랑, 지나친 극성이 책가방의 몇 배의 무게로 아이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거나 아닐지.
“내가 너한테 어떤 정성을 들였다구. 아마 들인 돈만 도 네 몸무게의 몇 배는 될 거다. 그런데 학교를 떨어져 엄마의 평생 소원을 저버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장가들자마자 네 계집만 알아. 이 불효막심한 놈아.”
이런 큰소리를 안 쳐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만 아이들을 위하고 사랑하리라는 게 내가 지키고자 하는 절도다. 부모의 보살핌이나 사랑이 결코 무게로 그들에게 느껴지지 않기를, 집이, 부모의 슬하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들은 예쁘다. 특히 내 애들은. 아이들에게 과도한 욕심을 안 내고 바라볼수록 예쁘다.
제일 예쁜 건 아이들다운 애다. 그다음은 공부 잘하는 애지만 약은 애는 싫다. 차라리 우직하길 바란다. 활발한 건 좋지만 되바라진 애 또한 싫다.
특히 교육은 따로 못 시켰지만 애들이 자라면서 자연히 음악·미술·문학 같은 걸 이해하고 거기 깊은 애정을 가져 주었으면 한다.
커서 만일 부자가 되더라도 지기가 속한 사회의 일반적인 수준에 자기 생활을 조화시킬 양식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부자가 못 되더라도 검소한 생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되 인색하지는 않기를. 아는 것이 많되 아는 것이 코끝에 걸려 있지 않고 내부에 안정되어 있기를. 무던하기를. 멋쟁이이기를.
대강 이런 것들이 내가 내 아이들에게 바라는 사람 됨됨이다. 그렇지만 이런 까다로운 주문을 아이들에게 말로 한 일은 전연 없고 앞으로도 할 것 같지 않다. 다만 깊이 사랑하는 모자 모녀끼리의 눈치로, 어느 날 내가 문득 길에서 어느 여인이 안고 가는 들국화 비슷한 홑겹의 가련한 보랏빛 국화를 속으로 몹시 탐내다가 집으로 돌아와 본즉 바로 내 딸이 엄마를 드리고파 샀다면서 똑같은 꽃을 내 방에 꽂아 놓고 나를 기다려 주었듯이 그런 신비한 소망의 닮음, 소망의 냄새 맡기로 내 애들이 그렇게 자라 주기를 바랄 뿐이다.(1973년)
나는 박완서 작가의 <사랑의 무게로 안 느끼게>를 읽고 ‘내 짐은 달고 가볍다’라는 예수님 사랑의 무게 말씀을 묵상하게 된다. 예수님 사랑의 무게는 당신 자신이 오로지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 사랑의 짐 모두를 당신이 도맡아서 지고 가시기 때문이다.
흔히 ‘라떼세대’인 우리 세대 부모님의 사랑은 무게로 안 느껴지게 다가왔다. 부성애와 모성애, 사랑의 십자가 사랑으로 자녀들을 길러주신 부모 사랑의 기억과 추억이 있다. 가정에서 희생과 사랑의 교육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바야흐로 오늘에 이르러서는 부모들은 공부해라, 수능시험 잘 봐서 일류대학가라, 특기 살리려면 학원가라고 하면서, 사랑에 조건을 달고 부담을 준다. 애착과 집착으로 부모 자신이 원하는 주문생산품 만들려하는 것 같다. 박완서 작가의 부모상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랑처럼, 무게로 느껴지지 않는 내리사랑이다. 그러한 조건없는 내리사랑은 엄청난 가격의 무게가 느껴지는 상표 달린 소위 대치동학원가 부모사랑의 무게와는 크게 다르다.
이같이 부모들이 원하는 가치에 부합하는 인간이 되지 못할 때는, 자식은 자신도 사랑할 줄 모르고 무한경쟁에 희생제물이 되어 남들도 사랑할 수도 없게 되어 버린다. 손 에드워드 신부는 <조건 없는 사랑>에서 이렇게 지적한다(96-100쪽).
하느님께서 우리는 먼저 사랑하시고, 또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드셨으므로 우리는 사랑스럽고 또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미워하는 것은 겸손과 모순이 되며, 진리와도 모순이 된다.
사랑의 큰 계명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느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함이다. 이웃사랑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미소한 형제중 하나에게 베풀 때마다 곧 내게 베푼 셈이다.”
(마태오 25,40)
마찬가지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교리상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걸작이며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와 이유를 자기 안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행위가 된다.
심리상으로도 자기를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남을 또한 사랑할 수 없다. 자기 안에 있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요소와 자격을 인정하지 않으면 남에게 있는 것(요소와 자격)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도 “이웃처럼 사랑하라”하시지 않으시고, “너처럼 이웃을 사랑하라”하시지 않으셨던가?
위대한 그레시아의 철인 소크라테스의 “네 자신을 알라”라는 명언은 이런 뜻에서도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알면 알수록 남을 더 잘 알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온 인류를 알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남을 또한 더 사랑할 수 있다.
그래소 신부가 쓴 “신약에서의 영적 생활”이란 책자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우리는 발견한다.
“형제적 사랑의 계명은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건제 조건으로 삼고 있다.”(“너 자신처럼”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우리의 이웃인 사랑 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사랑”은 함축적으로 우리에게 부과된 명령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실제로 어디에 존재하는가? 우선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과 정직하게 대면하고, 우리 자신을 알고. 정확하게 평가하는 데에 근거를 둔다.
나 자신을 사랑함은 나 자신의 능력의 한계들 알아내고, 나 자신을 피조물로서 받아들이고. 제한된 나 자신, 그러면서도 독자적(獨自的) 실재(實在) 속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모습으로서의 나 자신은 받아들임을 뜻한다.
또한 인간의 공통적인 본성(本性) 때문에 나의 어두운 면(面), 또는 내가 저지르지 않았지만 다튼 사람들처럼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악의 가능성도 받아들임을 뜻한다. 또한 이 사랑 즉 참된 “자기 사랑”은 형제적 사랑보다 시간적으로 앞서는 것이라고 보면 안 된다. 나 자신의 발견과 나 자신의 인격 발전은 이웃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참된 통회는 소극적인 자기염오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인자하신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 허약한 그때에 오히려 더 굳세다”(바오로 사도).
우리는 범죄한 후에 무엇을 느끼고 뉘우치는가?
보통으로 우리가 법을 거스렸다면 더 못된 사람으로 전락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후회하고 자기 염오에 빠지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좀더 고차적이고 통회의 본 의미에 타당한 느낌과 뉘우침은 무엇이겠는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무시하고 거절하고 받아드리지 못했다는 것을 느끼고 뉘우치고 아파하는 마음이 그분의 사랑과 용서를 훨씬 더 수월하고 신속하게 이끌어 들이는 첩경이 아니고 무엇이라?
자기 자신을 조건없이 사랑할 수 없게 되면 그런 인간은 범죄한 후에 습관적으로 자기를 염오하던 기분이 사실 무가치함을 깨달아 그러한 마음의 상태에서 빠져나오려 한다. 자기 염오로부터 흘러나오는 이런 감정들은 흔히 참된 의미의 통회에시 아주 먼 거리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방비책을 조장시키는 결과 밖에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많은 죄를 유도해 내는 역효과적인 방법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 이유는, 죄악에 빠진 다음에 자기 염오의 감정에서 빠져나와 다시 용기를 내어 새 출발을 하지 못하고 그 감정에 머물러만 있게 되면, 급기야 이 기분들은 점차 자기 학대와 실망으로 이끌리게 되어, 자포자기의 결과를 초래하고 말기 때문이다. 비유로 말하면, 독약을 마신 사람이 해독제를 쓰는 대신에 다시 독약을 마시는 어리석은 짓과 같은 현상이다.
죄를 범하는 한 가지 큰 이유는 자기 염오로 말미암는 것인데 여기에서 해엄쳐 나오지 못하는 한, 죄에서 멀어질 수는 없다. 따라서 쓸 데 있는 자기 학대의 결과는 결국 더 많은 죄들을 번식시키는 온상의 역할을 할 따름이다.
“남을 사랑하라”는 계명 안에는 “남을 용서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남을 용서해 주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용서해 줄 의무가 있다. “남을 사랑하라”는 계명 안에는 “남을 참아 주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참된 의미에서의 사랑이라면 남에게 하는 것처럼 나 자신의 잘못을 또한 용서해 줘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째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는가? 죄에 빠진 상태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의심하는 상태에 주저앉아 있는 것이 죄에 빠지는 그 자체보다 더 악한 것이 아니겠는가?
사랑의 학문에 있어서의 위대한 전문가이신 성녀 소화 데레사의 다음 말씀은 우리의 견해를 정당화시켜 주.기에 넉넉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겸손한 마음으로 낮추고 우리 자신이 지닌 결점을 온화한 마음으로 참아 견디는 것만으로 넉넉하다. 그것은 참된 성덕이다. 만일에 우리의 결점이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드린 위험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겸손해지기 위해서 고의로 결점을 갖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 영성생활에 있어서 자기사랑이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자기완성, 즉 완덕을 닦고서 자기사랑와 이웃사랑 할 수 있는 자기사랑의 능력 주체가 되는 것이다.
자기 부모의 사랑의 무겟값에 부응하지 못한 값싼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식은 무가치한 존재로 여겨, 그들의 무의식 속에는 심리적 저항감만 생긴다.
그는 불안정과 사랑의 굶주림 속에서 몹시 외롭다. 우정의 상통을 가로막는 담 속에 있는 요안은 친구의 정을 못내 그리워한다. 요안의 사랑과 우정에의 지나친 갈망은 그를 절제없는 애착에 쉽게 빠지게 한다. 그의 사랑은 모든 것을 사로 잡으려는 경향으로 기울게 되고 편정에 흐르게 되며, 질투심에 불타는 사랑, 즉 독점적 사랑에 빠지게 된다. 더군다나 사랑과 우정을 갈망하는 그의 욕정적 경향은 순결을 거스리는 유혹에 까지 대담하게 빠져 들어가기 쉽다. “조건없는 사랑”을 받지 못한 요안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무지 사랑을 받지 못할 것으로 여겨, 자연 마음은 점점 더 괴로워만 지고, 사랑받고 싶은 충동은 감정적으로 보통 사람보다 훨씬 강하게 된다. 이 충동은 육체적인 것에 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람들을 피하는 대인기피증을 지나 고독한 자신이 만든 감옥의 죄수가 되어 사회적 인간으로 성장할 수 없게 된다.
끝없는 사막 길에서 갈 곳 몰라 방황하는 외로운 나그네와 같이 요안은 어쩔 수 없는 고독 속에서 신음하며 몸부림친다. 이때의 요안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고독이라는 사막에서 잠시라도 쉴 수 있는 곳을 찾게 되는 것이다. 즉, 고독이란 갈등에서 헤어나는 수단으로 이상적인 친구를 찾게된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간단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더욱더 큰 괴로움과 고독 속에 빠지게 마련이다. 그 친구들이 한결같이 자기의 기대에 어긋나거나, 혹 그 친구가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면 공연한 질투심이 일어나 얼마 안 가서 그 친구와도 절교하게 된다.
이러한 행동의 되풀이는 그가 자기 자신부터 사랑할 수 없는 한 계속될 것이다. 그가 일시적이나마 찾았던 친구 역시 불안전하고 약한 인간임에 틀림이 없으므로 요안의 기대에 어긋나고 실망을 가져다주었다. 그가 원하고 바라는 친구는 그 친구라는 인간 자체가 아니라, 그 친구가 지닐 수 있는 바 이상형에 불과했던 것이다. 즉, 요안의 상상의 범위에 서민 가능한 하나의 환상이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 때문에 고독이라는 상처는 어떤 친구로 인해서 어루만져지기는커녕 더 심한 충격만의 반복으로 점점 더 깊이 곪게 마련이다. 이러한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아예 친구가 없는 것이 더 안전하고, 덜 괴롭다고 단정하게 된다. 우정이란 위험한 것이라고 결론지은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고립 상태에 빠지게 된다.
나는 잘산다는 미국 사회에 어린 학생들의 총기사건이 빈번한 것도 자기사랑에서 있다고 본다. 어린 학생이 다른 학생인 인간들은 나와 상관없고 사랑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발생하는 것이라 본다. 사랑이 없어진 상태, 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자포자기의 결과이다. 우리 인간에게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내리사랑, 무게를 안 느끼게 하는 사랑을 받고 그 내리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동물적, 야수적 본능만 남을 수 있다. 악령의 하수인이 될 수 있다고도 성서는 전한다.
하느님의 내리사랑과 무게로 느끼지 않는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이들이 우리 사회에 비인간적 사건사고를 일으키기도 한다. 사랑을 무게로 느낀다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도 그대로 똑같이 느끼게 만든다. 그 무거운 사랑의 무게에 짓눌려 자포자기의 상태로 빠지기도 한다. 나의 사랑은 감미롭고 가볍다고 하신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짐을 함께 지고 가시는 십자가 사랑이다. 이런 예를 들 수 있겠다. 자기 키와 엇비슷한 동생을 업고 가는 한 아이에게 무겁지 않냐고 묻자, “웬걸요. 얘는 내 동생이라 별로 무겁게 느껴지지 않아요!”라고 답한다. 그렇다! 자기 동생 사랑 때문에 동생의 무게는 감미롭고 가볍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우리 부모들은 기꺼이 자신의 분신인 자식들이 무게로 느끼지 않게 하려면 내리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갔다.
시성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은 희망이라곤 전혀 없는 곳이라 했다. 바로 우리 사회 자체가 날로 사랑과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비인간화의 사회로 급변하고 있다. 지옥도가 그려지고 있는 이 현실이 안타깝다. 박완서 작가는 큰소리를 안 쳐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만, 아이들을 위하고 사랑하리라는게 그가 지키려는 절도라 했다. 부모님의 보살핌이나 사랑이 결코 무게로 느껴지지 않기를 부모의 슬하나 집이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 되기를 바랄뿐이다. 사랑의 무게를 안 느끼게 하는 것에서 깊은 모성애와 부성애를 본다. 그런 세상의 사랑을 희망한다.
사람은 두 개의 몸무게를 갖고 살아간다. 저울로 달 수 있는 무게와 마음으로 다는 시간의 무게다. 그래서 마음이 풍부하고 인격있는 사람을 보고 무게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이어령의 <말>, 21쪽). 예수님 시대 바리사이파들과 율법학자들은 자기 어깨에 짐은 하나도 지지 않으면서, 타인에게 무거운 짐을 강요했다. 이런 인간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말도 없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토록 비인간화된 가장 큰 원인은 자신의 짐은 외면한 채, 타인에게 무거운 짐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무거운 짐의 무게로 질식하기도 한다. 이태원참사가 그 상징적 사건이라 본다. 이태원참사나 세월호참사 모두 국민을 보호하겠다는 대통령은 물론 그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책임 없는 그 두 대통령은 결국 탄핵당하고 파면되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와 같은 인간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