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1강
‘나를 살리기도 망치기도 하는 머릿속 독재자’의 지배

[뇌과학계의 칼 세이건, 데이비드 이글먼의 저서 <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알에치코리아, 2024)는 나 자신과 이 세상을 다시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우리는 마음대로 행동하지만, 마음이 작동하는 과정은 우리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채 이루어진다. 마치 우리 모두가 각자 자신이 내면에는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있다는 듯이 말이다.” 이글먼의 견해를 나눈다.]
에고는 오랫동안 조건 지어진 마음의 방식일 뿐이다. 그것은 진정한 내가 아니다.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에고를 알아차리는 일이다. 알아차림과 에고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알아차림은 현재의 순간 속에 숨겨져 있는 힘이다.
자신에 대한 시각이 좁고 제한되어 있으며 자기중심적일수록, 당신은 타인에 대해서도 자기중심적이이고 무의식적인 부분에만 눈이 가고 거기에 더 반응한다. 상대방의 ‘잘못’,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잘못이라고 당신이 해석하는 부분을 상대방 그 자체로 본다. 즉, 상대방의 에고만을 보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에고를 강화한다. 그 사람 안의 에고를 ‘뚫고’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에고 ‘그 자체’를 본다. 그러면 그 에고를 보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당신 안의 에고이다.
매우 무의식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안에 투영된 모습을 통해 자신의 에고를 경험한다. 상대방 안의 무엇인가에 반응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같은 것이 있기 때문임을, 그리고 때로는 자신 안에만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자기 자신의 에고가 보인다. 이 단계에 오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것을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자신을 피해자로 보는 것을 중단하게 된다.
당신은 에고가 아니다. 그러므로 자신 안의 에고를 알아차렸다고 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신이 누구가 아닌가를 알게 되었음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이 누구가 아닌가를 아는 것을 통해서 진정으로 자신을 아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제거된다.
누구도 당신이 누구인가를 가르쳐 줄 수 없다. 누군가가 가르쳐주는 것은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에 당신을 변화시킬 힘이 없다. ‘나는 누구인가’는 믿음이 필요하지 않다. 사실 모든 믿음은 언 것이든 장애물이다. ‘나는 누구인가’는 심지 깨달음조차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당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달음 없이는 ‘진정한 나’는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하지 않고 묻혀 있는 상태가 된다. 물론 그 묻힌 장소가 ‘진정한 나’가 있는 곳이다. 가난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사실은 1억 달러의 예금을 가지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언제까지나 그 막대한 부를 잠재 가능성으로만 남겨두는 것과 같다.
거울 속 자신을 자세히 살펴보라. 멋지고 잘생긴 모습 뒤에,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기계가 숨은 우주처럼 움직이고 있다. 정교하게 맞물린 뼈대, 튼튼한 근육망, 상당량의 특수한 액체, 서로 협업하는 내부 기관들로 이루어진 그 기계는 어둠 속에서 칙칙폭폭 열심히 움직이며 우리 생명을 유지해준다. 자가 치유 능력을 갖춘 하이테크 감각 소재로 이루어진 막, 즉 우리가 피부라고 부르는 막이 이 기계를 매끈하게 덮어 보기 좋은 모양을 연출한다.
이 기계뿐만이 아니라, 뇌도 있다. 우리가 우주에서 찾아낸 것 중 가장 복잡한 소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무게가 약 1.4킬로그램인 뇌는 두개골이라는 장갑 벙커 안에서 작은 통로들을 통해 신속하게 전달되는 정보를 모아 모든 작전을 주관하는 통제 센터이다.
뇌는 뉴런이라고 불리는 세포와 교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포들이 수천억 개나 된다. 이 세포들은 각각 도시 하나만큼 복잡하며, 그 안에 인간의 게놈 전체를 품고 있다. 수십억 개의 분자들을 복잡하고 효율적으로 교환하는 역할도 한다. 각각의 세포는 초당 최대 수백 번 다른 세포에 전기 펄스를 보낸다. 뇌에서 오가는 이 수많은 펄스들을 각각 광자로 표시한다면, 눈이 부시다 못해 멀 것 같은 광경이 만들어질 것이다.
이 세포들은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어서 인간의 언어로는 미처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종류의 수학이 필요하다. 전형적인 뉴런은 이웃 뉴런들과 약 1만 번 접속한다. 뉴런의 수가 엄청나게 많다는 점을 감안하며, 뇌 조직 1세제곱센티미에서 이루어지는 접속 횟수가 은하수의 별들 숫자와 맞먹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두개골 속의 이 1.4킬로그램짜리 기곤, 젤리 같은 농도의 이 분홍색 기관은 우리에게 낯선 계산기이다. 자체 구성이 가능한 소형 부품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가 꿈에서나 그려보는 모든 기계를 까마득히 앞선다. 그러니 만약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지거나 삶이 따분하게 느껴진다면, 기운 내기 바란다. 우리는 이 행성에서 가장 분주하고 가장 빛나게 빛나는 존재다.
우리 이야기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 우리가 아는 한, 지구상에 우리만큼 복잡한 시스템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스템의 프로그래밍 언어를 해독하는 일에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고 있다. 데스크톱 컴퓨터가 주변기기를 스스로 통제해서, 제 커버를 벗기고 웹캠의 랜즈를 그 안의 회로 쪽으로 돌린다고 상상해보라. 우리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두개골 안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발견한 사실은 인류의 지성이 이룩한 가장 의미있는 발전 중 하나로 꼽힌다. 우리가 하는 행동, 생각, 경험의 수없이 다양한 측면들이 광대하고 촉촉하며 화학물질과 전기로 움직이는 네트워크, 즉 신경계와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 있다는 사실, 이 기계는 우리에게 낯설기 그지없지만, 어쨌든 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 그리고 만약 이미 일어났거나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것이 삶의 주된 목적이 될 수 있는가? 목적이라는 것은 당신이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첫 번째의 깨어남, 사념이 사라진 의식을 짧은 순간 경험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의 습관적인 생각, 특히 전 생애 동안 동일화되어 온 끊임없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갑자기 알아차림으로써 깨어남이 일어나기도 한다. 생각을 알아차리지만 그 생각의 일부가 아닌 알아차림이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다.
알아차림과 생각은 무슨 관계인가? 알아차림은 공간이며, 그 공간이 스스로를 의식할 때 그 공간에 생각이 존재하는 것을 안다.
알아차림 혹은 ‘현존’을 짧게라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직접적인 앎으로 일어난다. 이제 그것은 더 이상 마음속에 있는 하나의 개념이 아니다. 이제 당신은 무의미한 생각들에 빠지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기로 의식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이 순간에 존재함’을 삶 속으로 초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공간을 만들 수 있다. 깨어남의 은총에는 책임이 따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살아가려고 할 수도 있지만, 알아차림의 중요성을 알고 그것이 자신의 삶에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건임을 인식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될 때, 그 등장하는 의식에 자신을 열고 그 빛을 이 세상에 가져오는 것이 삶의 주된 목적이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나는 신의 마음을 알고 싶다. 나머지는 작고 세부적인 것들이다.” 신의 마음은 무엇인가? 의식이다. 신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작고 세부적인 것들이란 무엇인가? 당신의 외부적인 목적, 바깥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다.
따라서 당신은 어쩌면 자신의 삶에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이 이미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 왔음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생각과 알아차림의 분리 과정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삶의 진정한 목적에서 깨어나기, 그리고 행복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나아가는 것이라는 예수님 진복팔단의 참행복 선언에 따라, 자신의 의지로 책임지는 삶이 무의식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나의 의식은 이미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 그것은 나타나지 않은 것, 영원한 것이다. 그러나 우주는 서서히 의식이 깨어날 뿐이다. 의식 그 자체는 시간을 초월해 있으며 진화하지 않는다.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의식이 우주라는 현상계로 나타나면 그것은 시간에 종속되고 진화 과정을 겪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인간의 마유도 이 과정의 이유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 안에서 그것을 잠깐 들여다보고 그 속에 의식적인 참여자가 될 수는 있다.
의식은 형상의 일어남 뒤에 있는 지성, 즉 조직화 원리이다. 의식은 형상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수백만 년 동안 그 형상들을 준비해 왔다.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은 의식의 영역은 다차원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우주라는 형상의 차원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형상의 세계와 형상 없는 세계는 서로 스며들어 있다.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알아차림, 내적 공간, ‘현존’으로서 이 차원 속으로 흘러들어 온다.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의식이 깨어 있는, 그럼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완성하는 인간 형상을 통해서이다. 이 높은 목적을 위해 인간이라는 형상이 창조되었으며, 수백만의 다른 형상들이 그것을 위한 토대를 준비해왔다.
의식은 외부로 나타난 차원 속으로 환생한다. 즉 형상이 된다. 그렇게 할 때 의식은 꿈꾸는 것과 같은 상태로 들어간다. 지성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의식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무의식적이 된다. 형상 속에 자신을 잃어버리고 형상과 동일화되는 것이다. 신이 물질 속으로 내려오는 것이라고 묘사할 수 있다. 우주 진화의 이 단계에서는 외부로 향하는 모든 운동이 이 꿈의 상태에서 진행된다. 깨어남의 짧은 경험이 찾아오는 것은 개개의 형상이 소멸될 때, 결국 죽음의 순간에만 일어난다. 그 뒤는 그다음 환생이 시작되고, 그다음 형상과의 동일화가 일어나며, 집단적인 꿈의 일부인 그다음 개별적인 꿈이 다시 시작된다. 사자가 얼룩말의 몸을 찢어 놓을 때, 얼룩말의 형상으로 육체화되었던 의식은 그 소멸하는 형상으로부터 분리되며 일순간 자신의 본질인 불멸의 의식에 깨어난다. 그러다가 금방 잠 속으로 다시 떨어져 또 다른 형상 속으로 환생한다. 사자가 늙어 더 이상 사냥할 수 없게 되고 최후의 숨을 내쉴 때, 여기서도 또다시 짧은 깨어남이 있고, 또 다른 형상의 꿈이 뒤를 잇는다.
우리의 행성에서 인간의 에고는 의식이 형상과 동일화되는 우주적인 잠의 마지막 단계를 나타낸다. 이것은 의식의 진화에 꼭 필요했던 단계이다.
인간의 뇌는 고도로 차별화된 형상이며, 이 형상을 통해 의식이 이 세상의 차원으로 들어온다. 인간의 뇌에는 뉴런이라 불리는 약 천의 개의 신경 세포가 있다. 이것은 우주의 뇌라고 볼 수 있는 은하계에 있는 별들의 숫자와 같다. 뇌가 의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의식이 그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지구에서 가장 복잡한 물질 형태인 뇌를 만들어 낸 것이다. 뇌가 손상되었다고 해서 의식을 잃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의식이 이 형상 차원으로 들어오기 위해 그 뇌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당신은 의식을 잃어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의식은 본질적으로 당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오직 자신이 소유한 것만을 잃을 수 있을 뿐이며, 당신 자신인 것을 잃을 수는 없다.
깨어 있는 행동은 외부적인 목적-무엇을 하는가-과 내면적인 목적-깨어남과 그 깨어 있음을 유지하는 것-이 조화를 이룬 행동이다. 깨어 있는 행동을 통해 당신은 외부로 향한 우주의 목적과 조화를 이룬다. 당신을 통해 의식이 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온다. 의식은 당신의 생각 속으로 흘러들어 와 생각들에 영감을 불어넣는다. 당신이 하는 일 속으로 흘러들어가 행동을 안내하고 힘을 부여한다.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는가가 당신의 운명을 실현하는가 아닌가를 결정한다. 그리고 당신이 하는 일을 어떻게 하는가는 당신의 의식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당신이 하는 일의 주된 목적이 일 그 자체가 될 때, 더 정확히 말해 당신이 하는 일 속으로 깨어 있는 의식이 들어오는 것이 주요 목적이 될 때, 우선순위가 뒤바뀐다. 의식의 흐름이 일의 질적 수준을 결정한다. 그것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하든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당신의 의식 상태이다.
깨어 있는 행동의 세 가지 방식
의식이 당신이 하는 일 속으로 흘러들어 올 수 있는, 그렇게 해서 당신을 통해 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 올 수 있는 세 가지 길이 있다. 당신이 삶을 우주의 창조적 힘과 연결시키는 세 가지 방식이다. 여기서 방식이란 당신이 하는 일 속으로 흘러들어 와 당신의 행동을 깨어 있는 의식과 연결하는 밑바탕의 에너지 주파수를 의미한다. 이 세 가지 방식 중 어느 하나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면 당신이 하는 일은 기능장애적이고 에고에서 나오는 것이다. 또한 이 방식은 하루 중에도 변할 수 있지만, 삶의 특정 단계에서는 그것들 중 어느 한 가지가 지배적일 것이다. 각각의 방식은 특정한 상황에 적당하다.
깨어 있는 행동의 세 가지 방식은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이다. […]
[현대 뇌과학은 무의식에 영향을 주는 과학적 이론은 정리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인간의 의지와 마음 안에 담을 수 있는 그릇은 깨어남과 깨달음이라는 의지적 덕행을 닦는 힘의 영향도 고려한다. 왜냐하면 무의식의 영향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저 인간의 운명론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신앙인은 인간의 의지와 덕행 닦는 노력의 은총을 믿는다. 우리 인간의 무의식도 하느님과 인간의 메카닉 시스템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의식의 깊은 곳을 유영하는 뇌의 신비스러운 탐험과 뇌과학은 발전한다. 뇌 구조의 신비한 시스템을 창조한 하느님을 믿는다면 말이다.]
데이비드 이글먼은 우리가 뇌에 대해 궁금해하는 질문들에 대해 현대 뇌과학이 가지고 있는 해답을 제시한다. 나는 세상을 어떻게 인지하고 이해하는가? 마음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마음은 어떤 요소들에 영향을 받는가? 무엇보다도, 이 모든 마음 활동의 기저에 있는 ‘의식’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런 질문들이 흥미로운 건, 마음이 형성되는 과정이 스스로 구체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비의식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 우리는 ‘마음대로’ 행동하지만, 마음이 작동하는 과정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이루어진다. 그래서 더없이 신비롭다. 하지만 마음이 뇌에 담겨 있다는 걸 믿는다면, 뇌의 구조와 기능을 이해하면 마음의 본질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에, 이 책은 더없이 유익하다. _정재승(KAIST 뇌인지과학과 교수)

